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낙타 上
하늘이 눈 멀 듯 하얗게 불타는 가운데 태양이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낙타는 은빛으로 푸르게 빛나는 사막을 걸었다. 그것은 순수한 야생의 동물로, 오랜 모래바람에 늙고 병들어 이제는 한 줌의 생기조차 말라 버린 것 같았다. 기름지고 봉긋했을 혹은 문둥이의 손가락처럼 볼썽사납게 덜렁거렸고, 뒤틀린 다리는 고장 난 마차바퀴처럼 삐걱이며 우울한 그림자를 모래 위로 질질 끌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는 어떤 아름다움도 지혜도 읽어낼 수 없었으며 어떤 자비도 이 낙타의 생을 위해 베풀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단지 그곳에는 지긋지긋한 남루함과 쓰게 조소하는 검은 눈과,
ㅡ낙타의 붉은 몸뚱어리만이 있었다.
내가 그 그림을 보았던 것이 언제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학관에 입학할 무렵의 나는 그 그림에 대해 떠올리기는커녕 그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학관學館이란 일종의 교육 기관으로, 순수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문과, 이를 응용하여 우매한 민중을 보다 나은 길로 인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종류의 기술을 가르치는데 그 뜻을 두고 있었다. 학관은 가장 효율적이고 현명한 제도 중 하나로, 상당히 엄한 기준을 세우고 전국에서 재능과 성정이 탁월한 학생을 추려 교육, 양성된 인재들에게 통치 조직이나 연구조직의 모든 주요한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학관의 학생들을 대개 화원㕦員이라 부르는데 일반 사람들이 그네들을 반은 존경하는 의미로, 반은 조롱하는 의미로 그리 부르는 것이었다. 화원들은 대개, 아니 전부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대단한 행복과 영광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 학관에 들어가게 되었는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하급 학교 시절 고어와 화술에 뛰어나고, 미술에 남다른 흥미를 지니고 있던 촌부의 학생에 불과했으므로, 그 중 무엇이 학관 심사위원의 마음에 와 닿았는지는 이제야 짐작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금박이 입혀진 통지서를 받았을 때부터, 나 또한 화원으로 선택받았음을 일종의 은총으로 여기게 되었고, 학관에서의 첫 십 년 간 우수한 화원에게 요구되는 모든 종류의 덕목을 천천히 닦아나갔다. 그리고 늘 그러했듯이, 훌륭한 화원의 덕목에는 예술적 자질 따위는 전연 없었다.
기본적으로 학관은 화원이 가질 법한 모든 종류의 학문에 대한 욕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연구 활동을 지원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학관은 국가를 위한 인재 양성 기관이므로 화원들에게 특정 분야의 학문을 요구하는 때가 종종 있으며, 그것은 관내 관리부에서 다년간의 활동 내역을 토대로 개개인의 적성을 판단,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화원들 또한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연구의 향방을 가늠하므로 어느 쪽이든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
나 또한 학관 초기의 자유롭고 사색이 충만한 생활 가운데 모든 인간과 민족의 값지고 진실한 삶을 배우는 과정을 지나, 지식의 운용에 새로이 몰두하게 되었을 때 학관으로부터의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화원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관리부의 뜻에 이견이 없었고, 그리하여 학관에서의 열 번째 겨울, 외교 학의 고급 과정을 밟기 시작했으며, 오래지 않아 많은 선학先學들과 친분을 맺어 견고한 관계의 그물을 짜 나갈 수 있었다. 그 그물의 한가운데는 유달리 나를 총해하던 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학관과 도시의 관리부뿐만 아니라 국가의 행정 당국과도 오래 접점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종종 나를 찾아와 그가 나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좋은 외교관이 될 명백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그의 진심임을 나 또한 언제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마주하고 있는 학문의 모든 문제에 대해 사려 깊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드물게 속세의 혼탁함과 그럼에도 우리가 대중을 교화하고 선도해야함에 대한, 그가 추구하는 원리나 영광스러운 이상에 대해 말하곤 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관계가 활기를 띠고 우정이 두터워지는 동안, 불행하게도 나는 연구에 열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산만해져 학관의 질서 가운데 융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제어하는 법칙에 항거하는 공상과 욕망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을 제어하는 노력은 용이치 않았고, 본질적으로 순화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나의 상태를 어렵지 않게 눈치 챘으며, 누구에게나 있는 과도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으나 몇 번의 대화 끝에 문제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는 나를 괴롭히는 예술에 대한 목마름에 대해, 그것이 어떤 종류이고, 오래된 것이며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어야 함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자네는 우수한 언어학자이며, 촉망받는 외교학자이다. 내가 아는 한, 이곳에서 가장 재주를 타고났으며, 겸손하나 굽히지 않고, 순종적이나 진취적인 덕성을 타고 났지. 그리고 그대는 남몰래 고금의 아름다운 형상들과 색채를 사랑해 왔고 말일세. 물론 그것은 자네의 학문으로 높은 직위의 일을 다 하기에 부적당한 것야. 그러나 그대는 절제와 꾸준한 수양으로 우수한 화원의 의무를 다하고 있으며,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인물임에 틀림없지. 이로 인해 자네가 쌓아온 존경을 잃게 된다면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야. 그러므로 나는 그 답답함을 풀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폭넓은 교양의 일부로서 잘 정제된 예법과 오래고 고귀한 형식을 갖춘다면 누구도 그대의 이름을 위태롭게 하지 못할 것이며 그대 또한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 테지.”
