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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미나티13
4.일루미나티13, 300년 정교왕국의 건설자 로마노프 가문
라뮤나
2022. 12. 3. 0:00
13 의회, 세계 일루미나티 지도자는 "Pindar" 라고 불립니다. Pindar 는 13 통치 가문의 일원이며 항상 남성입니다.
Pindar 라는 칭호는 "Pinnacle of the Draco" 또는 "Penis of the Dragon" 으로 알려진 용어의 줄임말이며 이것은 최고의 힘, 지배, 창조, 관통, 팽창, 침범, 그리고 공포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이 칭호를 가진 계급은 지구 내부의 순혈 렙틸리언 수뇌에게 보고되며 피라미드의 "눈"은 13 통치 가문을 의미합니다.
그 이야기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요약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5년간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왕조이며 쌍두독수리가 상징입니다.
1762년 표트르 3세가 즉위한 이후 정식 명칭은 러시아어로 골시테인고토르프로마노트, 독일어로 로마노프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입니다.
현재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통치하는 왕가인 글뤽스부르크 왕가와 부계 쪽 조상을 공유하며 공통 조상이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세인데 프레데리크 1세의 3남 홀슈타인고로르프 공작 아돌프의 가계가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이고 프레데리크 1세의 장남 크리스티안 3세의 3남 계열이 글뤽스부르크 왕가로 이어지는 슬레스비홀스텐쇤더보르 가문입니다.
후술하겠지만 장신에 미남미녀들이 많기로 유명한 왕조이기도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유래
가문의 시조는 독일 올덴부르크 지방의 귀족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로 14세기 무렵 현재의 프로이센 지역에 위치한 튜튼 기사 단국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이주해 왔다고 합니다.
14세기면 러시아가 아직 몽골인의 치하에 있을 무렵인데 이때 건너왔다는 것은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일설에 의하면 코빌라의 아버지가 튜튼 기사단에 반역을 저지르려다 실패해서 도망 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반 4세의 첫 번째 아내가 이 로마노프 가문 출신으로 둘의 결혼 때문에 차르의 지위를 계승할 명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표도르 1세 사후 직계 후손을 찾지 못한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었고 1598년부터 15년간 이어진 혼란의 시대로 돌입합니다.
이 와중에 코빌라의 7대손인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가 1613년 러시아의 여러 보야르들의 추대로 러시아의 차르로 추대 받으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로마노프 왕조의 성씨에는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안드레이 코빌라의 아들은 표도르 안드레이비치 코빌린으로 그 아들인 이반 표도르비치 코시킨은 코시킨으로 코빌라를 썼는데 러시아식으로 성을 차차 바꿔나갔기 때문에 3대의 성이 제각각입니다.
이반 대부터 코시킨으로 정착되었는데 이반의 아들인 자하리 이바노비치 코시킨이 무슨 큰 공을 세웠는지 자하리의 아들 유리 자하리예비치 코시킨이 그의 자녀들 대부터 성씨를 모두 자하린코시킨으로 바꿔버립니다.
하여 유리의 아들인 로만 유리예비치 자하린코시킨은 가만히 있나 싶더니 아들인 니키타 로마노비치 자하린유리예프대부터는 아예 코시킨을 버리고 자하린유리예프로 성을 또 갈아치웁니다.
그리고 니키타 로마노비치의 아들인 표도르 때 드디어 로마노비치에서 따 온 로마노프로 성씨를 완전히 굳히고 다시 그 아들 미하일부터 로마노프 왕조를 이어갑니다.
원래 슬라브 계통 민족은 류리크 왕조의 이고리 류리코비치같이 성을 별도로 쓰지 않았던 관습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 오래 지속됬습니다.
즉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는 작명 방식을 취했기에 저런 괴악한 역사가 진행되었다고 보면 편합니다.
남자 친족들은 대공, 여자 친족들은 여대공 칭호를 썼으며 그러다 1886년 알렉산드르 3세때 부터 대공은 황제의 아들과 친손자 여대공은 황제의 딸과 친손녀 그리고 대공의 정식 부인에게만 쓰도록 했습니다.
허나 1762년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사망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부계 혈통은 단절됩니다.
그 뒤를 이어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표트르 3세가 즉위하면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가 시작됩니다.
다만 표트르 3세의 어머니가 표트르 1세의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였으므로 모계와는 연관성이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로마노프 왕조로 불렸습니다.
