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사(九龍寺) 시편(詩篇) ⸱ 겨울노래
오세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暴雪)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蘭)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시집 『벼랑의 꿈』, 1999)
[작품해설]
오세영이 추구해 오고 있는 시 정신은 ‘시의 시다움’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시의 시다움’이란, 시야말로 영혼이 곤궁한 이 시대 사람들을 위한 문학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 양식을 ‘신성성(神聖性)’이라고 표현한다. 시의 신성성이란 시가 인간의 존엄성 내지 인간다움의 염결성(廉潔性)을 지키거나 회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은 시가 결코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 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다. 그가 생각하는 시의 이상은 개별적인 인격의 실현에 역점을 두는 데에 이쓴 것이 아니라, 전인적(全人的) 인격을 해체하는 무수한 삶의 조건에 맞서 도덕적 염결주의로 집중된 삶의 전체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이란 세속적 차원이 아닌, 성스러움의 차원을 지향하는 시적 행위와 등가(等價)의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시는 그가 추구해 온 ‘시의 시다움’에 가장 적합한 작품으로, 불겨적 허무 사상과 도교적 무위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넘어선 충만한 생명 의식, 또는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넘어선 조화와 합일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본능을 인내하는 정신의 고결함을 보여 줌으로써 ‘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심각하게 되돌아보게 해 준다. 사물에 대한 예리한 직시와 선미적(禪味的) 의미를 고운 가락으로 아름답게 빚어 낸 이 작품은 이러한 장점에 힘업어 제4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먼저 이 시는 소리 내어 읽었을 때 시상의 흐름이 유유하다는 점에서 낭송의 즐거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이 시의 지배적인 수사적 의장(意匠)인 대구(對句)에 기인한 구조적인 안정감도 이러한 시상의 흐름을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모름지기 대구란 짝수 문화의 소산물이다. 이 문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미학의 세계는 조화와 질서이다. 이 때 시는 동양화와 같은 안정된 여백의 미를 창조하고자 한다. ‘시중유화, 화중유시(時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처럼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서정시는 청각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의 절묘한 조화를 추구해 왔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작품은 시라기보다는 차라리 산수화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이른바 ‘수묵 산수화’가 지향하는 관조의 세계를 이상으로 삼는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인 ‘구룡사’는 단순히 강원도 치악산 소재의 구체적 산사(山寺)로만 머물지 않고, 신성성의 공간으로 확대된다. 그러기에 구룡사는 어디에건 있으나 아무 데도 없다. 왜냐하면 그 곳은 시 정신의 절대 경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은 심오한 내면 성찰을 시도한 작품이기도 한데, 그것은 ‘차가움’과 ‘텅 빔’의 세계로 특징지을 수 있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겨울이며, 공간적 배경 또한 한사(寒寺)이고 보면, 이 시에는 뼛속까지 저려오는 차가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빈 하늘 빈 가지엔 / 홍시 하나 떨 뿐인데’라는 새행이 암시하듯, 이 시는 ‘공허’로 상징되는 문화적 배경 아래 놓여 있다. 차가움과 뜨거움, 공허와 충만은 동서양 문화권의 차이요, 구체적으로는 불교적 인고(忍苦)와 기독교적 열정을 대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동양 문화와 불교적인 정신에 근거한 시인의 시 의식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작가소개]
오세영(吳世榮)
1942년 전라남도 영광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68년 『현대문학』에서 시 「잠 깨는 추상」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2년 『현대시』 동인
1983년 제15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84년 제4회 녹원문학상 수상(평론 부분)
1987년 제1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2년 제4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2년 제2회 편운문학상 수상(평론 부분)
2000년 제3회 만해시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시집 : 『반란하는 빛』(1970),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2), 『모순의 흙』(1985), 『무명연시(無名戀詩)』(1986), 『불타는 물』(1989), 『사랑의 저쪽』(1990),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1991), 『꽃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 『어리석은 헤겔』(1994), 『눈물에 어리는 하늘 그림자』(1994), 『너, 없으므로』(1997), 『아메리카 시편』(1997), 『벼랑의 꿈』(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