나는 그의 뜻을 받아들여 붓을 잡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림 그리는 것은 내게 기쁨과 안정을 가져다주었으며 더욱 나은 연구 결과와 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선물했다.
그러나, 나는 매일 반 시간씩 화판 앞에 서도 그보다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 나는 처음 붓을 잡았던 날 나의 자질이 고작 반 시간짜리임을 깨달았으며 더 이상 투자할 가치가 없음도 알았다. 그 깨달음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고, 결국 나는 그 시간이 단순한 갈증의 해소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인정했다. 이미 학관의 졸업 연구를 수행하고 있던 그 선학은 나의 이러한 태도를 흡족히 생각하였으며 여전히 나의 생활과 연구 -정말로 가끔은 그림에 대해서도-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더더욱, 그 여름의 일은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꺼림칙한 놀라움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해 여름은 유난히 시끄러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열기에 짓눌려 낮아진 세상은 어린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태양을 피해 다녔고, 바람은 가쁜 숨을 내쉬며 늙은 코끼리처럼 느릿느릿 걸어갔다. 동쪽에서의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사절단이 오가기 시작하자, 한동안 드물었던 유민과 방랑자들이 하나 둘 숲을 나와 도시로 흘러 들어왔다. 거리에는 이방의 말이 심심치 않게 흘러 다녔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래와 춤과, 괴이한 습속의 물건들이 피부색도 제각각인 사람들에 의해 발을 달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세속의 남루함과 소란스러움 속에 잘 버무려지고 여름의 습기에 푹 삶아져 기묘한 풍미를 냈다.
그러므로 그 발단이 동경이었든 단순한 호기심이었든 간에, 삶의 냄새가 뜨겁게 휘몰아치는 담장 너머로 몰래 발을 드미는 화원이 하나 둘 늘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학관의 관리자들은 이를 일종의 신앙 검증으로 여기는 듯 일탈을 묵인했고, 나름대로 화원들은 축제를 휴가처럼 즐겼다. 나 또한 그런 무리에 끼어 식자의 오만한 우월감과 어린아이의 무지한 탄성 사이를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놀라움들이 덤덤한 색채로 까맣게 덧씌워질 무렵, 나는 허름한 천막의 유랑 예인단을 보았다.
광장에서 한걸음 비껴난 골목, 불결한 공기만이 안개처럼 맴도는 성벽 모서리에 세운, 성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허술한 가설무대, 연극, 인형극, 광대, 가수, 마술, 불놀이, 이 모든 자질구레한 것들 사이에, 도도한 춤자락으로 웃는 나비가 한 마리 있었다.
그 여자는 남부의 집시처럼 보였는데, 작은 북을 들고 춤추며 북놀음을 하고 있었다. 춤은 세련되지 못했고 리듬도 유려하지 않았다. 허나 천박한 색으로 팽팽한 몸을 감싸고 매혹적인 미소를 던지는 여자들 중에, 그렇게 한 동작 한 동작을 온 우주에 새기듯 또렷하게, 날아오르듯 춤추는 여자는 여태껏 없었다. 그 여자의 거칠고 맹렬한 발돋움과 건방지게 쏘아보는 눈빛, 거침없이 뻗는 몸짓에는 흔들림이 없어 마치 강인한 왕과도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날개처럼 펄럭이는 여자의 붉은 머리채에서, 오래 전 잊었던 낙타의 잔영을 보았다.
...계속.
본래 하나의 단편이지만 본인, 굉장히 게으른지라 아직 뒷부분은 수정을 덜 봤습니다아아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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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소년 the loony,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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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흥미롭군요.
묘사가 인상적이군요.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 )
연금술사에서 보았던 별이 어린왕자의 별을 떠올렸습니다.
짜임새 있는 글이랄까.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