현재 로마노프 가문의 실질적 시조인 표트르 3세 때에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19세기부터는 이 가문에 미남과 미녀가 많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비례해서 경박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는 황족이 늘어나고 외모가 뛰어나지만 도덕적으로 문란하다는 로마노프 가문의 평판은 러시아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 2세의 딸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자신의 딸들이 잘생긴 러시아 쪽 사촌들에게 호감을 보이자 딸들에게 '네 사촌들이 그 잘생긴 얼굴로 문 뒤에서 시녀들과 무슨 짓을 하는지 알게 되면 놀라 뒤집어질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일단 마리야 여대공의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부터가 상당한 미남이었고 결혼하고 나서도 수많은 애인을 두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마리야의 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도 큰 키와 넓은 어깨에 군사훈련으로 단련된 몸을 가진 미남으로 수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표트르 대제까지
초대 황제인 미하일 1세 이후 표도르 3세가 죽은 뒤 제위를 놓고 다소의 혼란이 일어나다가 1682년 유명한 표트르 1세가 즉위하면서 수습됩니다.
표트르 1세는 강력한 황제권을 추구해 러시아 절대왕정의 기틀을 다졌으며 적극적인 서구화 정책으로 러시아의 체질을 바꿔놓으려 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1700~1721)을 치러 발트해로 나가는 통로와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그리아, 카렐리아 등을 정복하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합니다.
북방전쟁을 승리로 이끈 직후인 1721년에는 루스 차르국의 이름을 러시아 제국으로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열강으로서의 러시아의 등장을 알리기도 했으며 이때 새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이 투입되었고 그 일대의 혹독한 추위와 식량 부족, 과중한 노동으로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시체 위에 세워졌다"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여제 시대
1725년 표트르 1세가 사망한 뒤 또다시 제위를 놓고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는데 어린 황제들의 급서로 중간중간마다 많은 여성 황제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예카테리나 1세는 표트르 대제의 아내로서 문맹이었기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안나 이바노브나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며 러시아 정교회 중심의 공포정치를 펼쳤습니다.
이후 당대 유럽 최고의 미녀로 불리던 옐리자베타(재위 1741~1762, 표트르 대제의 딸)가 즉위했고 그녀의 치세 20년 동안 러시아는 안정을 회복하여 7년 전쟁에서 그 힘을 과시하고 그 다음에 이어진 팽창의 시기를 맞았습니다.
다만 옐리자베타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옐리자베타의 두 딸 모두 사생아였기 때문에 옐리자베타의 사망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단절됩니다.
표트르 3세부터의 로마노프 왕조는 사실상 덴마크와 스웨덴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입니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처럼 원래 가문명 뒤에 로마노프를 붙였습니다.
그 직후 즉위한 옐리자베타 여제의 외조카 표트르 3세는 무능하고 러시아어를 잘 할 줄 모르는 친프로이센 성향의 독일인이었습니다.
당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자신의 아버지인 표트르 대제의 혈통에 굉장히 집착했는데 당시 표트르 대제의 부계 혈통은 이미 끊겼기 때문에 자신의 외조카이자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인 표트르 3세를 차기 차르로 지명합니다.
표트르 3세는 당시 전쟁중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팬으로 이긴 전쟁을 중단하고 급히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평화협정을 맺는 러시아 입장에서는 반역적 행위를 저지릅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입장에서는 최대의 행운이었지만 성질도 더러워서 아내를 버리고 공개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다가 고작 반년 만에 결국 러시아 정교회와 귀족 특히 근위대의 지지를 얻은 아내에 의해 폐위됩니다.
그리고 1주일 뒤 알렉세이 오를로프라는 자에게 살해됩니다.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혹은 방조)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며 사인은 심한 복통으로 인한 출혈로 발표되었습니다.
무능한 남편을 폐위해버리고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는 다시 러시아를 안정시키고 강력한 권력을 휘둘러 러시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합니다.
푸가초프의 난(1772~1775) 등 농민반란을 진압하고 농노제를 강화해 민중을 억압했지만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에 농민을 이주시켜 대규모의 밀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농업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려 농업을 진흥시켰습니다.
또한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볼테르 등의 문인들을 후원하고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초청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도 어느 정도 업적이 있습니다.
또한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치에서 대성과를 거둡니다. 3차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1611년 모스크바 함락으로 러시아에 굴욕을 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멸망시켰으며 남쪽으로도 오스만 제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여 러시아-튀르크 전쟁(1770~1774)에서 승리하고 크림반도와 캅카스를 할양 받아 영토를 넓히기도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예카테리나 2세가 죽은 뒤 그녀의 아들 파벨 1세(재위 1796~1801)는 서방에서 프랑스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궁중에서 포악한 행동을 일삼아 귀족들에 의해 살해되고 장남인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가 즉위합니다.
알렉산드르 1세는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앙숙 관계였던 오스트리아 제국과 손을 잡고 직접 군대를 지휘해 프랑스 제1제국에 대항했는데 1805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통칭 '삼제三帝회전')에서 참패하여 포로 신세가 될 뻔한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이 패배로 러시아에 돌아온 후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대놓고 항의하지도 못하고 영국과 밀무역을 하는 등의 의심을 받다가 1812년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동진해 오자 이에 맞서 초토화 전술을 강행하여 프랑스 군대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줍니다.
