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년~1961년)
미국의 참전용사, 종군기자 그리고 문호.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 유명한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의 저자다. 영문학을 넘어 세계 문학 역사상 허무주의하면 빠질 수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미국이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는 작가이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등장 이후,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로, 유럽은 문학의 주도권을 사실상 미국에 넘겨준 거나 다름 없게 되어버렸다.
헤밍웨이는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 중 대표 3인방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중 가장 중요한 대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는 대체로 극기주의, 허무주의,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강인한 남성상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미국 문학사에서 19세기 미국 최고의 작가로 마크 트웨인과 허먼 멜빌이 꼽힌다면, 20세기에는 헤밍웨이가 꼽힌다.
쿠바의 어떤 카페, 바에 가면 헤밍웨이가 술을 마시다가 싸인을 한 것이 남아있다.
의사인 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어머니의 강요로 자주 여장을 당하고, 여장한 상태에서 지인들을 만나는 일을 경험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나 어머니와는 평생 사이가 나빴다. 헤밍웨이의 생일에 어머니가 그에게 선물을 소포로 보냈는데, 열어보니 그 안에는 권총(그것도 아버지가 자살할 때 썼던 것)이 들어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 헤밍웨이는 아버지 쪽을 완전히 닮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냥꾼/모험가 기질이었으나 쇠락한 아버지와 잔소리 많은 전직 음악가 어머니는 서로 종종 싸웠고, 헤밍웨이는 위의 언급처럼 강인하고 조용한 남자의 표본인 아버지를 따랐다. 헤밍웨이는 쇠락했지만 남자다운 아버지를 평생 존경하였고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가정의 주도권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는 낚시, 사냥 등을 하며 집 밖을 배회하였다. 어머니는 여성이 참정권도 없던 시절에도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조용한 성격의 초라한 아버지와 대조되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욱 부각되었다. 헤밍웨이와 어머니의 악연은 어머니가 죽는 날까지 이어진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헤밍웨이는 곧바로 달려갔지만, 《노인과 바다》를 쓸 무렵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난 글을 마저 써야 한다. 돈을 부치면 가족들이 알아서 할 거다." 라는 식으로 가볍게 무시.
어릴 적 사진. 보시다시피 여아용 옷을 입고 있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헤밍웨이는 무척 짜증냈다고 한다.
처음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해 종군기자로도 활약했고, 1차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으며 무훈을 세웠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그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등에서 발현된다. 이후 신문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1차대전 이후의 파리에 체류하며,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등등의 미국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워갔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무명이지만 능력 있는 예술가들을 지원해 준 사람이다. 이 후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파블로 피카소도 있었고, 이 인연 덕분에 피카소는 헤밍웨이와 지인이 된다. 참고로 남동생 리오 스타인은 시인 겸 평론가.
이들처럼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의 풍요한 예술적 토양과 자유를 즐기면서 산 문학가 집단들을 문학계에선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 칭하며, 이 표현을 최초로 쓴 사람은 앞서 얘기한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이들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충격으로 자신들이 구세대에게 버려진 잃어버린 중간 세대라고 느끼면서, 이전 세대와 단절된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파리의 프랑스인 지성인들은, 전후 풍요를 구가하는 미국에서 보내주는 넘치는 달러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파리와 프랑스 문화에 열렬히 환호하는 척 하지만, 실제론 프랑스어도 배우지 않고 겉핥기로 껍데기 문화만 섭취하는 이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고급쓰레기. 헤밍웨이는 물론 그들의 퇴폐적인 위선을 증오했으며, 자신도 자신의 마초적인 성향 때문인지, 이 당시 '계집애 같이'(?) 예쁘장하고 퇴폐적인 문화에 탐닉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흑역사로 여겼다.
