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그림 풍경에는
조성주
30여 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의 재건축 이주 기간이 공고되면서 요즘 단지는 쓰레기와의 전쟁이다. 2,000여 세대의 대단지에는 세대 평균연령 칠십 세가 넘는 오래 산 주민들이어서인가 날이면 날마다 버려지는 물건들이 산더미같이 쌓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버려지는 것들이 주는 재미가 쏠쏠해 하루가 즐겁다. 한때는 아이들로 붐볐을 놀이터 한편에 비를 가릴 수 있는 가림막을 설치해서 만든 물물교환 장터 때문이다.
누군가의 배려로 ‘필요한 것 가져가세요’라는 팻말이 등장한 이후, 오늘은 무엇이 나왔을까 하는 궁금증에 퇴근길에 한 번씩 둘러보곤 한다. 아직 몇 년은 더 쓸 만해 보이는 전자제품에서부터 탁자나 흔들의자 등의 엔틱가구류, 어느 집 서재를 장식했을 시사잡지에서 화집, 유럽 여행 중 유명미술관 아트숍에서 구매했을 서양화가의 복제화 액자, 그리고 새댁의 혼수품이었을 게 분명한 60~70년대의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는 커피잔 세트 등등 온갖 생활용품들이 나와 있다. 평생 어느 집에서 요긴하게 쓰였을 물건들이 이제 새로운 주인을 만나든가 아니면 쓰레기로 분류될 운명이다.
나도 버리기에는 아까운, 오래 아꼈던 것들을 시간 날 때마다 정리해 내놓으면서 나와 있는 것 중 마음이 가는 것들하고 물물 교환한다. 어제는 밀레의 화집과 체코산 크리스탈 와인잔 세트가 눈에 들어와 냉큼 집어왔다. 오늘도 퇴근길에, 어제 저녁에 정리해 놓은 물건을 내어놓고 죽 돌아보는데 내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어 이발소 그림이네…….’
중년 이상의 세대에게 이발소는 추억의 장소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되는 푸시킨의 시에 아담한 초가집 한두 채, 농부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는데 옆에는 물레방아 혹은 풍차가 돌아가는 풍경, 어미의 젖을 물고 있는 새끼 돼지들과 그 옆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글씨가 세로로 씌어 있다. 이발소 그림의 단골 풍경이다.
제도권 미술의 상투화된 패턴이 저급화해 대량 생산되어 유통되는 통속미술을 우리는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 한다. 미술계에서는 예술성이 없거나 그림 수준이 낮다고 비하해 쓰는 말이기도 하다. 소재는 상투적이고 기법은 유치하지만, 이발소 그림에는 대중이 꿈꾸는 이상향이 담겨 있다. 너무도 낭만적이어서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런 풍경이다.
이발소 그림은 한국전쟁 직후 서울 용산 삼각지 부근에 자리 잡은 화랑들이 대량 제작한 조악한 상업화가 그 시작이다. 이곳의 주 고객은 미군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그림들을 구매해 그리운 ‘켄터키 옛집’으로 보내면서 향수를 달랬을 것이다. 또 한편, 이 화랑들은 전국의 이발소에 이런 그림들을 대량으로 보급해 전국의 이발소를 작은 갤러리화 하는 데도 한몫했다.
누구라도 알만한 세계 명화나 전통 민화를 복제한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지금도 용산의 삼각지역에서 전쟁기념관으로 가는 길목에는 재개발에 묶인 건물에 이발소 그림을 생산하는 조락한 화랑들이 몇 군데 남아 있다.
어릴 때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 이발소에서 머리를 잘랐다. 한두 달에 한 번씩 오빠들과 이발소에 가는 날은 집안 행사에 준하는 날로 특별 외식인 자장면을 먹는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부터 서열에 따라 이발하는 동안 나머지 형제들은 대기 의자에 앉아 육영재단에서 발간하는 어린이 잡지인 ‘어깨동무’나 신문 ‘소년동아. 조선’ 등을 보았다. 그달에 발간된 잡지와 그날의 신문을 다 읽을 때쯤이면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취학 전인 나는 의자 높이가 맞지 않아 손잡이에 나무 빨래판을 올려놓고 그 위에 앉았다. 어깨에 하얀 나일론 보자기가 둘리고 머리가 잘려 나가는 동안 몸을 꼼짝할 수가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대형 거울 위에 걸려 있는 그림 감상이었다. 눈을 좌우로 돌려가며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나 액자 안의 시를 보고 또 보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나,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은 그 시절 이발소에 흔히 걸려 있던 유명 복제화였다. <만종>에는 해 질 무렵 들판 한가운데에서 부부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멀리 뒤편 교회당의 저녁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 그림 속 풍경을 보면서 손님들은 자연스레 서양 회화에 접근(?)할 수 있었고 그들의 삶을 상상했을 것이다. 이발소 그림이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수요를 낳은 것도 바로 이 같은 배경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거기에 걸려 있던 푸시킨의 시 「삶」은 내가 암송한 첫 시다. 한글을 깨치게 된 것도 이발소에 다니면서 잡지나 신문에 연재되는 만화 등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글을 읽게 된 것 같다. 후에 그 시가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의 시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의 시 「삶」은 대한민국 방방곡곡 전국의 이발소에 걸린 덕분에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우리에게 각인되어 널리 알려진 국민 애송시가 되었다.
