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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9 묵상글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 왜 큰 소리를 내실까?, 하늘의 상급에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5:24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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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4.29 05:19
- 왜 큰 소리를 내실까?
오늘 복음의 시작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입니다
우리말에 큰 소리를 내셨다고 하면 그리 좋은 뜻이 아닙니다.
작은 소리로 해도 될 것을 큰 소리를 내어
평지풍파를 일으키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닐 것입니다.
뭔가 답답한 것은 있으셨을 것이고,
뭔가 깨닫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답답한 것은 믿어야 한다고 그리 말씀하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어제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라고 했는데 여전히 믿지 않고,
당신이 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하는 것뿐이라는 말도 믿지 않고,
오늘은 당신을 믿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믿는 거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보면 당신을 보내신 분도 보는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면 당신을 통해 아버지도 보게 된다는 말씀이기도 한데,
그것은 당신이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빛이 없으면 어둡습니다.
아니 빛이 없는 것이 어둠입니다.
이 세상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빛이신 주님이 안 계시기에 어두운 것입니다.
내 마음이 어두운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빛의 주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 공동체 어두운 것도 공동체 안에 빛이신 주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빛이신 주님께서는 이토록 우리의 어둠을 비추시는 분일 뿐 아니라
당신 빛으로 빛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라는 시편 말씀처럼 하느님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사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볼 수 없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불행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빛 가운데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빛이 우리 어둠을 비추기 때문이고,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는 어둠을 선택합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라는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8장과 9장에서도 계속 주님이 빛이시라는 말씀을 전하는데
우리는 계속 빛을 거부하고 그래서 어둠 속에서 보지 못하니 이런 우리가 답답하고
안타까워 큰 소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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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늘의 상급에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상급을 바라보며 걸어가십시오. 시선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하십시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상급에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2026년 4월 27일 월요일
지난 한 주 동안 ‘데일리 묵상’을 위해 기쁘게, 자유롭게 봉헌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관대한 나눔이 이 사도직을 가능하게 합니다. 아직 봉헌하지 않으셨지만 마음이 있으시다면, 일시적 혹은 정기적인 헌금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관상적 여정을 걸어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이클 커리 주교( Rt. Rev. Michael Curry )는 설교에서,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sustains(지탱해 주신다) 하심을 묵상합니다.
마태오 복음 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몇몇을 바다로 보내십니다. 그들에게 ‘배에 올라 저쪽으로 건너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너희 모두’라는 표현은 없지만, 실제로는 ‘너희 모두 저쪽으로 건너가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 위의 위험한 여정을 떠나 한밤중에 있을 때, 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때는 주변에 어떤 빛도 없었고, 인공적인 불빛도 없었습니다. 오직 배 안에 있던 작은 등불만이 전부였습니다. 참으로 깊은 밤이었습니다. 시인 제임스 웰던 존슨은 이를 ‘백 번의 한밤중보다 더 짙은 어둠, 사이프러스 늪 속의 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비를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그들을 이리저리 흔드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장 어둡고 가장 불확실한 순간에,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한 인물을 보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물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베드로는 곧바로 ‘주님, 저를 부르시면 당신께 가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너라, 형제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뛰어내려 예수님께 향해 물 위를 걸어가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 당신이시군요!’라고 고백하며 걸음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위를 둘러본 순간, 심각한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바람과 파도, 사방의 폭풍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두었던 시선을 잃었을 때, 그때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커리 주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가를 노래하며, 위기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온 이들의 신앙을 가리킵니다
"내 손은 복음의 쟁기에 얹혀 있고,
이 여정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바꾸지 않으리라.
시선을 상급에 고정하라, 굳게 붙들어라, 붙들어라.
시선을 상급에 고정하라, 굳게 붙들어라."
마태오 복음의 이 장면에서 주목할 점은, 폭풍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바다를 잠잠케 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폭풍이 계속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폭풍속을 걸어가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폭풍 속을 걸어갈 수 있습니까? 시선을 영원한 상급에 고정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 그분의 가르침과 성령께 시선을 두십시오.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놀랍게도,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품에 자신을 온전히 던지고, 그분을 굳게 붙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우리 공동체의 한 신자는 이 묵상들이 성경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해 준다고 고백합니다. 이번 주 시편 137편의 공부를 통해, 그는 이 시편뿐 아니라 시편 전체에 대해 더 넓고 깊은 시야를 얻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와 닿은 것은, 포로된 이들이 보여준 담대한 저항의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노래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악기를 나무에 걸어 두었습니다. 이는 절대적이고도 놀라운 저항의 용기 있는, 예술적이며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나도 그렇게 용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저도 오직 그렇게 할 수 있을 희망을 품습니다.
