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1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작품해설]
오세영은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오세영은 그 고뇌를 ‘무명(無名)’이라는 동양적 진리를 통해 탐구한다. 여기에서 ‘무명’이란 본질적인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인 번뇌와 아집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하는 불교 용어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이 무명의 상태에서 깨달음을 통해 존재가 본래적으로 지향해야 할 영원성과 무한성을 찾아가는 노정에 놓여 있는 한편, 존재의 깨달음을 얻은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양식을 보여 준다.
이 시는 제1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으로, 절제와 균형의 미덕이라는 동양적 중용의 의미를 담고 있는 형이상학적 작품이며, 근대적 이성주의라 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삶과 합리적인 사고 체계를 수용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팽팽하고 긴장된 힘으로 절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그릇’이 ‘빗나간 힘’에 의해 ‘깨진 그릇’이 되었을 때, 그것은 아무것이나 베어 넘길 수 있는 무서운 ‘사금파리’의 ‘칼날’이 디어 그 내부에 감추고 있던 긴장된 힘의 본질- 날카로운 면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릇’은 조화롭고 질서 잡힌 ‘원’의 세계이지만, 그것은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매우 불안하고 긴장된 현채로 자신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나 사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단 균형을 잃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그 본래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게 된다. 이 시는 바로 그 같은 편향된 사고방식이 가져올 수 있는 획일화된 이념, 사상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깨진 그릇’에 빙하여 전해 준다. 그러므로 ‘온전한 그릇’이 절제와 균형이 잡힌 합리적인 세계라면, ‘깨진 그릇’은 절젱하 균형이 무너진 비합리적인 세계가 되며, 그러한 왜곡된 이념이나 사상에 대한 ‘맹목의 사랑’을 강요하는 매체가 바로 ‘칼’인 것이다.
처음엔 조화롭고 균형 잡힌 ‘원’의 세계인 ‘그릇’이었지만, 그것이 깨어질 때, ‘원’이 주는 원만한 세계는 마치 ‘칼날’과 같은 예리한 무기가 지배하는 기형적(畸形的) 세계로 변질되고 만다. 이러한 잘못된 세계는 사람들에게 단선화된 이념만을 강요함으로써 정상적인 삶을 구속하고 억압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에서 ‘그릇’과 같은 모나지 않은 합리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시인의 중용적 생활 자세와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해방 의지를 찾아 낼 수 있다.
[작가소개]
오세영(吳世榮)
1942년 전라남도 영광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68년 『현대문학』에서 시 「잠 깨는 추상」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2년 『현대시』 동인
1983년 제15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84년 제4회 녹원문학상 수상(평론 부분)
1987년 제1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2년 제4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2년 제2회 편운문학상 수상(평론 부분)
2000년 제3회 만해시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시집 : 『반란하는 빛』(1970),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2), 『모순의 흙』(1985), 『무명연시(無名戀詩)』(1986), 『불타는 물』(1989), 『사랑의 저쪽』(1990),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1991), 『꽃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 『어리석은 헤겔』(1994), 『눈물에 어리는 하늘 그림자』(1994), 『너, 없으므로』(1997), 『아메리카 시편』(1997), 『벼랑의 꿈』(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