이발소 그림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기억으로 중고등학교 시절 각 학교 문예반의 ‘시화전’이다. 이때는 남·여학교를 불문하고 타 학교 방문이 공식적으로 허용되는 유일한 날이기도 했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무리 지어 국화꽃 한 다발을 품에 안고 남학교 교문을 들어설 때 두근거리던 설레임, 문학과 미술이 조화를 이룬 전시 작품들은 이발소 그림이 가지는 문화 콘텐츠를 좀 더 풍요롭게 하는 데 한몫했다.
작가가 상상한 풍경을 구도와 색상으로 대담하게 전개한 이발소 그림은 현실보다는 이상세계에 가깝다. 그것은 고단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민중들의 이상향이었다. 이러한 그림은 근대 이후 우리 미술 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그림들을 일컫는 하나의 상징이며 한 시대를 읽는 아이콘이다. 미술이 원래 삶의 한 요소로 생활에서 부여받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라면, 대중 그림의 통칭처럼 쓰이는 이발소 그림은 그림의 존재 이유를 가장 정직하게 담고 있다. 시대를 읽는 키워드의 역할을 나눠 가진 이발소 그림이 그림이란 기능에서 그것이 진지한 예술론적 탐구이거나 대중미술로서 장식용으로서 역할이거나 간에 그림의 기능으로서는 족하다.
미국의 토머스 킨 케이드는 ‘이발소 그림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미국에서만 1,000만 장 넘게 인쇄되어 팔렸다. 특히 크리스마스카드에 흔히 등장하는 그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었다는 평을 받는다. 이발소 그림이 소위 ‘이발소 그림’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준 낮은 그림을 우리는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그림에는 삶에 굳건히 뿌리내린 민중의 삶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 그림이 조금이나마 그들의 아픔을 달래주고 삶의 고단함을 보상해 주고 회복시켜 준다면 그것이 비록 덜 예술적이라 할지라도 비하되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리고 또 하나, 이발소는 지난 시절 유년의 나에게 그림과 시를 감상하고 잡지와 신문을 접할 수 있는 유일의 최고의 ‘문화의 전당’이자 ‘작은 화랑’이었다.
오늘 나는 분신처럼 아끼는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놀이터에서 주워 온 푸시킨의 「삶」이 있는 이발소 그림을 벽에 걸고 오래도록 흐뭇했다.
내 소중한 이들에게
30여 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 재건축으로 이주 날짜를 통보받고 기간 동안 전원살이를 하기로 했습니다. MBC 아카데미 귀촌 프로그램에서 만난 지인이 도서관, 홍예 공원이 훌륭하고 용봉산이 병풍처럼 처져있으며 충남도청이 있어 사회인프라도 나쁘지 않다면서 내포를 추천했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거론하며 남편도 재촉했습니다.
가을날, 주민 센터 앞에 걸린 추사고택 전시회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유년 시절 종손가의 종실이로 성장한 내게 풍수가 빼어난 고택은 아련했습니다.
첫눈 내린 날, 한적한 새벽의 풍설은 남달랐습니다.
봄입니다.
요 며칠 비개인 이곳 눈 부신 햇빛은 찬란합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청보리가 무두룩이 올라온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달래 냉이를 캐고 쑥을 뜯어 쑥 개떡을 쪘습니다.지리산 자락으로 숨어든 구천이와 별당 아씨처럼 진달래꽃 따서 화전도 부쳤습니다.가을엔 호박고지도 말리고, 그해 걷이한 정미소에서 막 찧은 햅쌀로 밥을 지을 것입니다. 방앗간에서 떡가래를 뽑아 조청에도 찍어 먹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제삿날이면 사당 문이 활짝 열리고 집안의 여인들은 볏짚에 곱돌 가루를 묻혀 제기를 닦았습니다. 어머니는 끼니때 함께하지 못한 밥주발은 아랫목에 묻으셨지요.
방짜유기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급격한 산업 중심 사회로 변화하면서 내가 잃어버린 것들, 잡히지 않는 꿈처럼 담장 밖을 서성이던 허기는 어머니와 고택과 함께 상실한 유년기의 애틋함일까요. 내포 타향살이에서 전 그 시절을 회수하고 있습니다.
*
생명과학 전공자로서 문학은 저에게 평생의 동경이었고 외사랑이었습니다.그 오랜 짝사랑이 이제 겨우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글을 써도 된다는 격려로 알아듣겠습니다.
직장에서도 물러나 시간 없다는 핑계도 못 하고, 여한 없이 읽고 써볼 요량입니다.
어설픈 글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들, 『시와산문』 이사장님과 편집장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용기를 내라고 항상 부추기는 제 글의 첫 독자인 옆지기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멀리 스웨덴에서 박사 후 연구원과정에 있는 사위 정성준과 딸 이서은에게도 깜짝 소식을 알릴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