—Brigitte G.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Faith or Fear?” The End Time: The Book of Revelation (Credence Cassettes, 1987). Unavailabl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o Dayag,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씨앗이 땅에서 돋아나 빛을 향해 펼쳐지듯, 우리도 날마다 주님의 빛 안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보호와 생명의 근원이심을 알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안심하며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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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 10:00 추가.
하느님은 강제로가 아니라, 사랑과 매혹으로 우리를 빛으로 이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 자신을 넘어, 당신을 보내신 분을 가리키셨습니다. "나를 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빛이 그렇습니다. 빛은 그 자체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드러내어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 곧 성부 하느님께서는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아무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는, 접근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는 분"(1티모 6,14-16)이라고 증언합니다. 분명히 빛은 하느님을 표현하는 하나의 은유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탁월한 은유입니다. 실제로 "신적(divine)"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빛나다"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430)는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설명해 줍니다. "당신의 인도로 나 자신을 성찰하도록 재촉받아, 제 안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오직 당신께서 제 도움이 되어 주셨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로 들어가 제 영혼의 눈으로, 제 정신을 훨씬 넘어서는 변치 않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흔한 빛이 아니었고, 그와 같은 종류의 빛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훨씬 더 강력하고 찬란하여 온 우주를 가득 채우는 듯한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본 빛은 그런 흔한 빛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제 정신보다 위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기름이 물 위에 뜨거나 하늘이 땅 위에 있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빛이 바로 저를 창조하셨기에 저는 그 빛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 빛을 압니다."
이 빛은 이제 우리의 세례를 통해 주어진 자녀의 권리, 곧 은총의 유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둠이 우리를 붙잡고 있거나, 오히려 우리가 어둠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은 이를 "스스로가 자기 감옥이 되는 것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너무 오래 어둠 속에 머물렀던 피조물처럼, 우리는 빛과 열린 공간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강제로 끌려 나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옥은 곧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그 감옥을 함께 가져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초대하고, 매혹하며, 부드럽게 이끌어내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부르신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은 강제로가 아니라, 사랑과 매혹으로 우리를 빛으로 이끄십니다. 이는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이며, 믿음의 길은 강요가 아니라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의 눈을 들어 그 빛을 보고자 하면 반드시 그 빛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일에만 정신을 쏟고 있는 동안에는 이 빛 아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정기적으로 무의식적인 생각의 고리를 끊고 깨어 의식하여 이 빛 아래 있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요즘 산과 언덕에 녹색으로 물들인 나뭇잎들은 우리더러 이 하느님의 손길을 느껴 보라고 넌지시 말을 건네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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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시면서,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것은 네 번에 걸친 “나는 ~이다”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선언’으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의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주제인 ‘빛의 자녀 찾기’를 반영합니다.
<두 번째>로,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전체 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제3장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조).
<세 번째>로,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요한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7장의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네 번째>로,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요한 12,5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8,38)는 말씀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는 말씀을 밝혀줍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선언에 앞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라고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밝혀주십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유일한 계시자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본 것이 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고, 그 ‘빛’으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을 이루시되,
결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응답을 기다리며,
오히려 저에게 승복하십니다.
