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정혜 삼학
계의 그릇이 견고하여야(戒器堅固) 선정의 물이 맑아지고(定水澄淸)
선정의 물이 맑으면(定水澄淸) 지혜의 달이 잘 나타나노라(慧月方現)
이는 불교의 세 가지 근본 가르침인 삼학(三學)의 관계를 밝힌 게송입니다.
계(戒)의 그릇이 견고하여야 그 그릇에 담기는 선정(定)의 물이 맑고 깨끗해질 수
있으며, 선정의 물이 맑고 깨끗하여야 지혜의 달이 밝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은 따로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옛 어른들은 이 삼학을 세 발 달린 솥에 비유하였습니다.
옛날의 솥을 보면 발이 세 개 달려 있습니다. 발이 세 개 있기 때문에
한쪽으로 솥이 기울어지지 않고 흔들림 없이 반듯하게 놓일 수 있습니다.
솥의 세 발과 같은 계와 정과 혜를 요즘 말로 바꾸면, 계(戒)는 바르게
사는 것이요, 정(定)은 평화로움이며, 혜(慧)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밝은 삶입니다.
그리고 이들 삼학 중에서 가장 앞서는 것은 계(戒)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게송에서 본 바와 같이,
계를 잘 지키며 바르게 살면 평화로움을 얻을 수 있고, 평화를 이루면
있는 그대로를 밝게 보고 멋있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계(戒), 곧 ‘바르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이겨내는 것입니다.
남이 밉고 남을 욕하거나 해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도,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하면서 나를 뒤돌아보고, 탐심이 일어나고 도둑질을
하고 싶어도 ‘이것은 인간의길이 아니다’라면서 그 생각들을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다스리고 억제하면서 바르게 살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장황한 설명보다는 한 편의 옛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 벽계정심(碧溪淨心, 15세기, 생몰년 미상) 선사라는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폭군 연산군이 불교말살 정책을 펴면서,
승려들을 모조리 환속시켜 양반집 노비로 부리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승려의 모습을 지킬 수 없었던 정심선사는 머리를 기르고
영동 황악산 속의 물한리라는 곳으로 숨어들어 가서,
선종의 법맥을 이을 제자가 올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스님 혼자서 살면 의심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오갈 데 없는 여인 한 분을 그곳에 데려다 놓고,
남이 볼 때는 부부가 사는 것처럼 위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부라고 하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한자리에 앉을 수 있어야
하건만, 스님은 하루 종일 새끼로 짚신을 삼거나,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거나,
호미와 삽과 낫을 들고 농사일을 할 뿐,
낮이건 밤이건 그 여인이 옆에 앉을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한없는 외로움과 너무나도 무심한 스님의 태도에 회의를 느낀 여인은
마침내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가져갈 것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옷가지 이외에 가져갈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찾기를 그만둔 여인은 물을 떠먹는 조그만 바가지 하나를 들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 길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으나, 그녀에게 같이 살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결국 3년 만에 다시 정심선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스님은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나간 시간에 남의 여자를 힐끗 쳐다보거나,
‘아! 저 여자 예쁘구나, 데리고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품지를 않았소.
그 때문에 ‘내 사람’이라 이름이 붙은 이에게는 어느 누구도 손을 댈 수가 없다오.
당신이 3년 아니라 30년을 돌아다니고, 우리나라를 벗어나 중국에 가고 전 세계
를 다 돌아다닌다 해도 ‘나하고 같이 살자’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오,
그 까닭은 내가 남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고,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오. 지금처럼 부득이한 사정으로 형식적이나마 ‘내 사람’
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면 그 누구도 건너다보지를 못한다는 것이오.”
또 여인이, ‘이 집을 떠날 때 가져간 것이라고는
물 떠먹는 바가지 하나였는데, 그것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자 답을 했습니다.
“그 바가지도 마찬가지라오. 대관령을 넘다 보면 아홉 남편을 거느렸던
여인을 안장한 일처구부묘(一妻九夫墓)가 있고 그 옆에 작은 쪽박샘이 있는데,
거기에 가면 바가지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을 것이오.
내가 전생에 남의 물건을 몰래 갖고 간 일이 없고 훔친 일이 없기 때문에,
‘내 물건’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아무도 가지고 갈 사람이 없소. 당신이 걸어
놓은 바가지가 썩은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걸려 있을테니 가서 확인해 보시구려.”
이 말을 들은 보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 자리로 가보았습니다. 과연 정심선사가 말한 나뭇가지에는
바가지가 새까맣게 썩은 채로 걸려 있었습니다.
정심선사의 말씀처럼, 바르게 살면 그 공덕은 남이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나에게로만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흔들려서 바르게 살지
못했을 때에도 반드시 그 과보가 나에게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정확한 것입니다.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바르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이겨나가는 삶인 동시에 인간사회의
기본이 되는 수양입니다. 나의 바른 삶은 나와 나의 가정을 지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성실한 울타리요, 온 나라를 편안하게 만드는 주춧돌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아갈 때 모든 것은 제 자리를 찾게 됩니다.
불자인 우리가 바르게 사는 근본 계율인 오계(五戒)를 잘 지키면 유교에서
말하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상(五常)도 저절로 지켜집니다.
산목숨을 죽이지 않는 불살생은 ‘어질 인(仁)’이요, 훔치지 않는 불투도는
‘옳을 의(義)’이며, 법으로 정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불사음은 ‘예도
예(禮)’이고, 거짓말하지 않는 불망어는 ‘믿을 신(信)’을 지키는 것이며,
술에 취해 흐리멍덩해지지 않는 불음주는 ‘지혜지(智)’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상(五常)에 ‘항상 상(常)’자를 쓴 까닭은,
사람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다섯 가지 바른 삶을
항상 지켜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계를 잘 지키면서 바르게 살면, 옛 어른들이 조심하고
소중히 여겼던 오상은 저절로 지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옛 어른들은 ‘산목숨을 많이 죽여 명을 끊게 되면
다음 생에 병이 많고 명이 짧아지는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불살생의 계를 지키게 되면 병이 들고 단명한 과보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겠다는 계를 지킬 때에도
이와 같은 원리로 다음 생에 부자가 되고 복된 삶을 보장받게 됩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을 이기는 수행입니다.
지켜야 할 계를 어기고 바르게 살지 못할 때,
그만큼 내 명을 재촉하고 내 곁의 복을 끊는 인연을 만들게 되며,
내 곁에 모이는 사람이 전부 나를 속이는 등의 무서운 재앙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늘 간직하고 바르게 살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바르게 살면 선정의 평화가 깃들고 밝은 지혜가
샘솟는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꼭 스스로의 행복과 평화와
지혜를 위해 바르게 살고자 노력하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우룡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