♡5월 12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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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네레우스 또는 네레오(Nereus)
성 아킬레우스(Achilleus)
축일 5월 12일
성 네레우스(또는 네레오)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순교자로서 생몰 연대는 불분명하다.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원래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인이었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가 4세기 말에 쓴
그들의 무덤 묘비에 따르면, 그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손녀이며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5월 12일)를
죽이라고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받아 도리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이를
‘신앙의 기적’이라고 표현하였다.
결국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함께 로마에서 폰자(Ponza)라는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 세 사람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테라치나(Terracina)라는 섬으로
옮겨졌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그들의 추방 자체가
하나의 긴 순교록이라고 하였다.
이 섬으로 유배된 후에 성녀 도미틸라는 화형에,
그리고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의 묘에 안치되었다.
그들은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공경되어 그 이름이 5세기
로마의 축일표에 기재되었고, 젤라시우스 전례서
(Sacramentarium Gelasianum)에는 그들의 축일 미사
전례문이 수록되어 있다.
398년 교황 성 시리키우스(Siricius)는 그들을
기념하여 성녀 도미틸라의 묘에 성당을 세웠고,
이 성당에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대교황은
재임시 그들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강론을 하였다.
“이 성인들은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발 아래
놓았습니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는
그들을 기념하여 새 성당을 지었으며,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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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미니코 드 라 칼차다(Dominic de la Calzada)
축일 5월 12일
성 도미니코 드 라 칼차다의 ‘드 라 칼차다’란 말은
‘방죽 길’을 뜻하는 말인데, 그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순례 길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도미니코(Dominicus)는 에스파냐 바스크 지방의
빌로리아 태생인데, 젊어서 그는 수차례에 걸쳐서
베네딕토회에 입회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무뚝뚝한 그의 외모와 무식한 것이
수도자 생활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세운 은둔소에서 독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오스티아(Ostia)의 성 그레고리우스
(Gregorius)가 남동 로파냐로 설교하러 왔을 때,
도미니코는 스스로 그를 수행하였고,
성 그레고리우스가 운명할 때까지 그와 함께 머물렀다.
자기의 스승이 운명하자 그는 이전 생활로 되돌아갔는데,
원래의 은둔소에서 멀지 않은 부레바의 황야에
은둔소를 세웠다. 이곳은 성 야고보 경당으로 가는
순례자들의 통행로였다. 그러나 이곳은 원시림이
가득하고 극히 위험한 곳이므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는 이곳에 움막과 기도소를 짓고 살면서 원목을
베어내고 좋은 길을 만들었다.
그의 노력은 성공적이어서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또 훌륭한 순례자의 길을 닦았다.
그는 1109년경에 운명하였고, 자기 자신이 만든
무덤에는 거의 매일같이 기적이 일어나서 유명한
성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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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디오니시오(Dionysius)
축일 5월 12일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그가 돌보던
어린 순교자 성 판크라티우스(Pancratius, 5월 12일)의
삼촌이었다. 그들은 함께 로마로 와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하였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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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릭트루다(Rictrudis)
축일 5월 12일
유명한 가스코뉴(Gascogne) 가문의 후예인
성녀 릭트루다는 클로비스 2세를 섬기던 프랑크 귀족인
성 아달발두스(Adalbaldus, 2월 2일)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들도 모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결혼생활 16년 되던 해 행복한 생활을 하던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친척들에 의해 살해되자
국왕 클로비스에 의해 재혼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성녀 릭트루다는 옛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인
성 아만두스(Amandus, 2월 6일)의 도움으로 왕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수녀가 되었다.
그녀는 후일 마르시엔(Marcienne) 수녀원의 원장으로서
40년을 봉사하며 살았다. 후에 성인이 된 그녀의
자녀들은 성녀 아달신다(Adalsindis, 12월 25일),
성녀 에우세비아(Eusebia, 3월 16일),
성녀 클로트신다(Clotsindis, 6월 30일) 그리고
성 마우룬티우스(Mauruntius, 5월 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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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모도알도(Modoaldus)
축일 5월 12일
로모알두스(Romoaldus)로도 알려진
성 모도알두스(또는 모도알도) 주교의 출생지는
아키텐(Aquitaine)이다. 그는 이곳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성녀 세베라와 성녀 이두베르가는 그의
누이들이다. 그는 자주 국왕 다고베르트(Dagobert)의
궁으로 갔는데, 여기서 메스(Metz)의 성 아르눌푸스
(Arnulphus, 7월 18일)와 쾰른(Koln)의
성 쿠니베르투스(Cunibertus, 11월 12일)를 만나
우정을 깊게 하였다.
