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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깨를 휘둘러 타작하는 작업은 쉬운듯 하면서도 어렵다. 하지만 이것이 숙달되면 다양한 농작물을 수확할때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
이집트 투탕카멘 흉상을 보면 한손에 홀을 한손에는 도리깨를 들고 있다
이집트 신인 오시리스신상부터 대부분의 파라오상을 보면 도리깨를 들고 있다.
도리깨는 권위의 상징이었음을 알수있다
그런데 농작물을 타작할때 사용하는 도리깨가 무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것도 오래전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사시 농민들을 급히 소집해 칼이나 창, 활등 군사용 무기를 훈련시켜 전투를 치르려면 아무래도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므로 아예 농기구를 전투무기로 변형시켜 훈련이 필요없이 바로 활용할수 있게 하기 위해 이용되었다고 볼수있다
신라시대의 능묘에 있는 십이지상에 도리깨를 닮은 철퇴를 가진것이 보인다
도리깨 무기를 편곤鞭棍이라 하는데 BC2세기 지금의 티베트지방의 서융의 기병대가 사용한것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도리깨를 닮은 철퇴를 사용한것은 고구려 신라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었고 본격적으로 사용된것은 임진왜란때 명나라 원군으로 온 타타르 기병들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조선군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한다
기병들이 도리깨를 들고 일본군진영으로 쳐들어가 휘둘러 큰 효과를 보았다한다
실제로 의병장중 김언륜장군은 도리깨를 사용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도리깨 무기 편곤이 크게 두각을 나타낸 전투가 인조때 이괄의 반군이 정부군을 상대로 한 전투이다. 이괄군 기병의 편곤에 정부군은 크게 패했다
그후 조선의 기병은 창대신 도리깨가 주무기였다한다. 하지만 훈련이 잘된 병자호란때의 청나라군대에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한다
청나라 기병
즉 기병에 대한 돌격용 무기라고 보기엔 무리이고 근접전에 적합하고 기병이 보병과의 전투에 위력을 발휘했다고 볼수 있다
임진난과 호란이후 조선의 보병의 무기는 조총이 대세가 되었고 기병의 무기는 도리깨의 변형인 편곤이 자리잡았다고 한다
조선의 여자 경찰이었던 다모는 60센티정도의 쇠도리깨를 치마속에 넣고 다녔다
다모가 신분을 밝힐때 쇠도리깨를 보였다하니 신분증 역할도 하였다고 볼수있다.
물론 보병도 편곤을 사용하였다.
농민출신은 다른 무기보다는 별다른 훈련없이 바로 능숙하게 사용할수 있었을 것이다. 도리깨를 휘둘러 보면 다양한 각도로 변화무쌍하게 움직이게 되는데 이를 막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무기라고 볼수있다. 쇠도리깨를 한대 맞으면 바로 머리가 박살
났을것이다
도리깨 즉 편곤은 동양에서만 사용한 것은 아니고 서양도 사용하였다
16세기 종교전쟁때 독일의 정규군이 체코지역을 공격했을때 체코 지역의 얀 지슈카장군은 농민들을 동원하여 칼과 창 대신에 따로 훈련이 필요없는 도리깨를 무기로 독일군 정규군을 격파했다 한다. 이를 후스전쟁이라 한다.
일 못하는 일꾼 도리깨 탓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도리깨는 사용하기에 따라 나라를 구하기도 했다.
도리깨 무기가 조선시대까지만 나타났으면 좋았을텐데 90년대 후반까지 시위진압용으로 사용된 흑역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