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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 20-24
아담이 그 아내를
1. 본문 20절은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완료 시제로 보고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했었느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해석을 따른다면 모세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담이 자기 자신과 자손에게 생명을 약속함에 있어서 아내에게 속임을 당했는데 그는 나중에 경험을 통해 자기 아내가 죽음을 야기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역사의 순서를 무시하고서 시대의 어느 한 시점에 선행하는 일을 나중에 덧붙여 기록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구절을 과거 시제로 해석한다면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 이해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의 머리가 여자의 후손에 의해 상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므로 좀더 행복한 상태를 기대하도록 고무 받은 아담이 그 여자를 생명을 암시하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고상하고 영웅적인 정신의 인내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격렬하고 어려운 투쟁을 겪지 않고는 그녀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어머니라고 간주할 수 없었으며,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을 영원한 멸망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생명의 연장에 대한 선언을 들었을 때, 다시 숨을 쉬었고 용기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소생한 존재가 되어 아내에게 생명에서 유래된 이름을 지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그가 큰 위로를 받아 용기를 가지고는 현존하는 죽음을 피하자마자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으므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아내에게 그와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라고 해석해야 될 것입니다.
2. 본문 21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입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해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시는 수고를 하셨다고 평범한 문체로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마치 하나님을 모피 상인이나 옷을 만드는 하인인 듯이 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한 가죽이 그들에게 우연히 제공되었으리라는 점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새로운 필요에 의해 요구된 동물은 원래 인간을 위해 이용되도록 운명지어진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몇 마리를 죽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충고를 받아들여 동물을 잡아 그 가죽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을 가죽옷의 주권자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이유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옷감으로 지은 옷이 비단이나 양모로 만든 옷보다 더 천하게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옷을 입은 우리의 첫 조상이 그들의 타락을 직접 목격하고,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벌거벗은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시키려고 의도하신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본보기를 제시하시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검소하고 값이 비싸지 않은 옷을 입도록 하시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옷이 아주 비싸거나 훌륭하게 장식되지 않으면 전혀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구절을 잘 묵상하기를 권고합니다. 물론 모든 종류의 장신구가 다 정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이나 호화스러운 것만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옷을 일종의 수치를 나타내는 징표로 입히려고 의도하셨던 창조주 하나님의 멸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에 도전하는 싸움을 수행하는 것이 됩니다.
3. 본문 22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인 견책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찌를 뿐만 아니라 철저히 간파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참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억눌러 승리를 취하실 만큼 잔인한 분은 아닙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질병의 상태에 따라 더욱 격렬한 치료법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아담은 자기가 받은 재앙에 대해 당황하여 놀라지만 자기 교만함을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그 재앙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진정한 겸손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에 겸손을 권면 하실 목적으로 이와 같은 역설을 통해 아담보다는 그의 후손들에게 비난을 퍼부셨다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라” 라는 불변화사는 이 구절이 당시의 상황을 가리켜 선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확실히 그것은 무섭고 슬픈 광경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영광을 나타냈는데 이제는 자신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 악취 나는 가죽 아래 숨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죽은 동물이라고 할 만큼 추악해졌습니다. 이어서 “선악을 아는 일에”라는 말이 부언되었는데 이것은 큰 불행의 원인을 설명한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조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에게 합당한 상태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마치 ‘이제 너의 야망과 불법적인 금지된 지식에 대한 너의 욕망이 너를 타락시켰다는 사실을 알아라’ 하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와 대화도 하지 않으려고 하셨지만 그가 큰 오명을 썼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경멸적으로 접근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완악한 교만을 벗어버리고 마침내 본래적인 모습으로 돌아오며 또한 자신에 대해 더욱 실망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2) “우리 중 하나” 라는 말씀에서 어떤 사람들은 천사들을 지적하면서 여기에서 복수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지상적이며 멸시받는 동물인 인간과 하늘 나라의 존재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구절은 ‘이후에 아담이 나와 같이 되어 우리는 서로 동료가 될 것이다’라는 의미로 설명되었다면 좀더 간단해질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성 삼위일체의 교리를 이 구절에서 찾으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아주 확고한 근거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어’ 라는 구절에서 밝힌 근거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담은 “우리”라는 말속에 포함되는 한편,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어떤 구별이 시사되어 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자면 차이가 있습니다.
