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고교야구 꿈의 무대 ‘고시엔’… 응원 열기가 36도 폭염 이겼다
19일 일본 니시노미야시 고시엔 구장에서 전국 고교야구대회 8강전 경기가 한창이다. 일본 고교야구 선수들은 지역 예선을 통과해 고시엔 구장을 밟는 게 최대 목표다. 니시노미야=이상훈 특파원
《“일본에서 가장 멋진 야구장이 어딘가 하면 역시 고시엔(甲子園)이죠. 그곳은 뭐랄까, 특별합니다. 야구장 안으로 들어가 낡고 희미한 계단을 오르면 갑자기 눈앞에 푸른 잔디밭이 펼쳐집니다. 푸른 잔디와 새하얀 유니폼, 공, 그리고 푸른 하늘. 그 모습을 봤을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죠. 그래서 나는 돔구장에는 가지 않습니다.”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지난해 6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무라카미 RADIO’에서 어린 시절 야구장에 대한 기억을 꺼냈다. 교토에서 태어나 고베 등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하루키에게 고시엔 구장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매년 8월이면 일본 열도는 고시엔 구장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로 들끓는다. 전국 47개 광역단체 예선을 거친 고교 야구팀들의 경기 하나하나에 온 나라가 열광한다. 일본 야구팬들에게 ‘낭만의 구장’이자 고교야구 선수들에게 ‘꿈의 구장’인 고시엔 구장을 찾았다.》
전 경기 생중계에 호외까지
19일 오전 오사카 중심부 우메다(梅田)역. 한국의 서울 명동에 비견될 만한 오사카의 중심 상업지구다. 이곳에서 전철을 타고 20여 분을 가면 오사카 위성도시인 니시노미야시 고시엔역에 도착한다.
고시엔 구장을 찾은 야구팬들이 야구장 밖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24년 개장한 이 구장은 일본에서 ‘고교야구의 성지’로 불린다. 니시노미야=이상훈 특파원
고시엔역에 도착하니 개찰구에 ‘일본 야구의 성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야구팬들을 맞았다. 역에서 5분 정도를 걸어가자 담쟁이넝쿨이 고풍스럽게 외벽을 휘감은 야구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1924년 개장해 내년에 100주년을 맞이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야구장 ‘한신 고시엔 구장’이다.
이곳에서 매년 3월과 8월 전국 고교야구 대회 본선이 열린다. 특히 전국의 모든 고교 팀이 지역 예선부터 경쟁하는 8월 대회가 ‘여름 고시엔’으로 불리며 야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H2’ 등 일본의 수많은 스포츠 만화가 묘사하는 일본 고교야구 대회가 바로 ‘여름 고시엔’이다. 한국에서는 고교야구가 프로야구에 밀려 인기가 시들해졌지만 일본에서는 여전히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국민 스포츠다.
올해로 105회를 맞이하는 여름 고시엔에 출전하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올해는 전국 3486개 고교야구팀이 예선을 거쳐 광역단체별로 1개교(도쿄, 홋카이도는 2개교)가 출전했다. 가장 경쟁이 치열한 아이치(愛知)현은 175개교 중 1개 팀만 고시엔에 간다. 토너먼트라 단 한 번이라도 지면 그대로 탈락이다. 한국 고교야구 선수들은 프로 진출이 가장 중요하지만 일본 고교야구 선수들은 단 한 번이라도 고시엔 구장을 밟는 것, 그 자체가 목표다.
고시엔 본선 대회가 열리면 일본 공영방송 NHK는 낮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1차전부터 결승까지 전 경기를 전국에 생중계한다. 서점에는 그해 고시엔 출전 팀을 분석하는 특별판 잡지가 발매된다. 스포츠 뉴스에는 프로야구보다 고교야구 경기 결과가 먼저 나온다. 주요 언론사는 스포츠 담당 기자에 더해 각 지역 주재 기자가 고시엔 출전 팀과 동행하며 선수, 코치진, 응원단의 일거수일투족을 전한다.
