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개성(開城)은 우리나라 경주(慶州)와 견줄 만하다. ‘고려 500년 도읍지’였던 까닭에 도시 곳곳에 유적이 산재해 당대의 문화와 역사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게다가 개발이 덜 된 탓에 그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고 차창 너머 개성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정겹게 다가와 감회가 더욱 새롭다. 서울에서 70km, 판문점에서는 손에 잡힐 듯 가깝지만 그 길이 열리는 데는 무려 반세기가 넘게 걸렸다. 금강산관광이 시작된 지 9년 만에 열린 개성땅을 둘러봤다.
개성은 예부터 부소갑, 송악, 개주, 개경, 송도 등으로 불려 이름이 여럿이다. 이 중 조선시대에 흔히 사용됐던 ‘송경’이나 ‘송도’는 소나무가 유난히 많은 송악산을 끼고 있는 도읍지라는 데서 유래됐다.
개성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개성공단. 국내 60여 업체가 들어선 공단은 낯익은 간판이 눈에 띄어 낯설지 않다.
박연폭포
개성관광의 첫 코스는 박연폭포. 개성시내에서 북쪽으로 30분 거리다. 가는 길에 군데군데 군인이 서 있다. 무심코 손을 흔들어봤지만 막대기를 세워놓은 듯 꿈적도 하지 않는다.
황진이·서경덕과 함께 ‘송도 3절’의 하나로 꼽히는 박연폭포는 37m 높이에 1.5m 너비의 북한 천연기념물 제388호다. 금강산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조선 3대 폭포’로 꼽히는 폭포는 요즘 수량이 적어 장쾌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수가 병풍바위와 어우러져 장관이다.
천마산과 성거산 자락에서 흘러온 물은 폭포 위 ‘박연(朴淵)’이라는 연못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38m 아래 고모담(姑母潭)으로 쏟아진다.
일찍이 이 모습에 반한 황진이는 해동(조선)에서 박연폭포를 으뜸으로 꼽아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락구천(疑視銀河洛九天)’이라는 초서체 글귀를 고모담 왼편 기슭 용바위에 남겼다. 그 글자가 아직도 또렷하다. 고모담 우측 관음사 가는 길에 세워진 범사정은 박연폭포를 관람하기에 가장 좋은 포인트.
관음사는 박연폭포에서 900m 떨어진 곳에 있다. 폭포 우측 범사정을 지나 대흥산성 북문을 거쳐 간다. 가파른 산길이다. 10km에 걸쳐 조성된 산성은 천마산과 성거산의 험준한 봉우리를 연결하는 돌성이다. 4개의 대문과 여러 개의 사이문, 암문, 장대, 망루 등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통일관 13첩 반상기
북문을 지나면 길은 완만하다. 관음사는 970년 법안국사가 대웅전의 천연굴에 관음보살상 한 쌍을 갖다놓고 그 굴 이름을 ‘관음굴’라 부른데서 ‘관음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웅전과 관음굴, 선방, 7층탑이 전부인 사찰은 천마산 자락에 안겨 성거산을 바라보고 있다. 소박하지만 천년고찰의 기품이 느껴진다. 관음사 주지 청맥 스님이 절집의 내력을 설명해 주는데 궁색하지 않다. 여기서 3km 떨어진 곳에는 대흥사가 있다. 하지만 길은 여기까지 허락된다.
관음사에서 오전 일정을 마치면 점심식사시간. 통일관으로 간다. 개성시내 복판에 자리잡은 통일관은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민속요리식당이다. 점심으로 ‘개성 13첩 반상기’가 나온다. 놋그릇에 담긴 쌀밥과 닭고기국, 생선, 더덕, 돼지고기조림 등은 보기에도 맛깔스럽다.
선죽교
오후에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숭양서원과 선죽교, 고려박물관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이 모두 개성시내에 몰려 있다. 시내는 드문드문 자동차가 다닐 뿐 한산하고 3~5층짜리 건물은 날고 허름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엄마 손을 잡고 총총걸음으로 가는 아이, 담장 너머 삼삼오오 짝을 지어 노는 아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고려약국, 이발관, 아동백화점, 부속품판매점 등 상점도 제법 늘어서 있다.