3)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에서 이 문장에 상당한 결함이 있으므로 보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가 생명의 나무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하는 일만이 남아 있다’ 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러한 말을 통해서 그 징벌이 일시적이거나 며칠 동안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행복한 생활로부터 추방당해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무의 실과를 먹는다 해도 그 나무가 인간에게 유익함을 제공해 주리라는 점을 마치 하나님께서 부인하시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상징을 그로부터 박탈하심으로써 다른 주요한 것까지 빼앗아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례의 효능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생명을 약속하는 징표로 주어진 것이라고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자신의 이전의 생명은 박탈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여기에 엄위한 절교가 덧붙여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구원에 대한 기대를 말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것을 다시 거두어 가심으로써 다른 곳에서 새로운 도움을 찾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희생 제물을 통한 속죄가 남아 있는데, 이로써 그가 잃어버렸던 생명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이 아담에게 생명의 원천이었지만, 그가 하나님과 결별하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찾아야 했습니다. 실제로 그 후의 인간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인간이 나무를 통째로 삼키리라고 했다면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여 인생을 향유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도적인 것을 떠나서 생명을 외적인 징표와 연관시키십니다. 이것은 약속이 취하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것은 나무에 본래적인 효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제로는 우리에게 거짓 징표를 전혀 나타내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효과적으로 말씀하시므로 인간에게 나무를 이용할 수 있는 은혜를 감추셨더라도 생명을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에서 확신의 계기나 근거가 되는 것을 빼앗아 버리기로 확신하셨는데, 그것은 인간 스스로 상심했던 영원한 생명에 대해 헛된 소망을 갖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4. 본문 23-24절은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입니다.
1) 여기에서 모세는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에 관해 말했던 것을 고발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완화되었다는 것을 들어 그 선하심을 칭송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집을 제공해 주시고 비록 노동에 의한 문화이기는 하지만 땅을 경작함으로써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일감을 맡겨 주시어 아담의 추방을 유화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성적인 상황의 증거로서 자신을 돌보고 계신다고 추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인간이 추방되었으며 그룹들은 인간이 동산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을 들고 지켰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징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룹들이 동편 지역에 배치되었다고 말하는데 이곳은 사실 인간이 쫓겨나지 않았다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예리한 칼의 양날이 돈다고 덧붙입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결백함, 혹은 뜨거움’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먹을 것을 마련해 주셨지만 이제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어떤 표식을 항상 제시함으로써 은총을 제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수많은 재산과 일시적인 추방과 죽음 자체를 통해야만 타락했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자주 상기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담이 용서받을 가망조차 없이 기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주인으로 행세했던 왕궁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다른 곳에 옮겨가서 살수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풍부하고 맛있는 음식은 아니더라도 몇 가지 양식은 여전히 공급받았습니다. 또한 생명의 나무와는 완전히 단절되었으나 새로운 구제책이 희생 제사를 통해 다시 제시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루 도는 화염검”이 인간을 향해 언제나 칼끝을 들이대어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때때로 예리한 칼날을 보이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다른 곳에서 생명을 찾도록 동산에서 쫓아 내신 것이므로 우화적인 해석을 불합리합니다. 하여튼 그곳의 풍성함과 즐거움이 파괴되자마자 화염검이 주는 공포는 넘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룹들이라는 말로 천사를 의미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모세는 여기에서 자신의 역량을 백성들의 수준에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 위에 두 그룹을 두도록 명령하셨는데 이 두 그룹의 날개로 언약궤의 뚜껑을 덮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두 그룹 사이에 좌정해 계시는 분이라고 묘사되기도 합니다. 모세가 이러한 형식으로 천사들을 묘사하는 것은 그 당시 고대 백성들의 미개함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 알맞게 표현하려 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가르친 것처럼 그때에는 순수한 교훈이 필요했습니다(갈4:3). 그러므로 모세가 천사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그룹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그러한 제시를 사람들에게 잘 알 수 있도록 전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백성들에게 유익한 것이 되도록 계획하셨으며 성소에서 계시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방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약해서 어떤 도움이 없이는 하늘 나라에 가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도중에 모든 의식이 사라져 버리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와 언약궤와 제단과 진설병 상과 모든 기구는 사닥다리와 탈 것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닥다리와 탈 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신실한 자들이 마치 감옥처럼 성소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놓거나 하나님을 세상적이고 적절한 방편에 의해 도움을 받아 하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유의 상징을 제정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적인 지력을 부여받은 다윗과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지정된 장소에 고착시키거나 그와 같은 공상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룹들 사이에 좌정해 계시거나 거하시는 분으로 부릅니다. 그것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율법의 권위 아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2) 끝으로 모세는 여기에서 천사들을 그룹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명칭이 최후의 만찬에서 거룩한 떡으로 전이되는 것과 똑같은 이유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첫 글자인 (카프)가 다른 발음을 돕는 모음자이며, 유사성을 타나내는 기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룹이라는 단어는 마치 우리가 ‘소년처럼’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뜻을 지닙니다 에스겔은 이 단어를 다른 인물에도 공통적으로 적용하므로 이 설명에는 부합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판단하기로는 이것이 일반적인 명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 단어가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견해가 훨씬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스겔(겔28:14)은 이 칭호를 두로 왕에게 사용했는데 이것은 그를 천사장에 비유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