그 후 그는 트리어(Trier)의 주교로 착좌했는데,
비록 주교직에 있었으나 철저한 보속생활을 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말끔히 씻으려고 노력하였다.
성 모도알두스는 영적 지도자, 주교, 상담자 역할은
물론 수도원 건설을 위해서는 땅과 돈을 최우선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순교 성인인 제르마느 그랑발을
사제로 서품시켰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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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텔하르드(Ethelhard)
축일 5월 12일
일부 기록에서 성 에텔하르드는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승품되기 전에 링컨셔(Linconlnshire)의 루스(Louth)에
있는 대수도원의 원장이었으며 잉글랜드(England)
윈체스터(Winchester)의 주교였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파머(Farmer)는 그가 윈체스터의 주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오파(Offa) 왕과 교황이
리치필드(Lichfield)와 캔터베리를 분리한 직후에
캔터베리의 주교직으로의 승품되었다.
그리고 처음에 성 에텔하르드는 머시아(Mercia)의
지배가 된 켄트(Kent) 지방의 양떼를 맡지 못했다.
796년 오파 왕이 죽고 켄트 지방이 반란을 일으키자
성 에텔하르드는 피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 해 복자 알퀴누스(Alcuinus, 5월 19일)의
도움을 받아 캔터베리 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802년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 6월 12일)는
캔터베리 교회를 이전의 상태로 재허가 하였으며
수도 관구를 런던(London)으로 옮기자는 의견을
불허하고 리치필드 관구를 없앴다.
성 에텔하르드는 803년 클로브쇼(Clovesho) 시노드를
열어 새로 선출된 주교로 하여금 신앙 고백과 소속 관구
주교에게 순명을 서약할 것을 자필로 쓰는 의무규정을
만들었다.
성 에텔하르드가 803-805년 사이에 캔터베리에서 죽자
그의 시신은 캔터베리 대성당에 모셔졌고 관구의
재건을 감독한 업적으로 공경을 받았다.
그의 삶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에게 보낸
복자 알퀴누스와 교황 성 레오 3세의 편지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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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에피파니아
축일: 5월 12일
순교 성녀. 성녀는 떼르뚤로(Tertullo) 왕의
참사원이었던 알렉산드로의 아내이었다.
알피오(Alfio)와 필라델피오(Filadelfio),
치리노(Cirino) 삼형제의 기적을 보고서
성녀 에피파니아는 남편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자로 개종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선을 많이 하였다.
떼르뚤로 왕은 성녀를 잡아 가두었으며,
법정에서 남편의 소재지를 밝히지 않자,
성녀의 유방을 절단하는 등의 고통을 가하여,
이 고통으로 죽게 내버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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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피파니오(Epiphanius)
축일 5월 12일
팔레스티나(Palestina)의 베산두크(Besanduk)에서
태어난 성 에피파니우스(또는 에피파니오)는 성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언어들의 전문가였다.
팔레스티나에서 은수자로 지내던 그는 이집트로
가서 몇 군데의 사막 공동체에서 체류하였다.
333년경에 팔레스티나로 돌아온 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자신이 세운 엘레우테로폴리스
(Eleutheropolis)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의 명성은 뛰어난 학문과 엄격성, 고행, 영적 지혜 및
영적 권고로 인하여 높은 칭송을 받았으며
‘팔레스티나의 현인’으로 불렸다. 또한 그는
살라미스, 키프로스(Cyprus)의 주교 그리고 367년에는
자기 수도원의 장상으로 있으면서 키프로스의
대주교가 되었다.
에피파니우스는 아리우스(Arius) 이단에 대하여
엄중한 설교를 자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의 발렌스 황제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은
극소수의 정통파 주교였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유명하였는지를 증명할 수 있다.
그는 메테시우스와 동방 주교들의 요구에 반대하던
바울리누스(Paulinus) 주교를 후원하였고,
382년에 교황 다마수스(Damasus)가 소집한
로마 공의회(Council of Rome)에도 참석하여 큰 공을
세웠다. 오리게네스(Origenes)의 가르침에 대한
그의 반박 때문에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와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한번은 그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Joannes Chrisostomus)를 반대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루스(Theophilus)를 지원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갔으나, 곧 자신의 입장과 위치를
파악하고서 키프로스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여행 중에 운명하였다.