차창 밖 풍경은 빛바랜 사진첩을 보는 듯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것이 금강산여행과의 차이점이다.
숭양서원은 정몽주의 옛 집터에 1573년 ‘문충당’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지방사립교육기관이다. 이후 1575년에 ‘숭양(崧陽)’의 사액이 내려 국가 공인 서원으로 승격됐다. 서원은 간소하지만 지형을 절묘하게 이용해 크고 작은 건물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여기서 버스로 5분 거리에 선죽교가 있다. 고려 초기에 놓은 다리는 길이 8.35m, 너비 3.36m의 돌다리다.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피살된 장소로 유명한 다리는 원래 선지교(善地橋)라 불리던 것을 정몽주 피습사건 후 다리 주변에 대나무가 자라났다고 해서 선죽교(善竹橋)로 이름을 바꿨다. 다리 위에 붉은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지만 이를 두고 전해지는 얘기가 많아 북측 안내도우미의 말을 들어 볼 일이다.
선죽교 옆에는 또 다른 다리가 있다. 1780년 선죽교 둘레를 돌난간으로 막은 후 그 옆에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따로 만들었다. 다리 옆에는 정몽주를 기리는 비석이 여럿 서 있다.
다리에서 찻길을 가로질러 가면 표충비가 나온다. 정몽주를 내세워 사람들에게 봉건적 충의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표석이다. 거북 등에 얹은 비석은 2개. 오른쪽은 1740년, 외쪽은 1872년에 세웠다. 표충비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정몽주의 충의와 절개를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개성관광의 마지막 코스는 고려박물관. 고려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박물관으로 활용했다. 박물관 입구 수령 500년 넘은 은행나무 2그루와 450년 넘은 느티나무가 명물. 그 풍채가 당당해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현재 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불탄 후 1602년부터 8년간 복구해 놓은 것. 고려왕궁 만월대 터에서 발굴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와 고려청자, 사신도가 그려진 석관 등 유물 1000여점이 전시돼 있다.
돌아오는 길, 개성시내 길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향해 연방 손을 흔들었다. 북측 사람들도 덩달아 손을 흔들었다. 저 멀리 텅 빈 겨울 송악산은 쓸쓸해 보였지만 가슴이 뜨거워졌다.
〈개성|글·사진 윤대헌기자 caos999@kyunghyang.com〉
- 개성여행 ‘이곳’만은 꼭! -
▲박연‥박연폭포 상부에 위치한 연못이다. 아호비령산맥의 성거산과 천마산 사이 골짜기로 흘러내린 물이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37m 아래 고모담으로 쏟아진다. ‘박연’은 폭포 우측 범사정을 거쳐 관음사 가는 길에 대흥산성 북문 왼쪽 샛길로 가면 볼 수 있다. 연못은 너럭바위가 바가지 모양으로 파여 있고 크기는 둘레 24m, 지름 8m, 깊이 5m 정도. 연못 가운데는 집채만한 바위가 웅크리고 있고 하늘빛을 닮은 물빛이 인상적이다.