이 놀라운 겸손에 제가 부복하오니,
주님, 당신의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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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미사 경본에서 읽었던 기도문이 생각납니다. “행복하여라!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기도문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핵심을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구 사목국에 있을 때입니다. 예전에는 사목국만 있었는데 교구의 규모가 커지면서 사목국에도 여러 부서가 생겼습니다. ‘행정실, 교육 담당, 가정 사목, 직장 사목, 복음화 연구실, 선교 전례, 레지오, 일반 병원 사목’으로 부서가 나누어졌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교육 담당을 맡았습니다. 사목을 크게 정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크게 3가지를 맡겨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병자를 고쳐 주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신부님들은 본당 사목하다가 와서 처음에는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저도 비슷했습니다. 국장 신부님은 그런 현실을 아시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서 각 부서가 가지는 고유한 사명을 찾도록 하였습니다. 각 부서의 역할을 우리 몸의 여러 기능을 통해서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자전거의 여러 기능을 통해서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신부님들은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지, 부서의 사명은 무엇인지 조금씩 파악하였습니다. 부서의 역할과 사명을 분명히 파악한 신부님은 훨씬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부서는 ‘일반 병원 사목부’였습니다. 신부님은 가톨릭 성모 병원에만 있는 ‘원목 실과 원목 사제’를 일반 병원에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사명을 가지고 신부님은 병원마다 찾아다니면서 ‘원목 실’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였고, 신부님을 찾아다니면서 ‘원목 사제’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은 해외의 병원들도 방문하면서 ‘원목 실’의 기능을 발전시켰습니다. 직접 임상 상담 프로그램을 배웠고, 자원봉사자들이 임상 상담을 배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가톨릭 회관에 있는 사무실을 얻어서 교육실로 만들었습니다. 임상 상담 교육이 있는 날 이외에는 다른 부서가 교육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대신에 다른 부서는 교육실의 비품을 지원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부서도 교육실의 비품으로 텔레비전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열정, 신부님의 기획력, 신부님의 확신은 일반 병원 사목부를 발전시켰고, 서울에 있는 많은 병원에 ‘원목 실’을 만들었습니다. 원목 실을 통해서 많은 교우가 위로받았고, 병원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제 성화의 날’에 사목 체험을 발표하였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교구 사목국의 교육 담당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구역장, 반장을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소공동체를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역장, 반장을 위한 피정과 월례 연수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월 발행되는 구역장, 반장을 위한 ‘길잡이’를 발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남, 여 총구역장 회의를 주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크게 3가지를 새롭게 했습니다. 1월의 월례 연수에는 주교님들이 미사를 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3분의 주교님이 18개 지구를 다니시면서 미사를 해 주었습니다. 구역장, 반장님이 주교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니 좋아하였고, 주교님들도 현장에서 미사를 함께 하시니 좋아하였습니다. 12월의 월례 연수에는 수고하신 구역장, 반장님을 위해서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초대해서 즐겁게 지냈습니다. 가수를 초대해서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남성 구역 봉사자를 위한 하루 피정도 만들었습니다. 강북은 동성 고등학교에서, 강남은 서초 구민회관에서 하였습니다. 형제님들이 좋아했습니다. 총구역장 회의를 명동에서 하다가, 각 지구로 찾아가서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직업도 ‘금수저’는 아니었습니다. 어부였고, 세리였고, 열심 당원이었습니다. ‘흙수저’가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의 표상이지만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다윗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가 있으오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와 더더욱 주님을 따르라 하시나이다.”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부족함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완벽함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완벽해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고, 여전히 나약함 때문에 좌절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나약함을 믿음으로 극복하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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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10:10 추가.
黃Dami 매일묵상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때로 본의 아니게 짙은 어둠 속에 머무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곰곰히 따져보니 그 순간은 견디기 힘겨운 고통과 슬픔의 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해본 순간, 억울한 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왜 굳이 당신께서 애지중지하시는 인간에게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게 하시는가? 의아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하나 하나 따져보니, 그 혹독한 순간 역시 큰 틀 안에서 은총의 순간이요 보석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견디다보니 아픈 것은 나았고, 상처는 아물었습니다.
눈물을 끝내고 바라본 세상은 분명 똑같은 세상인데도 훨씬 더 소중하고
더 아름다워보였습니다.
따지고 보니 아픔이라는 것이 오히려 살아있음에 대한 신호였습니다.
결국 상처라는 것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장이요 영예가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의식의 전환은 우리가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환한 빛 가운데로 나오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부족하고 유한한 인간 존재로서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할 갖은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낙천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거듭 건너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육에서 영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인간에게서 주님께로 건너가는
노력 말입니다.
오늘도 어둠 속에 방황하는 어린 새 한 마리 같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은혜로운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곳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12장 46~47절)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빛처럼 고마운 존재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 한명 한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빛으로 다가오십니다.
