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내보내라
문제는 공(空)입니다. 불교의 마지막 문제는 언제나 비우는 것, 곧 공(空)입니다.
모든 일(것)을 비우고 모든 일(것)을 털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비워라‧털어버려라.’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말일 뿐입니다.
막상 비우려고 하고 털어버리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로는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해야 비워집니까?
비우려고 하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뿌리지 않은 씨앗은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내가 뿌린 씨앗이 전부 내 발등에 떨어지고 내 가족에게 떨어집니다.
뿌리지 않은 씨앗이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 누구도 뿌려놓은 씨앗이 나에게 오는 그 결과에 대해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유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두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괴롭든 고달프든 서글프든 싫든 좋든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비운다.’라는 것은 ‘받아들인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뿌려놓은 씨앗이 나에게 오는 것이니까 이유 없이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일 때 ‘싫다‧괴롭다‧고단하다.’ 등의 조건을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뿐입니다.
‘받아들여라, 조건 없이 받아들여라.’ 공(空)! 비우는 것은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울이 물건을 비추듯 하는 것입니다.
붉은 것이 오면 붉은 대로 비추고, 푸른 것이 오면 푸른 대로 비출 뿐입니다.
‘왜 너는 그만큼만 붉으며 왜 또 너는 그렇게 푸른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똥은 똥대로, 물은 물대로 비출 뿐입니다. 내가 똥을 뿌렸으니까, 똥이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내가 성을 뿌렸으니까, 성이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보냈으니까, 짜증이 나에게 오고,
내가 신경질을 내보냈으니까, 신경질이 나에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보내지 않은 것은 나에게 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나 자신은 어떻습니까?
내가 내보내고 내가 뿌린 씨앗에 대해 전부 거부감을 가지고 ‘싫다‧고달프다.’라며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 열매가 내 발등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모두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뿌려놓은 씨앗이니까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만 받아들일 때는 거울이 물건을 비추듯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이 나간 것은 반드시 들어오게 되어 있고 들어온 것은 반드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이 들어온 걸 다시 내보낼 때 절대 조작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들어온 대로 그대로 내보내야 합니다.
나에게서 다시 내보낼 때 갑이나 을에게만 해당하는 식으로 내보내지 마십시오.
남자 여자나 어른, 아이, 100년 전이나 100년 후, 1000년 전이나 1000년 후의 사람
그 누구에게도 똑같이 해당이 되도록 내보내야 합니다.
거기에 아무런 물도 묻히지 마십시오.
붉은 물도 묻히지 말고 푸른 물도 묻히지 말고 그대로 내보내야 합니다.
내보낸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것은 또 그대로 내보내야 합니다.
여기에 나의 인위적인 조작을 붙이면 안 됩니다.
어떤 인위적인 조작도 붙이지 않고 그대로 회전만 되면,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공(空)’이요, ‘무(無)’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흔히 ‘공(空)이다.’, ‘무(無)다’라고 하면 착각을 합니다.
여기에 어떤 실체가 있다가 없어진 것을 ‘공이나 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공이나 무라고 하는 것은 있던 것이 없어진 상태를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붉은 것은 붉은 대로 받아들이고 푸른 것은, 푸른 대로 받아들여
나의 인위적인 장난을 붙이지 않고 자연적으로 회전되는 그대로에 맡겨두는 것을 이릅니다.
대우주의 법칙이, 법계의 법칙이 그대로 회전하게 내버려 두는 이 상태를 일러
불교에서는 ‘공(空)’‧‘무(無)’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다가 자꾸 무엇을 붙이려고 합니다.
나에게 오는 일이나 나에게서 내보내는 일들에 대해
모조리 내 감정이나 욕심 등의 인위적인 조작을 붙여 버립니다.
동쪽 하늘에 뜬 해가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공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공이라 하고 이것을 그대로가 무(無)라고 합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듯이 눈앞에 있던 물체가 없어진 상태가 공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붉은 것을 내보내면 붉은 것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푸른 것을 내보내면 푸른 것이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도 푸른 것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서 다시 나갈 때는 지혜롭게 내보내야 합니다.
한 개인에게 부딪히는 감정이나 욕심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평등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100년 전 사람이나 100년 후 사람이나, 1000년 전 사람이나 1000년 후 사람이나
그 누구에게도 거부감이 없이 비평 없이 모두가 ‘옳다’고 하며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보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불교에서의 ‘비운다.’라는 의미는 조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 첫 단계는 나에게 들어오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는 것 그대로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은 비우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붙이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야 비우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나에게서 나갈 때에도 지혜롭게 그대로 내보내야 합니다.
여기에 어떤 인위적인 조작을 붙이지 말고 그대로 내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할 때 대우주의 법칙이 자연적으로 회전하게 되며
이 상태를 불교에서는 ‘공(空)’이나 ‘무(無)’라고 합니다.
- 우룡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