▲관음사 대웅전 여닫이 문‥대웅전 뒤편에 있는 나무조각 문이다. 관음사 설립 당시 운나 선사에 의해 만들어진 이 문은 미완성으로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 11살 때 전국 최고의 조각가로 명성을 날렸던 운나는 관음사 설립 때 차출돼 조각작업에 참여하던 중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 다녀 올 것을 청했으나 사찰완공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후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운나는 자신이 가진 재주가 ‘불효의 원인’이라며 왼쪽 팔을 자른 뒤 절을 떠나 농민봉기에 참여해 생을 마쳤다. 운나는 왼손잡이로 2개의 여닫이 문 중 오른쪽 문은 현재까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왼쪽 문에 백호를 타고 있는 조각상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고려박물관
▲고려박물관 야외전시장‥박물관 담장 밖 왼쪽에 조성된 전시장은 개성관광의 마지막 코스로 시간에 쫓겨 박물관만 둘러보고 관람을 끝마치기 일쑤이지만 국보급의 탑과 비석 등 볼거리가 적지 않다. 현재 이곳에 전시 중인 유물은 강감찬 장군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해 세운 흥국사탑을 비롯해 불일사5층석탑, 현화사7층석탑, 현화사비, 개국사 석등, 원통사 부도 등. 이 중 비석을 세우게 된 내력의 2400여자 새겨진 현화사비는 윗부분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금까마귀와 옥토끼, 봉황이 있고 양 측면에는 생동감 넘치는 2마리의 용이 조각돼 예술 및 역사적으로 귀중한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외에 활쏘기터, 그네터, 널뛰기터, 씨름터 등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윤대헌기자〉
- 개성여행 ‘이것’만은 꼭! -
▲화폐‥미국달러를 사용한다. 출발 전 환전하거나 북측 출입국관리소를 통과하면 남측에서 출장 나온 은행직원을 통해 환전할 수 있다. 금강산과 달리 한화는 사용할 수 없다.
▲준비물‥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여권 중 한 가지를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반입 금지 물품‥필름 카메라와 초점거리 160mm 이상 렌즈, 휴대폰(배터리 등 포함), MP3플레이어, GPS, 내비게이션, 녹음기 등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주의사항‥개성관광 중 특히 신경써야 할 것이 사진촬영이다. 버스 이동 중이나 관광지 외에 촬영은 엄격히 금지돼 있다. 관광 후 북측 출입국관리소를 나올 때 카메라를 검사해 적발되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 북한과 남한을 호칭할 때는 가급적 ‘북측’과 ‘남측’으로 부르는 것이 좋고 바위에 새겨진 글이나 동상 등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개성관광‥관광코스는 박연폭포·왕릉·영통 등 3가지가 있고 매일(월요일 제외, 당일코스) 300여명씩 출발한다. 교통비, 식비, 여행자보험 등이 포함된 상품가격은 18만원.
▲문의‥현대아산 (02)3669-3000, www.ikaesong.com
- 기타 개성 관광지 -
▲왕건왕릉:개성시내 서쪽 개풍군 해선리 송악산 기슭에 위치한 왕건의 무덤이다. 3단 축조 형식의 웅장한 무덤과 왕건의 초상, 후삼국통일 시기 문인 및 무인상이 서 있다. 1994년 세운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가 능 앞에 있고 무덤 안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 왕릉 주위로 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민왕릉:고려 31대 왕인 공민왕의 무덤으로 개성시내에서 서쪽으로 17km 거리의 개풍군 문선봉에 위치해 있다. 무덤은 왼쪽이 공민왕의 헌릉이고 오른쪽은 왕비인 노국공주의 정릉으로 풍수지리상 명당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대표적 능묘다. 조선시대 왕릉과 달리 3개의 층단으로 구성됐고, 봉분의 높이는 6.5m에 이른다. 각 봉분에는 12각의 병풍석이 둘러쳐져 있고 12지신상과 연꽃문양이 조각돼 있다. 노국공주의 죽음을 슬퍼한 공민왕이 7년에 걸쳐 직접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영통사:개성시내 북쪽 박달산 기슭 영통골에 자리한 사찰이다. 천태종 시조인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폐사된 후 2005년에 복원됐다. 사찰 내에는 북측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대각국사비와 당간지주, 삼층석탑, 오층석탑 등이 있고 인근에 장수바위, 마애불 등의 명승지가 있다.
▲개성남대문:개성시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축물이다. 개성 내성의 정남문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완성됐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후 1954년에 복원했다. 화강암 축대 위에 세운 단층 문루로 고려시대의 건축기술을 이어받아 장식이 소박하면서도 짜임새가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모루단청을 입힌 문루에는 연복사에서 가져온 14t짜리 종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