그는 수많은 신학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삼위일체나 부활에 관한 안코라투스가 유명하며
또 옛 유대 관습에 관한 글도 남아 있다.
그는 성모 신심에 권위가 있었고 베드로의 수위권을
강력히 가르쳤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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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요안나(Joan)
축일 : 5월 12일
요안나는 '야훼께서 은혜를 주신다'란 뜻이다.
포르투갈의 알폰소 5세 국왕과 코임브라의
엘리사벳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리스본에서 났고,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하고 또 오빠가
중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궁중에서 처녀 시절을 보내면서도
매우 열심하고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수도생활을 꿈꾸었다. 이에 대한
부친의 태도는 매우 완강하여 허가를
받아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의 부친과
오빠가 무어인들을 쳐부신 뒤에, 그녀의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아베이로의 도미니칸이 되었다.
그러나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1485년까지
서원을 발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왕위 계승자가 확정됨에 따라 그녀는
수녀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매우 단순한 삶을 살았고,
사랑의 실천이 뛰어났고, 포로들을
속량하는데 많은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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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르마노(Germanus)
축일 5월 12일
성 게르마누스(또는 제르마노)는 634년 또는
640년경 동로마 제국의 헤라클리우스 황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황제 세력 간의 왕위 쟁탈
과정에서 축출되어, 콘스탄티노플의 성녀 소피아
성당의 성직자들 손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후 668년에 그 성당의
사제가 되었다. 715년 그는 정통 신앙을 지닌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2세(Anastasius II)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착좌 후 곧바로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그리스도 단의설
이단과 그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725년 황제 레오 3세가 성화상 공경을 배척하고
성화상 파괴를 지시한 것에 대하여 강론과 저술로써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계속된 억압에도 굴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항의의 표시로 730년 총대주교직에서 물러나
그리스 아테네 근처에 있는 자신의 영지 플라토니움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의 역사적 저술인
“이단자들과 주교회의에 대하여”
(De Haeresibus et Synodis)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733년경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부분의 저작들은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는
황제 레오 3세의 지시로 모두 불태워졌지만,
네 편의 교의신학적인 서간들이 남아 있다.
성 게르마누스는 특별한 가치가 있는 일곱 편의 강론을
통하여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귀중한 가르침을 남겼다.
또한 그는 전례를 적극 권장하고 찬미가를 작곡한
사람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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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젬마(Gemma)
축일 5월 12일
젬마란 라틴어로 '보석'이란 뜻이다.
이탈리아 남동부 아브루치(Abruzzi)의 솔모나 태생인
성녀 젬마는 농부의 딸로 태어났으나 부모의 깊은
신앙을 물려받으며 자랐다. 그녀는 주로 낮에는
양치기로 부모를 도왔으나, 밤에는 들 기도하고
묵상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가 뛰어났기에
12세 때부터 여러 가지 위험이 따랐는데,
특히 그 지방의 귀족이 그녀를 납치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때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녀는 먼 곳으로
피신하여 은둔소를 세우고 42년 동안 살았다.
이때부터 그녀의 높은 성덕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90년에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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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판크라시오(Pancras)
축일 5월 12일
시리아(Syria) 또는 프리지아(Phrygia) 태생인 듯한
성 판크라티우스(Pancratius, 또는 판크라시오)는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되어 삼촌인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5월 12일)와 함께
로마(Rome)에 와서 살았다. 그는 여기서 삼촌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 이때 불과 14세의 나이였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로마에서 참수치명 하였고, 아우렐리아누스
(Aurelianus) 가도에 있는 칼레포디우스(Calepodius)
묘지에 안장되었다.
성 판크라티우스는 특별히 영국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5월 27일) 주교가의 그의 첫 번째 성당을
성 판크라티우스에게 봉헌하고 성인의 유해를 모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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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판크라시오 순교자(304년 사망?)
축일;5월 12일
런던에 있는 성판크라시오 철도역은
우리가 그에 대해 거의 아는것이 없는
초기 그리스도인 순교자에게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박해중에 14세의 어린 나이로 순교했다고 한다.
그는 후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동 묘지에 묻혔다.