빛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은 나와 함께 하신다,
내 어두운 인생길에 동행하신다, 내 공간 안에 함께 현존하신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종종 체험하는 바입니다만, 우리가 극심한 육체적 영적 고통에 사로잡혀 있을 때, 큰 고민속에 앉아 있을 때, 혹은 영적 암흑기에 머물러 있을 때, 그 누군가 따뜻한 동반자가 그저 함께 있어줄 때, 아뭇소리 않고 동고동락할 때, 존재 자체로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 순간 위안을 준 누군가는 종종 혈육보다 더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우리 삶의 깊은 곳에 자리한 어둠의 공간 안으로 기꺼이 들어와주었기 때문에, 함께 머뭄으로서 결코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가 나와 강한 결속 의지를 표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결국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 지극히 하찮은 나와 삶을 공유하시러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측면에서 우리와 결속되고 공유함을 통해 기쁨의 슬픔, 희망과 절망을 함께 나누기 위해 오신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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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10:1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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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베로니카 26.04.29 06:03
오늘 내 얼굴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반영하는 얼굴인가요?
송홧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면 서해 바닷물 수온이 조금씩 올라갑니다. 그것은 바닷속 생명체들이 활동을 시작한다는 표시입니다,
밤바다가 열리면 만사 제쳐놓고 바다로 나갑니다. 이른바 해루질을 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해루질을 해보니 은근 중독성이 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별들을 등에 이고, 광활한 밤바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 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서 게나 물고기, 골뱅이나 소라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손에 넣기라도 하면 로또라도 당첨된 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공적인 해루질의 관건은 뭐니 뭐니 해도 강력한 밝기의 랜턴에 달려있습니다. 평소 쓰던 랜턴이 빈약해서 강력한 것로 장만하려 했더니, 광고가 떴습니다. 가격도 괜찮고, 사이즈도 적당하고, 그 랜턴 하나로 마을 전체가 대낮처럼 환해진다는 광고였습니다.
혹시라도 품절될까 봐, 초스피드로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품이 도착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포장지를 뜯어냈습니다. 제품을 조립하고 충전하고 켜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다시 과장 광고에 속았습니다. 마을 전체가 밝기는커녕, 방 한 칸도 밝힐 수 없는 과장광고였습니다.
최근 해루질 시즌이 시작되는 즈음, 모아놓았던 용돈을 털어, 강력한 밝기의 랜턴을 하나 구입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밤바다로 나가 랜턴을 켜니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희미한 바닷물 속도 시원시원하게 보이니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밝기의 랜턴이었는데, 동녁에 해가 떠오르니, 즉시 별 것 아닌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버리더군요. 강렬한 태양 빛 앞에 가로등이나 랜턴 등 모든 빛이 존재감이나 가치를 상실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빛이라고 강제하지 하십니다.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언젠가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셔서 세상과 인간을 심판하실 때,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시는 주님! 그분 자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분의 등장 앞에 다른 모든 존재나 대상들은 즉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마치 강렬한 태양 앞에 촛불 한 자루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잘 경청하고 실천했는가?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빼닮았는가? 우리가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유일한 의미요 가치인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강렬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얼굴을 반영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반영하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가장 예수님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잘 반영한 사람이 있었으니, 성모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또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시에나의 카타리나(1347~1380) 성녀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얼굴은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을 반영하고 있는가요? 오늘 우리의 목숨은 그저 목숨 부지하기 위해 마지못해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주님 안에서 보다 풍요롭게, 보다 자연스럽고 충실하게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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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2,44–50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러니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단지 한 시대의 스승이나
아름다운 가르침을 전하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향해 마음이 열리는 일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초대받는 일입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의 눈높이로 다가왔다고 묵상했습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신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성자 안에서
빛과 진리와 자비의 얼굴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막연한 종교적 감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빛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응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 말씀 자체에 의해 마지막 날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두려움의 선언이라기보다
진리에 대한 깊은 요청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빛을 비추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빛을 비추십니다.
하지만 빛을 거부할수록
우리는 스스로 어둠 안에 머물게 됩니다.
사랑/기쁨 주간에
이 말씀은 특별히 깊게 다가옵니다.
사랑은
진실을 흐리게 하는 모호함이 아니라
상대를 살리는 빛으로 다가가는 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을 어둠 속에 그대로 두지 않고
빛 쪽으로 부르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따뜻한 위로이면서도
동시에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진실입니다.
그리고 기쁨은
그 빛 안에서
더 이상 길을 잃지 않는 데서 자라납니다.
기쁨은 단지 기분 좋은 순간이 아니라
내 삶이 다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분명해질 때 오는 내적 평화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입니다.
