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술’ ‘죄’(sin)라는 것은, 그 특성상 완전무결하게 없어지거나 항상 도사리고 있는 두 가지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죄는 전혀 범하지 않거나 계속해서 범하거나 둘 중의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인데,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잘 아는 바와 같이 죄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태초의 창조의 때밖에는 없다. 심지어 그 생성조차도 하나님의 속성과 반대되거나 하나님의 속성이 비추는 빛을 망각하여 스스로 눈먼 상태 가운데서 이뤄지는 것이니, 사탄과 그의 꾐에 넘어간 인류의 첫 조상들이 그처럼 스스로 눈먼 자들로서 범죄(crime)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모든 인류는, 그 본성 가운데에 죄(guilt)가 자리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그 죄는 실재적인 범죄로서 그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게 마련인 것이 가련한 인간의 죄(nature sin)인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누구도 죄가 전혀 존재하지 않은 상태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우리들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한 다윗의 고백과 같이, 이미 출생에서부터 죄에 오염된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들은 죄가 완전무결하게 없었던 적이 없는 자들이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의 뽀얀 살빛과 맑은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를 보고서 우리들은 아무 흠도 없고 죄도 없는 순결한 영혼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 살빛과 눈동자 안에는 순전함뿐 아니라 죄악의 본성이라고 하는 깊은 어두움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죄는 한 번 일렁이기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그 파동을 잠잠케 할 수가 없다. 본성 가운데 있는 죄성에 미혹되어 한 번 범죄하면 그 범죄는 결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범하여서, 결국에는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지치지 않고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것이다. 그런즉 죄를 범할 생각은 아예 처음부터 하지를 말아야만 하는데, 우리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죄성인 ‘호기심’(curiosity)이라는 것이 미지의 어두움을 뚫고 들어가도록 이끌고 만다. 마치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서 화성으로 보낸 탐사선(그 탐사선의 이름 또한 ‘curiosity’이다)처럼 말이다.
아마도 그러한 인간의 호기심이 직면하는 몇 안 되는 시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술과 담배에 대한 호기심일 것이다. 막연한 동경이든 호기심이든 간에, 어린 나이에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첫 대상은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술과 담배라는 산물인 것이다.
특히나 술(alcohol)의 경우에는 창 9:21절에서 홍수 이후에 노아가 심은 포도나무에서 취한 포도주(wine)에까지 소급이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기술이 자연스럽게 연계되어 기록된 것으로 볼 때에 이미 그 이전 창 6:5절에서 언급하는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이라고 한 데에서부터 연원되었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창 6:2절에 기록한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고 한 말씀을 실행하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포도나무를 심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고자 하는 발견과 더불어서 더욱 인위적인 계획 또한 수반되었을 것임을 추론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마치 창세기 4장에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던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하신 말씀에서 그가 땅을 기경하고자 계획한 것이 선한 의도가 아니었음(반면에 아벨의 제물은 그의 계획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서의 양육과 제물을 삼으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함의한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인류가 그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들은 “항상 악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술에 관한 기본적인 언급은, 단순히 술을 마신 것의 수준으로 표현하지 않고 취한 수준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물론 딤전 5:23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지만, “조금씩”이라는 한정적인 표현을 첨언하여서 그 용법이 결코 취하는 용도가 아니라 속을 따뜻하게 하는 치료의 용도였음을 나타내며, 다른 본문들에서는 대부분 “술 취함”(갈 5:21; 벧전 4:3), “술을 즐김”(딤전 3:3; 딛 1:7; 2:3), 그리고 심지어 딤전 3:8절에서는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not given to much wine) 라는 심히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성경에서 언급하는 술의 이미지는, 건전하고 포용적인 문맥이 아니라 부정적이고 금지하는 문맥임에 분명한 것이다.
이는 죄의 성격과도 고스란히 일치하는 문맥이다. 죄 또한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금하여야 하며, 심지어 그 싹에서부터 잘라내어야만 하는 것으로 성경은 언급하고 있으니,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고 한 창 4:7절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 선을 행하라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죄가 발효되어 마음을 도발할 기회를 아예 금하라는 아주 분명한 명령인 것이다. 죄를 다스린다는 것은, 그저 죄가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적당한 선으로 통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도발하지 못하도록 그 누룩을 제하여 버리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과연 그러한 죄의 누룩을 스스로 제하여버릴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마치 무교절(hag ha-Mazzot)에 7일 동안 집안의 누룩을 제하여버림과 같이 일시적으로라도(그리고 끊임없이) 제하여 버림으로써 죄악이 발효되어 마음을 도발하지 못하도록 힘쓰는 것이지만, 진정으로 죄악의 누룩을 완전무결하게 제하여버림은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서만 비로소 가능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은 술에 관하여서 절대적으로 입에 대지 못하도록 언급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일관되게 술을 금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으니, 비록 부지중에 혹은 건강을 위하여서 마시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그러한 이유로 술을 마시는 것이 죄와는 무관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공히, 술은 취함과 연관을 지어서 술 취하지 말도록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즉 술 취하지 말라는 성경의 언급은, 단편적으로 술에 취할 만큼 마시지 말고 적당하게 마시라는 취지의 언급이 아니라 술을 금하는 취지의 언급인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도 몇몇 설교자들을 통해서 술을 마시는 것 자체는 죄와 무관한 것이라는 가르침이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고, 놀랍게도 1세대 개혁신학자들에 의해 양육을 받은 성도들 가운데서도 공공연히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술이나 담배를 마시지 않거나 피우지 않는 데에 신앙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데에 더욱 참된 신앙의 본질이 있다는 명분에서 말이다.
그러나 정작 성경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술 취함에 대하여 일관되게 부정적이며, 심지어 담배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만일에 이를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적용한다면, 술은 몰라도 담배만큼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금한 것이 아니니 마음껏 피운다고 해도 전혀 죄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통적인 교회의 문화에서 보란 듯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와 문화이니 만큼(물론 칼 바르트와 같은 골초들의 예도 있기는 하지만), 감히 예배당에서나 교회 모임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우지는 못한다. 더구나 개혁신학의 중요한 원리인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에 따라서 성경에 직접 언급하지 않은 담배의 경우도 분명하게 금하는 것이 타당함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참되고 온전한 경건에 따르자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금하시거나 명하신 것들은 명하시거나 금하신 그대로 순종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명하시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서는 금하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원리와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비록 시대가 갈수록 악하여, 온갖 아전인수의 이론과 사상들이 성경을 빙자하여 꾀어내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런 것들이 참으로 복된 소식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진지한 신앙으로 바라보는 신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 5:11)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이르기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 확실하게 경계하였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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