헤밍웨이가 첫 번째 부인인 해들리와 함께 파리 생활을 돌이키며 썼던 회상록을, 4번째 부인인 메리 헤밍웨이(본명은 메리 웰시)가 헤밍웨이 사후 출판한 《이동 축제일(Movable Feast)》에서 '잃어버린 세대'의 유래가 나온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의 차를 고치려고 정비소에 맡겼는데, 젊은 직원이 빨리 고치지 못하자 정비소 사장이 "너희들은 전부 '허탕 치는 세대'야." 라고 호통 쳤다. 거트루드는 이를 나중에 헤밍웨이에게 그대로 전하면서 덧붙였다. "자네도 그래. 자네는 물론… 전쟁을 겪은 모든 젊은이들이 그렇다고. 이 잃어버린 세대들아." lost에는 '길을 잃은' 뜻만이 아니라 '타락한'이란 뜻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 타락한/인생 헛산 세대들아! 라는 일갈이 위에서 설명한 상황에 더 적절하다.
이후 앞에서 언급한 《무기여 잘 있거라》로 큰 명성을 얻은 뒤, 당시 혁명 스페인의 공화제를 열렬히 지지하여 종군특파원으로 자진해 스페인으로 갔고, 혁명군과 함께 보수파 프랑코의 군대를 비판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쓰게 된다. 국내서는 헤밍웨이가 스페인에서 총 한 방 안 쏘고 도시에서 아무런 일 없이 노닥거리다 판타지로 가득한 글줄을 뽑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간혹 떠도는데, 애초에 헤밍웨이는 종군기자였다. 그리고 그는 1차 세계대전의 참전 용사였던만큼 그런 비겁자도 아니었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총을 안 쐈다는 이야기는, 당대에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열렬하게 싸웠다"는 과장된 신화가 퍼지고 그게 헤밍웨이의 명성에 일조했다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건 자체가 워낙 전 세계적으로 반파시스트 성향 지식인, 문화인들이 주목했던 사건이니 조지 오웰, 앙드레 말로 같은 실재로 참전하여 전장에서 싸웠던 다른 네임드 문필가들에 일방적으로 비교당한 면도 있다.
이때 만난 국민당 장군들에 대해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총명하고 말재주가 좋다' 라고 좋은 평가를 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이어진 파리해방전투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열정적인 마초의 호칭은 우리말로 "아부지"에 해당하는 '파파'였다. 본인도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고. (1899년생이니 노르망디면 40대 중반이다. 당시는 징병제시대였으므로 병사들은 대부분 20대 초.)
그리고 노인이 되면서 늙어 약해지는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 1차대전 당시 저승가기 직전 부상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말년의 비행기 사고로 크게 다쳐서 그 후유증이 커졌다고. 그 때문에 더욱 사냥 같은 취미에 몰두하다 급기야 정신착란까지 일으키게 된다. 결국 7월 2일 이른 아침, 그는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아내가 자게 놔둔 채, 엽총을 입에 물고 쏴 자살해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늘그막에 작품이 지지부진한 점으로도 고민해 온 점도 자살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죽기 전 몇 달 동안 글을 쓰다가 계속 찢고 쓰던 걸 던지고…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고, 6월 28일,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는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젠 써지지 않는다! 써지질 않아!"
그는 평생 인생을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진정한 마초로 살았다. 그는 6피트(183cm)가 넘는 거구였으며 항상 끓어오르는 정열을 주체하지 못해, 사냥, 복싱 등 위험하고 강렬한 스포츠를 즐기고, 싸움도 꽤 잘했다는 등 자신의 강인함을 세상에 자랑하고 다녔다. 하지만 막상 정식 복싱 대결을 붙여주자 슬그머니 도망갔다고 언급한 지인도 있다. 1943년에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샘 우드(1883~1949)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는데, 시사회에서 영화화 수준에 불만을 품고 감독을 주먹으로 패서 코뼈를 부러뜨렸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 이 자신을 자기를 세상에 과시하는 것도 매우 즐겼으며,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명 연예인같이 자신의 화려한 사생활을 노출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유명 인사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고 한다. 자살한 이유들 중 하나가 자신이 늙어 세상의 관심이 멀어지는 걸 견디지 못했던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여자를 밝혔으며 사생활도 문란해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결혼 중에도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나며 지냈다. 일단 그의 아내들을 정리해 보면…
• 엘리자베스 해들리 리처드슨(1891~1979) - 1921~27년까지 결혼. 여담인데 그녀는 1922년에 파리의 기차역에서 헤밍웨이의 원고가 담긴 여행 가방을 분실한 일이 있었다. 이 원고는 90년이 넘도록 행방을 알 수 없어서 이걸 다룬 소설도 여럿 나왔다. 다이앤 길버트 매드슨이 쓰고 국내에서도 정발된 《잃어버린 헤밍웨이를 찾아서》도 이걸 다룬 소설이다.