대회에서 선전해 8강 이상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해당 학교는 물론이고 그 지역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다. 23일 열린 결승전에선 가나가와현의 게이오(慶應) 고교가 지난해 우승팀 센다이이쿠에이(仙臺育英) 고교를 꺾고 2회 대회 이후 107년 만에 우승기를 안았다. 대회를 주최한 아사히신문은 호외를 발행했다. 올해는 본선 진출에 실패했지만 2021년 ‘4강 신화’를 쓰며 2년 연속 고시엔에 진출한 한국계 교토국제고는 야구로 일본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당시 고시엔 구장에 울려 퍼진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토(大和) 땅은…”이라는 한국어 교가에 재일교포들은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다.
승부만큼 중요한 예의
기자가 구장을 찾은 19일은 고시엔 8강전 4경기가 한꺼번에 열리는 날이었다. 오전 8시 첫 경기가 열리고 2∼3시간 간격으로 다음 경기가 이어지는 방식이다. 4만7541석의 입장권은 아침 일찍 매진됐다.
같은 날 고시엔 구장 관중석에서 8강전에 나선 쓰치우라니치다이 고교 응원단이 땡볕 아래에서 응원을 하고 있다. 쓰치우라 고교는 이 경기에서 승리해 4강에 진출했다. 니시노미야=이상훈 특파원
8강전 2차전은 쓰치우라니치다이(土浦日大) 고교와 하치노헤코세이(八戸光星) 고교의 경기. 경기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양 팀 선수들이 홈 플레이트까지 전력 질주로 달려와 일렬로 서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1·3루에 자리 잡은 각 팀 응원단은 커다란 북과 관악기를 연주하며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4년 만에 육성 응원이 허용되고 응원단 인원 제한도 사라졌다. 이날 36도까지 올라가는 폭염과 땡볕에도 응원단의 열기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고시엔은 경기가 끝난 뒤가 백미다. 9-2로 쓰치우라 고교가 승리해 선수들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사이, 경기에서 진 하치노헤 고교 선수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며 통곡했다. ‘나의 여름은 끝났다’라는, 일본 야구 만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가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이긴 팀은 홈 플레이트에 한 줄로 서서 구장에 울려 퍼지는 교가를 제창한다. 진 팀은 더그아웃에서 상대 팀 교가를 들으며 마지막 예를 표한다. 승부만큼 예의를 중요시하는 게 일본 고교야구의 미덕이다.
진 팀 선수들에게는 마지막 남은 의식이 있다. 각자 준비해 온 주머니에 고시엔 구장의 검은 흙을 담아 간다. 토너먼트에서 탈락했지만 학교와 지역을 대표해 전국 대회에 출전했다는 자부심을 가진 선수들이다. 경기를 중계하는 NHK는 선수들이 검은 흙을 담는 장면까지 전국에 생방송한다.
올해 3486팀 경쟁… 日야구 근간
일본 전국이 열광하는 고시엔 대회는 올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우승한 일본 야구의 근간이기도 하다. 약 3500개에 달하는 고교야구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선수들만 프로 선수가 되고 국가대표가 되는 구조다. WBC 전승 우승을 이끈 오타니 쇼헤이(29·LA 에인절스), WBC 한국전 선발로 출전한 다루빗슈 유(36·샌디에이고) 등도 고시엔 출전 경험이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 고교야구팀 선수로 뛰는 게 ‘학업과 병행하는 동아리 활동’ 정도로 알려져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지역 예선 1, 2차전에서 탈락하는 절반 이상의 팀은 동아리 수준에 가깝지만 전국 대회에 출전하는 팀과 소속 선수 상당수는 한국의 엘리트 고교야구를 능가할 정도로 야구에 학창시절 전체를 건다. 고시엔에 단골로 나오는 야구 명문교는 대부분 지역, 심지어는 전국에서 야구 잘한다고 소문 난 중학생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고교야구도 프로화가 됐다’ ‘고시엔에는 단골 팀만 나온다’란 지적도 있다. 그래도 전국에 90개 팀 남짓인 한국 고교야구와는 양적인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니시노미야 고시엔 구장에서
이상훈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