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20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루카 7,31-35
<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
믿음 대 믿음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의 저자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믿게 되고, 믿는 대로 되어간다’라고 말하며 재미있는 실험결과를 제시합니다.
1990년경 에렌 랭거(Ellen Langer) 박사는 70대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1959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30년 전인 1959년에 유행하던 옷을 입었고, 당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또 그 때의 신문과 잡지를 보았으며 그 당시에 사는 것처럼 대화를 했습니다.
몸과 정신이 그 당시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박사는 그들에게서 노화와 더불어 퇴화되는 증상들을 측정해보았습니다.
측정의 기준은 근력, 인식력, 지각력, 미각, 청각 등이었습니다.
그러한 증상들은 노인병전문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생물학적 지표들입니다.
닷새 동안 그러한 생활을 끝낸 후 실험에 참가한 노인들은 많은 부분에서 개선된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5년 정도는 젊어진 모습들이었습니다.
청력과 기억력도 개선되었습니다.
랭거 박사는 “노화는 어쩔 수 없이 늙어간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이렇듯 편협한 정신자세를 떨쳐낼 수만 있다면 노년을 보다 젊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참조: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한문화 2000, 66)
저도 어렸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충격이었는지, 배가 아프면 위암이 걸렸다고 했고 머리가 아프면 그 어려운 단어인 뇌종양을 찾아내어 그것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인데 이상하게 그 두려운 것이 나에게 벌어질 것만 같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멈추지 못했다면 정말 그렇게 됐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에게는 가끔 ‘가상임신’이란 것이 일어납니다.
아기를 갖기를 너무 바라면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음에도 배가 커지고 가슴도 부풀어 오르는 등 아기를 가진 것과 똑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곧 믿음이 되고 모든 것은 믿는 대로 변하게 됩니다.
EBS 한 다큐 실험에서, 우유 시음회에 사람들을 초대해 놓고 몇 명이 우유가 상한 것처럼 이상한 반응을 보이도록 시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이 어떠한 반응을 하는지 실험을 하였습니다.
연기자들이 우유를 마시다가 토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니 시음회에 참가한 이들도 우유가 비려서 못 마시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한 명은 정말 식중독에 걸려 입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우유는 매우 신선한 우유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정보들을 육체로 인지하고 머리로 분석하여 마음에 쌓아놓습니다.
마음에서는 이것이 무의식적인 믿음이 되어 다시 생각에 영향을 주고 몸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의식의학 분야의 권위자인 대팩 초프라(Deepak Chopra)박사는 덮개가 달린 병 속에 든 파리를
예로 들었습니다.
덮개가 달린 병 속에 들어 있던 파리는 덮개를 열어주더라도 몇몇 용감한 놈을 제외하고는 병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병이 영향을 주었지만, 이제는 병이 사라지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인 무의식이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증거도 있습니다.
두 부류의 물고기를 칸막이로 구분된 수족관에서 일정시간 키우면, 칸막이를 없앤 후에도 물고기들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조: 같은 책 65쪽)
문제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믿게 된 것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더라도 병이 걸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어 일상에서 항상 무기력하게 지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정적인 믿음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자신은 눈이 작아서 남편이 눈 큰 여자를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은, 자신은 있는 모습 그대로 소중한 존재라 남편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을만하다고
믿어야 변화됩니다.
즉, 믿음은 믿음으로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믿음들을 긍정적인 믿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차서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피리를 불고 곡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리를 불어주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어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자기 정당화만 합니다.
요한은 먹고 마시지 않으니까 마귀가 들렸다 하고,
예수님은 먹고 마시니까 먹보요 술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칸막이가 없는 데도 가지 않는 자신의 모습, 뚜껑이 열렸는데도 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자신을 합리화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내 무의식에 있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새로운 믿음으로 바꾸는데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참다운 지혜는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옳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믿어 내 안에 있는 헛된 두려움과 믿음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많은 예들이 존재합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의 모든 자녀들이 드러낸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0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1코린토 12,31─13,13
루카 7,31-35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상 사랑을 주제로 한 수많은 문학 작품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바오로의 ‘사랑의 찬가’는, 묵상할 때 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천번 만번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마치 천상에 계신 바오로 사도께서 직접 들려주시는 은혜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오랜 인류 역사 안에서 한 문장 한다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사랑을 주제로 노래했습니다.
시나 소설, 연극이나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주된 단골 주제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주제로 한 그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수작이 곧 바오로 사도가 지은 사랑의 찬가입니다.
사랑의 찬가는 예수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랑의 계명
‘서로 사랑하라.’를 구체화시킨 불멸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눈만 뜨면 사랑을 외치지만, 그 정확한 실체, 구체적인 의미도 잘 모르면서 외치고 있는 우리를 위해, 바오로 사도는 아주 친절하고 정확하게 의미를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불멸의 선물, 사랑의 찬가를 선물로 건네십니다.
진실된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는데, 때로 그 정확한 의미도 모르는 우리, 때로 인간적 한계에 부딪쳐 포기하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찬가를 통해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라고 격려하십니다.
사랑의 찬가의 핵심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1코린토 12장 4~7절)
바오로 사도는 지극히 짧은 문장의 나열을 통해 사랑의 속성을 소개하고 있는데, 유심히 읽다보면 문장들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됩니다.
긍정문(~합니다)과 부정문(~하지 않습니다)으로 분류됩니다.
헤아려보니 긍정문도 있지만, 부정문의 수효가 8개로 더 많습니다.
거센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려면 강력한 힘이 필요합니다.
막 태동된 코린토 교회를 바라보며 바오로 사도는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코린토 교우들의 개과천선과 새로운 삶을 위해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연유로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목청 높여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 문화권에 소속되어 있던 코린토는 우상 숭배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하나의 악은 또 다른 악을 불러옵니다.
코린토 사람들의 우상숭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시 전체가 집단적으로 타락했고, 코린토는 문란하고 퇴폐적인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배경 속에 태동된 코린토 교회 교우들을 향해 사랑의 찬가를 집필하셨고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철저히 구별됩니다.
그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고갈되지 않습니다.
영원 불멸의 사랑입니다.
코린토 교회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간절한 호소는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진실된 사랑을 얻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다스리고 자제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영원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지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강론>
(2023. 9. 20. 수)(루카 7,31-35)
<이 세대 사람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31-35).”
여기서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과 받아들였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지는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7-8ㄱ)”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온 ‘군중’을 ‘독사의 자식들’, 즉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꾸짖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대부분 형식적으로만 회개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형식적인 회개는 겉으로 회개하는 척만 하는 위선이고, 거짓 회개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은, 진심으로 회개해서 온 삶을 변화시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만 ‘회개 선포’를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회개 선포’를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7).”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이고, “회개하여라.” 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라는 ‘권고’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심판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예수님의 선포는 구원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또는 구원받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고해성사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하지 않고 고해성사라는 형식만 거치면
용서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을까?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형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도 믿지 않으니까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2-3).”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과 집안 등에 대한 편견 때문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또는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 탓만 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라는 말은,
“저자는 미쳤다.”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예언자다운 생활’을 미친 사람의 모습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친 사람이 하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실제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회개를 거부했거나, 아니면 자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해서 회개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는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일 뿐이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안 된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예수에게는 ‘메시아다운 신비감’이 없다.
그러니 그를 믿을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이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생활 방식과 예수님의 활동 방식은 모두 ‘하느님 뜻’에 의한 일, 즉 ‘하느님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지혜의 모든 자녀”는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고, “드러냈다.”는 “증언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증언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너희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회개’와 ‘복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증명하여라.”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비아냥거려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증언하는 일이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