애초에 나폴레옹은 러시아 제국의 부도인 모스크바만 함락하면 전쟁이 끝날 거라고 예상한 듯싶지만 러시아답게 모스크바 시민을 소개하고 도시를 파괴한 뒤 인근 농가를 초토화시켜 프랑스군이 폐허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고 그 사이 러시아는 군대를 끌어모아 쿠투조프 원수가 지휘한 러시아 군대는 정면 대결보다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에 지속적인 피해를 냅니다.
알렉산드르 1세가 협상을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소득 없이 철수하거나 수도인 북쪽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하는 방안 중에서 선택해야 했지만 보급이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 군대에게 퇴각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이때의 패배는 워털루 전투와 함께 나폴레옹의 운명을 결정지은 결정적 사건이 됩니다.
이유야 어쨌건 러시아의 승리는 그때까지 적어도 육상에서는 패배한 적이 없었던 나폴레옹을 확실히 꺾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러시아는 위대한 '조국전쟁'의 이념을 선전하며 러시아 제국의 위세를 드높였다고 자랑했습니다.
실제로 이때 러시아의 힘을 과대평가한 서방국가들은 모두 러시아를 유럽 세계의 강대국으로 인정하고 한몫 끼워주게 됩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그 광대한 국토와 인구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처럼 개혁을 시도하는 데 실패합니다.
1825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터진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젊은 귀족들이 러시아의 문제점과 후진성을 자각하고 개혁을 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강력한 황실의 힘을 누르기는 역부족이었고 이후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가 반동 정치를 강화하고 개혁을 거부하였습니다.
특히 이때까지도 러시아는 농노제를 통한 중세 봉건제 사회를 채택했고 많이 잡으면 전체 인구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농노들에 대한 처우는 좋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도박판에서 농노를 판돈으로 거는 귀족과 지주가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왕조 말기
러시아의 후진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크림 전쟁(1853~1856) 때였습니다. 러시아 군대의 후진적인 모습은 다 같이 막장이었음에도 두드러져 보였고 패전 직후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는 이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아래로부터의 혁명보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더 낫다'라며 국가로부터의 개혁을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1861년 역사적인 농노 해방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농노 해방령은 러시아가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의 준비가 이루어진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 급진적으로 시행됐습니다. 농민들은 더 궁핍해졌고 견디다 못해 다시 농노가 되는 농민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러시아의 지식층과 개혁파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하고 러시아 제국은 개선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만 보여 주었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인민주의 단체의 폭탄 암살로 사망했고 뒤를 이어 즉위한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재위 1881~1894)는 이를 계기로 반동과 억압정치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운명도 주어지게 됩니다.
로마노프 왕조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처음부터 황제감이라기 보다는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성품이었는데 군사적으로 무능하고 독단적인 점은 절박한 상태에 놓인 러시아의 체제를 개혁하는 데 큰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패배하기도 하고 차후 세대에서 1,2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에 대한 승리를 견인하기도 합니다.
러일전쟁 도중 발생한 경제난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제정에 최후의 희망을 가졌던 모든 이들의 기대는 박살 났고 로마노프 왕조의 운명은 이것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즉 1905년 터진 1차 러시아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정에 격렬히 항의하고 개혁을 부르짖었다는 점에서 12년 후의 2차 혁명의 전조였습니다.
처음에는 민중들의 거센 항의를 무시했던 니콜라이 2세는 저항이 점점 더 커지자 두려운 마음에 개혁을 약속했고 의회인 두마를 설치하고 사이비로나마 입헌군주제를 표방했습니다. 차르는 이 요구가 아마 한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러시아 민중은 이제 제정에 희망을 버렸고 전제정에 신물을 내고 있었습니다.
1914년 복잡한 동맹관계에 의해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자 이러한 불만과 분노와 증오가 일시에 폭발하게 됩니다. 물가 폭등과 물자 부족 계속되는 전선의 패배 소식 등 모든 것이 제국의 실정과 무능과 부패를 보여주었습니다.
1917년 2월에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빵을 달라는 민중 시위는 금세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어 마침내 혁명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2월 혁명 전선에서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이 2세는 퇴위를 선언하고 동생에게 양위하였지만 동생 미하일 대공이 거부하여 제정은 붕괴되고 임시정부가 통치하는 러시아 공화국이 들어섭니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 사회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10월에 볼셰비키가 무력으로 임시정부를 뒤엎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건국됩니다.
10월 혁명 1918년 러시아 내전이 개시되자 유폐되었던 황제 일가는 처형되었으며 다른 황족들 역시 해외로 망명하거나 피살당하고 이것으로 300년간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도 역사 속의 잔재로만 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