이 복음은 일치의 길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일치는
차이를 억지로 지우는 데서 오지 않고
같은 빛이신 주님께 시선을 모을 때 시작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기려 할수록 멀어지지만,
함께 주님을 바라볼수록 가까워집니다.
주님의 빛은
교회를 쪼개는 빛이 아니라
흩어진 이들을 다시 하나로 모으는 빛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빛 안에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익숙한 어둠 안에 숨어 있는가?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잠시 듣고 지나치는가,
아니면 내 삶을 비추는 기준으로 받아들이는가?
나는 공동체 안에서
일치를 세우는 사람인가,
아니면 분열을 깊게 하는 사람인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우리를 방치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우리의 길을 잃지 않게 합니다.
주님,
당신을 통해 아버지를 보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 안에서
제 삶의 방향을 다시 찾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을 거부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며
기쁨 안에서 어둠을 벗어나게 하소서.
또한 갈라진 마음과 교회들을
당신 빛 안에서 다시 하나로 모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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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10:08 추가.
<빛이 아닌 것을 빛이라고 착각하면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4-50)>
1)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여기서 ‘어둠’은 ‘죽음’을 뜻하고, ‘빛’은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빛’을(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분입니다.
2)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빛을 얻고, 빛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둠 속에서의 인생’과 ‘빛 안에서의 새 인생’을 잘 나타내는 좋은 예가 ‘바르티매오’와 ‘자캐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루카 18,35-38.40ㄴ-43ㄱ).”
바르티매오가 눈이 먼 채로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어둠 속에 갇혀 있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가 눈이 먼 것도, 그의 인생이 어둠이었다는 것도 ‘죄 때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요한 9,3).
그의 딱한 처지는,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빛’을 갈망했던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빛’을 청했습니다.
그가 청한 ‘빛’은 ‘새 인생’이었는데, 예수님 덕분에
‘새 인생’을 살게 되자 그가 곧바로 한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 즉 ‘구원의 빛’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는, 직업 때문에 ‘죄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빛’을 갈망했던 사람입니다(루카 19,1-10).
그가 실제로 죄를 지었는지, 죄를 지었다면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는 알 수 없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이 어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에게서 빛을 찾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 바오로 사도가 박해자 시절에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한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 9,5-9).”
예수님께서 ‘박해자 사울’을 직접 회개시키신 일은,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수님께는, ‘박해자 사울’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박해자 사울’을 회개시켜서
‘사도 바오로’로 변화시키신 일은, 일차적으로는 바오로 사도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한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일입니다.
그 일은, 빛이 아닌데도 빛인 줄 알고 살았던 그의 ‘과거의 삶’을 상징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가 그동안 빛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빛이 아니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4) ‘박해자 사울’처럼 ‘빛이 아닌데도 빛인 줄 알고’ 헛된 것들을 찾아다니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 세상의 온갖 이론들과 사상들에 빠져 있는 사람들,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를 ‘빛’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 6,23).
<어쩌면 지옥으로 들어가면서도 자기가 들어가는 곳이 ‘하느님 나라’인 줄로만 알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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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1:25 추가.
요한 12,44-50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에 대해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하느님의 진노를 두려워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이 세상을 심판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느님 뜻을 거스른 죄인들을 심판하고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알게 모르게,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지르는 우리를 죄악의 어둠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죄악과 무지의 어둠, 탐욕과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해서 ‘심판’ 자체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참된 행복을 누리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에서 단절된 채 영원히 슬픔과 절망 속에서 사는가는 전적으로 ‘나 하기’에, 즉 나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결정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지요.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을 따라 올바른 길에 들어서는 사람은 그 길의 끝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의 빛이 불편하고 힘들다며 그 빛을 등지면 잘못된 길에 빠져 방황하게 될 것이고 그 길의 끝은 멸망입니다. 결국 구원에 관한 모든 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는가 아닌가에 달린 것이니,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아 우리에게 전하신 그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거라고 하신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무엇이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또한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는 그분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덕분에, 그분께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알려주신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보게 되었고, 알게 되었으며,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빛’으로써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은 우리로하여금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하시어 구원받게 하시겠다는 지적인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저 머리 속에 지식을 갖춘다고 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속에 주님께 대한 감사가, 그리고 주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굳은 결심이 자리잡고 있어야 그 마음가짐에 나의 구체적인 실천이 더해져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밝히듯이,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의 빛을 밝혀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자기 마음 속에 받아들여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줌으로서,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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