교황 대그레고리오는 그곳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세웠고, 베네딕토회 회원인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영국에 오자 그는
자기가 세운 첫 교회에 판크라시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철도역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판크라시오는 와이스먼 추기경의 소설인
'파비올라'에서 소설화되어 나타난다.
독일 농부들은 이름이 비숫한 세 성인들,
즉 판크라시오,세르바시오,보니파시오를
그들의 축일이 5월 12,13,14
일인데도 계절에 맞지 않게 날씨가
싸늘하다 하여 '차가운 사람들'
이라고 말한다.
설명 ; 우리는 또다시 그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 그의 생애와
죽음이 교회의 기억 속에 지금까지 고이
간직되어 온 또 한분의 성인을 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아득히 사라졌거나 갖가지
환상적인 전설과 뒤섞여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확고한 사실은 남아 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이며, 그의 영웅적인 생애는 그 당시의
교회를 통하여 영감의 물결을 보내 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느낌을 함께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인용 ;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가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며 나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서게 될것이다.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이 말을 명심하여라. 그때 어떻게 항변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라.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루가2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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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파트리치(Francis Prtrizzi)
축일 5월 12일
프란치스코 파트리치(Franciscus Patrizzi,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Toscana) 지방 시에나(Siena)의 귀족 가문인
파트리치가의 후손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 도미니코 회원인 복자
암브로시우스 산세도니(Ambrosius Sansedoni)의
강론을 듣고 하느님께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어느 사막에 들어가서 은둔 생활을 할 꿈을
키웠으나, 과부이며 맹인이던 어머니께 대한
의무 때문에 집에 있어야만 하였다.
어머니가 사별하자 그는 22세의 나이로
성 필리푸스 베니티우스(Philippus Benitius)가 세운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 입회하여 유명한 선교사 및
설교자가 되었다. 대중적인 그의 설교는 수많은
군중을 사로잡았으나, 회원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질투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매우 예민한 그는
혹시라도 스캔들이 생길까봐 고심하다가 성모님께
도움을 청했는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다.
물론 이런 증세는 오래 가지 않았으나,
그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혀를 사용하라는 뜻으로 이 표지를 받아들였다.
그 후 그는 놀라운 설교를 할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설교를 두고 시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망일을 1328년의 성모 승천 대축일
이라고 예언한 뒤 바로 그 날 사망하여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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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성녀 에우프로시나(Euphrosyna)
성녀 테오도라(Theodora)
축일 5월 12일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황제 티투스(Titus)와
도미티아누스(Domitianus)의 질녀이다.
성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째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는 95년 로마 집정관이었던
성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 6월 22일)의
부인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질녀인 도미틸라가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고 가예타(Gaeta) 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판다타리아(Pandataria) 섬으로
추방했다. 이교도 역사학자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와
디온 카시우스(Dion Cassius)는 도미틸라가 로마 제국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은 무신론자 또는 신성 모독자라는
죄명으로 고발당하여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둘째 이야기에 의하면, 역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성녀 도미틸라가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질녀라고
전한다. 평생 동정을 지키기를 원했으나 신자임이 발각되어
판다타리아 섬에서 북쪽으로 약 25마일 떨어진
폰티아(Pontia) 섬으로 추방되었다.
도미틸라를 죽이라고 파견된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인 성 네레우스(Nereus)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는
오히려 그녀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을 받아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고 도미틸라와 함께 추방되었다.
이후 도미틸라는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말처럼
순교와 마찬가지의 긴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마침내
테라치나(Terracina)에서 도미틸라는 화형에,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아 함께 순교하였다.
이 때 그녀의 수양자매인 성녀 에우프로시나(Euphrosyna)와
테오도라(Theodora)도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성녀 도미틸라와 성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의 유해는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의 묘에
안치되었고, 398년 성 시리키우스(Siricius) 교황은
그들을 기념하여 이곳에 성당을 세웠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는 새 성당을
지었으며,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되었다.
수많은 초기 순교자들처럼 도미틸라 성녀에 대해서도
정확한 사실들이 전해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긴 교회 전통 속에서 성녀 도미틸라는 황제의
질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명예와 부귀를 버리고
목숨으로 신앙을 지켰음을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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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필립보(Philip)
축일 5월 12일
성 필리푸스(Philippus, 또는 필립보)는 교황청에 의해
시칠리아(Sicilia)로 파견된 첫 번째 선교사로서
아지로네의 작은 언덕 마을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는 모순되거나
전설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