• 폴린 파이퍼(1895~1951) - 1927~40년.
• 마사 겔혼(1908~1998) - 1940~45년. 2012년 HBO에서 이 두 사람을 소재로 한 TV영화를 만들었다. 제목은 《헤밍웨이와 겔혼(Hemingway & Gellhorn)》. 클라이브 오웬이 헤밍웨이를, 니콜 키드먼이 겔혼을 연기했다. 드라마의 평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 메리 웰시 헤밍웨이(1908~1986) - 1946~61년까지 가장 오래 같이 살았으며 그의 장례식도 그녀가 치렀다.
위의 셋은 헤밍웨이의 주체할 수 없는 막장행보에 질렸거나 그와 마찬가지로 막장으로 놀다 떠나갔고, 마지막 아내인 메리가 헤밍웨이와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그의 거시기 길이는 기껏해야 1인치, 즉 2cm 남짓에 불과했다 하는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언급된 매체가 《섹스-사용설명서》 라는 신뢰할 수 없는 서적 오직 하나뿐이다.
위의 이야기는 사회적 페르소나를 다룰 때 자주 나오는 사례들 중 하나이다. 한 친구의 증언을 인용해보자. 그의 사망 뒤에 친구가 저건 그의 성격이 아니며, 실제로는 겁쟁이에 울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문체와 집필 스타일
캐서린은 계속해서 출혈을 하는 모양이었다. 의사는 그것을 멎게 하지 못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캐서린이 죽을 때까지 같이 있었다. 캐서린은 줄곧 의식이 없었고, 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 《무기여 잘있거라》 中
헤밍웨이의 문체는 하드보일드 스타일(Hard-Boiled Style) 이라고 부른다. 이 문체는 잡다한 수식이 없고 간결하다. 또한 제3자의 시각으로 사실만 무덤덤하게 나열한다. 위 예시처럼 주인공과 사랑을 나누던 사람의 죽음마저 차갑게 묘사한다. 인물들의 감정묘사를 거의 하지 않으며, 인물들의 행동과 복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헤밍웨이 같은 거물급 작가가 왜 이렇게 화려한 수식어구 없이 간결하고 쉬운 문체로 작품을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문체가 쉽다 하더라도 그 문체가 담고 있는 작품의 분위기나 내용의 깊이, 작가의 의도 등이 상당히 깊다.
그의 신문기자 생활을 통해 간결하고 정확한 문체에 익숙했고, 당시 유행하던 하드보일드 대중소설들(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 자신의 마초적인 성격과도 부합했다.
이런 이유로 영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 혹은 영문학도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가로 꼽힌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이한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영어실력이 대단하지 않아도 쉽게 읽힌다. 윌리엄 포크너 같은 난해하고 복잡한 작품을 읽다가 헤밍웨이를 펴면 무슨 초등학교 영어교과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 '아주 잠깐' 든다. 흥미롭게도 포크너와 헤밍웨이는 둘 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를 두고 포크너는 "헤밍웨이의 책에서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고, 헤밍웨이는 "어려운 단어를 써야만 감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하며, 단순한 단어와 절제된 묘사만으로도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읽기 쉬운 글은 가장 쓰기 어렵다" 라는 너새니얼 호손의 말대로, 헤밍웨이는 스스로 《무기여 잘 있거라》의 첫 부분을 적어도 50번은 고쳐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부분도 39번이나 고쳐썼다.
