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둘레길 3,4,5코스 트레킹 #1
2023.1.5(목) 맑음
<트레킹 코스 및 구간별 소요시간 : 7.39km, 약 3시간 소요>
화계역/09:50-한신대학교/09:57-화계사 일주문/10:00/10:15-흰구름교/10:18-화계공원지킴터/10:19-데크쉼터/10:28-
구름전망대/10:32/10:39-야외 배드민턴장/10:44-빨래공원지킴터/10:47-경천사/10:55-작은 구름전망대/10:59-솔샘길 시점/11:09-
유아숲 체험원/11:15-바람소리숲(솔샘발원지)/11:20-사색의 숲/11:21-북한산 생테숲(체육공원)/11:23-솔샘마당/11:39-정릉시내/11:49-
버스정류장/11:34-정릉탐방안내소(정릉주차장)/11:58-솔샘길 끝지점/12:03-청수사/12:04-전망데크/12:15-북악쉼터/12:43북악산 갈림길/13:03-
형제봉 갈림길/13:04--구복암(나무미륵대불)/13:07-평창마을길 시점(형제봉 공원지킴터)/13:14-북한산 둘레길 평창마을길 이정표(구기동)/13:23
<북한산 둘레길 1-21코스 지도>
<3구간 흰구름길>
<4구간 솔샘길>
<5구간 명상길>
2023.1.5(목) 청담역을 출발하여 북한산 둘레길 3구간 시점인 화계공원지킴터 방향으로 09:50 화계역에 도착한다.
09:57 한신대학교
북한산 둘레길 흰구름길 화계사 입구 400m 지점 이정표
10:00 천년고찰 화계사(華溪寺) 일주문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이 야인(野人)시절 어느 날 화계사(華溪寺)를 찾았다.
언덕길을 땀을 뻘뻘흘리며 올라오고 있는데 절 입구에 동자승(童子僧)이 꿀물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은 꿀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난 후 "누가 주라 하더냐?" 하고 물으니 "만인" 스님 앞으로 인도한다.
"만인 스님은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에게 파격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스님으로서 가람을 훼손하는 것이라 고심했지만 당시의 세도정치(勢道政治)를 끝낼 비밀을 알려준 것이다.
그는 충청도 덕산(德山)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帝王)이 나올 자리이니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移葬)하라고 하는 것이였다.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 지관(地官)과 같이 가야사(伽倻寺)에 가서 고탑(古塔)이 앉은 자리를 보니 과연 명당이였다.
돌아와 재산을 처분하여 돈을 마련하여 그 돈의 절반을 승려에게 주고 절을 불사르게 하여 폐사(廢寺)를 만든다.
남연군(南延君)의 무덤이 옮겨지고 이장(移葬)한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을 낳았다.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종손이었던 명복(命福)이 12세의 나이에 왕위(王位)에 오른다.
이하응(李昰應)의 두째아들이 고종(高宗)이 되면서 자신은 대원군(大院君)이 되었다.
삼각산 아래에 자리한 화계사는 중종 17년(1523년) 신월(信月)이 창건한 사찰로
광해군 10년(1618)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듬해 도월(道月)이 덕흥대원군 가문의 시주를 받아 중건하였고
고종 3년(1866년) 용선(龍船)과 범운(梵雲)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중수하였다고 한다.
화계사 사적비
화계사 기점 이준열사 묘역으로 가는 북한산 둘레길 3구간
입구 우측의 공덕비(功德碑)와 기념비(記念碑)
오전 10시부터 약 15분간 화계사 경내를 탐방한다.
입구에는 사천왕문(四天王門)대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된 돌기둥이 서 있다.
세계일화 편액
범종각 위에 있는 요사채
화계사 미륵전
좌측부터 여의보살, 미륵불, 길상보살/미륵불 뒤로 세계 각국의 불상.
가사공양상
육법공양상(六法供養像).
육법공양은 불교에서 대표적인 공양물 여섯 가지를 이르는 말인데
여섯 가지 공양물은 1 향, 2 등(초), 3 꽃, 4 과일, 5 차, 6 쌀을 말한다.
요사채의 문
대웅전(大雄殿)
화계사 대웅전(大雄殿)은 고종 7년(1870)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지원을 받아 중창(重創)하였다.
석수(石手) 30명, 목수(木手) 100명이 수개월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왕실의 지원을 받아 지어졌기 때문에 "궁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용마루 한가운데는 청기와가 올라가 있고 양쪽 끝에는 취두(鷲頭)가 있다.
취두(鷲頭)는 왕실 건축물의 용마루에만 있는것이라고 한다.
현판(懸板)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인 위당(威堂)신관호(申觀浩)가 썼다고 한다.
대웅전 옆의 명부전
명부전(冥府殿)의 현판(懸板)과 주련(柱聯)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좌측 위의 삼성각(三聖閣)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
대웅전의 왼편에 자리 잡은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은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모신 전각이다.
건물 자체가 높은 단 위에 설치된 데다가 내부에 많은 "나한상"(羅漢像)을 높이 봉안하고 있어 건물 높이가 상당하다.
봉안된 조각상은 찬하(餐霞) 최기남 거사가 조성한 것으로,
최기남은 1915년 관직에서 물러나 금강산에 들어가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며
"십팔나한상"(十八羅漢像)과 "천불상"(千佛像),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 등을 조각하였다.
조성한 조각상들을 강남 봉은사와 여주 신륵사에 봉안했다가
1964년 최기남의 아들 무방(無方)거사의 시주로 천불오백성전을 건립하고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나한"(羅漢)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를 가리키는 말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부처님이나 보살 못지않게 공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
"나한"(羅漢)을 모신 건물에는 보통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나한전"(羅漢殿)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이곳은 특이하게 앞에 "천불"(千佛)이란 말이 덧붙여져 있다.
법당(法堂)에 불상(佛像)이 천 개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고,
"오백나한"(五百羅漢)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관음보살"(觀音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모셔져 있다.
앞에 "천불"(千佛)이 있는 것은 "천불전"(千佛殿)과 "나한전"(羅漢殿)을 겸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과 당간지주
1991년에 건립한 대적광전
화계사 대방(大房)
大房은 여러가지 용도가 있겠지만 남녀차별이 심하던 조선시대에 왕실(王室)의 궁녀(宮女)들이
대웅전 같은 전각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방(大房)에 머물면서 예불(禮佛)을 드릴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대웅전에 많은 인원이 기도하게 될 경우 그 맞은편에 위치한 대방과 마루에서
대웅전을 향해 예경(禮敬)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구성되었으며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종비생(宗費生 : 스님) 교육시설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건물 안에는 크고 작은 방과 부엌 등이 있어 다목적으로 쓰인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방"의 다목적 기능은 엄혹한 일제강점기의 1933년 7월에 최현배, 이희승, 정인섭, 이극로 등 조선어학회 회원 10여명이 비밀리에 모여
한글 맞춤법 통일을 위한 9일간의 회의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그 성과는 같은 해 10월 29일 "한글맞춤법 통일안" 발표로 이어졌다.
화계사 동종
화계사 보물 제11-5호인 화계사 동종
화계사 동종(華溪寺 銅鍾)은 조선 숙종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思印)비구가 주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 말 광무 2년(1898년) 경북 영주 희방사(喜方寺)에서 화계사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새로 축조한 범종각 안에 놓여 있다.
화계사 경내의 느티나무 보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