이러한 문체 때문인지 일부 평론가들은 헤밍웨이의 진가는 장편이 아닌 중·단편소설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헤밍웨이의 장편은 비판하면서 단편에는 격찬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관심이 간다면 인디언 부락,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살인자들, 킬리만자로의 눈 등의 소설들을 한 번 읽어보자. 단편이라지만 손바닥소설 급으로 짧은 소설들도 아주 많다.
5. 이모저모
• 모히또 칵테일과 고양이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모히또 문서 참고. 헤밍웨이는 30여 마리의 고양이를 키웠으며, 이들의 후손은 헤밍웨이의 사후 기념관이 된 자택에서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 생전 기른 고양이 중에 다지증 고양이가 있어서, 다지증 고양이를 헤밍웨이 고양이라고 하게 되었다.
• 거장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가 그의 사진을 찍기 위해 해밍웨이를 방문했을 때는 점심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카쉬는 해밍웨이가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할까봐 해밍웨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를 만나자마자 술을 좋아하는 걸로 알려진 해밍웨이에게 대접하기 위해 독주를 주문했는데 그걸 본 해밍웨이가 이 시간부터?라고 굉장히 당황하여 카쉬도 덩달아 당황했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그날 사진촬영은 잘 진행됐다고.
• 뜬금없지만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을 일으킨 이후로 소련에서도 대단한 인기인이 되었다. 혁명가도 아닌 해밍웨이가 왜 인기인이 되었냐면 당시 소련에 몰아닥친 쿠바 열풍 때문에 소련 사람들이 쿠바에 관련된 인물은 그냥 다 빨았기 때문.(...) 이 때문에 1960년 2월 쿠바를 방문했던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공식 일정에도 없는 해밍웨이 방문 의사를 타진할 정도였다. 거기에 쿠바로 가는 내내 해밍웨이 소설을 읽으면서 보냈다고.
• 헤밍웨이의 마초적 또라이성은 그가 종군기자로써 활동한 1944년 6월의 노르망디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일어나기 전 5월 25일 밤의 런던에서는 등화관제 탓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완벽한 어둠 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물탱크를 들이받는 사고를 내지 않나, 이로 인해 뇌진탕에 걸려 병원에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할 상황에서 이 작전에 빠질 수 없다며 나흘 만에 병원을 몰래 탈출하질 않나, 자신이 동행 취재하는 소대가 제일 먼저 상륙해 제일 먼저 노르망디에 발을 딛는 부대가 되어야 한다고 부추겨 해당 소대를 지휘하는 소대장을 곤란하게 만들었고, 총을 소지 불가능한 종군기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멋대로 무기를 챙겨 독일군 여럿을 잡는 비범한 짓거리도 했다. 이 외에도 상당히 정신나간 짓거리를 여럿 하였으나, 가장 압권은 건물 내에서 포격받는 와중, 다른 사람들은 전부 납작 웅크려 포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만 포격받는 와중에도 건물 내부를 돌아다녀서 다른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던 사례일 것이다. 이 언급된 사례 외에도 사고를 자주 쳐서 사람 여럿 골때리게 만들었다고.
어느 날 호텔에 머물면서 어느 영국인이 '에릭 블레어'라고 소개하며 인사하기에 퉁명스레 답했더니, 그 사람이 "아, 그리고 조지 오웰이라고도 합니다." 라고 해서 헤밍웨이가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위 스페인 내전에 반 프랑코 파에 섰던 경력, 그리고 쿠바의 아바나에 살았던 것과 관련해서, 그가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렇다 할 확증은 없는 상황이며, 거꾸로 미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까지 제기되어 실은 이중 스파이가 아니었냐는 의혹도 있었다.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을 때, 모스크바와 바티칸 시국에서도 그의 죽음에 유감을 표명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진다.
모델이자 영화배우였던 손녀 마고 헤밍웨이(1954-1996)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헤밍웨이는 자신이 도청과 계속되는 감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주변에서는 헤밍웨이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갔다. 그러나 훗날 존 에드거 후버가 어째서인지 1940년대의 FBI 감시대상목록에 헤밍웨이가 있었다고 인정하면서, 헤밍웨이의 주장은 사실로 밝혀졌다.
헤밍웨이의 말년은 전술(前述)했듯 글쓰기에 대한 집착과 정신착란 등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때 헤밍웨이가 병원에서 전기 충격 요법을 받았다는 기록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사실 헤밍웨이는 누군가에 의해 폐인으로 전락한 게 아닌가? 라는 음모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증거는 없으므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정말 재미있는 책을 쓰려면 수많은 강타를 맞아봐야 한다.(punishment는 권투에서 "강펀치"를 뜻하기도 한다)
- 1981년, 카를로스 베이커가 편집하고 헤밍웨이가 자비로 출판(…)한 《1917~1961년에 엄선된 편지들》 중 1924년 12월 6일에 썼던 "편지"에서. 위에서 봤겠지만 헤밍웨이는 다른 작가들이 탁자 앞에 앉아서 토론이니 뭐니 하며 시간을 까먹자, 권투 글러브 끼고 체육관으로 갔다고 한다.
책에 있는 좋은 부분들이란 작가가 운 좋게 주워듣거나 그의 일생 동안 실패한 것들뿐이다. 그래도 전자는 후자만큼 귀중하다.
-위에서 언급한 같은 책 중 1929년 9월 4일에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썼던 편지에서.
그 가을, 전쟁은 그 곳에 항상 있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곳으로 가지 못한다.
- 1927년, 《여자 없는 남자들》 중 《다른 나라에서》에서.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전적이 있다.
해석: 세상은 모두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은 강해진다. 그러나 세상은 부러지지 않는 사람들을 죽인다. 아주 선하거나, 상냥하거나, 용감한 이들을 세상은 무자비하게 죽이고 만다. 만약 당신이 그렇지 않아도 죽이겠지만, 딱히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모든 미국의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으로부터 나온다. 미국식 글쓰기도 그것으로부터 나왔다. 그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후로도 없었다.
- 1935년,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들》에서.
여기서 이길 수 있다면 어디서나 이길 수 있다. 세상은 괜찮은 곳이자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며, 여길 떠나는 게 무척 싫다.
오늘은 수많은 날들 중 그저 하루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날들에 벌어지는 일은 네가 오늘 뭘 하냐에 달려 있다. 올해 내내 그랬다. 너무 많이 그랬다. 모든 전쟁도 그런 식이다.
-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 태양이 저녁이 되면 석양이 물든 지평선으로 지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떠오른다. 태양은 결코 이 세상을 어둠이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태양이 있는 한,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 1926년,《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 1952년, 《노인과 바다》에서.
우리 모두는 그 누구도 '거장'이 될 수 없는 길드에 속한 실습생들이다.
- 1961년 7월 11일, 《뉴욕 저널-아메리칸》에서.
난 파리의 지붕 위에 서서 내다보며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라. 넌 예전에도 항상 썼었고, 지금에도 쓸 수 있다. 네가 해야 되는 것은 진실한 글을 쓰는 것뿐이다. 네가 아는 가장 진실한 글을 써라."
- 1964년, 《이동 축제일》(몇째 주 무슨 요일 하는 식으로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축제일. 좋은 예로 부활절이 있다)에서.
네 운은 스스로 만들렴, 지그. 무엇이 훌륭한 패배자를 만드는지 아니? 연습이야.
- 1976년, 헤밍웨이의 딸인 글로리아 헤밍웨이가 쓴 《파파의 개인적인 언행록》에서 글로리아가 어렸을 적에 들은 말.
그대가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는 건 그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대가 그걸 위해 태어났음을 그들이 생각하게 하라.
- 1984년, 아놀드 새뮤얼슨이 쓴 《헤밍웨이와 함께》에서 헤밍웨이가 작가 생활 2년차일 때 그 동안 쓴 원고가 전부 담긴 가방을 잃어버린 일에 대해 언급할 때.
- 1924년, 에즈라 파운드에게의 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