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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를 지을 예물
출 25: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5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 25:1-9 / [성소를 지을 재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 나에게 예물을 가져오게 하여라. 예물을 가져올 때에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의 예물만을 받아들여라. 3)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일 예물은 다음과 같다. 금과 은과 놋과 4) 자줏빛 털실과 붉은빛 털실과 진홍빛 털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5) 분홍물 들인 숫양 가죽과 돌고래 가죽과 아카시아나무와 6) 등잔 기름과 향기로운 기름에 넣을 발삼향과 분향할 때 쓸 향품과 7) 제사장의 에봇과 가슴받이에 박을 홍옥수를 비롯한 여러 보석들이다. 8) `내가 이 백성들과 함께 살고 싶다. 그러니 그들더러 내가 살아갈 성소를 세우라고 일러라. 9) 내가 너에게 보여준 설계도에 따라 성소를 짓고 거기에 쓸 여러 기구들도 내가 보여준 모양대로 만들어라.
1-24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험악한 생활과 출애굽 그리고 시내 산에서의 언약 체결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본장에서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께서 거할 장소인 성막에 대한 계시와 건립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막 건축 명령(1-2) 성막의 건립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기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성막 건립에 필요한 예물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시고,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것은 모두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쁜 마음은 예물을 드리는 자의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내는 자의 예물을 열납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고후 9:7). 또한 성막 건축은 재료를 모으는 과정과 성막 기구를 제작하고, 성막을 짓는 일도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졌습니다.
성막 건축에 필요한 예물(3-7) 성막 건축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릴 예물은 금과 은과 놋과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한 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가죽들과 조각목, 그리고 기름과 향품과 보석 등이었습니다. 이는 성막을 짓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의 종류들입니다. 이 예물들은 모두 성막에 필요한 것들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동일한 수준에서 예물을 드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예물들을 말씀하시면서 각자의 형편에 맞게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많은 재물들(3:21-22; 12:36)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취득한 전리품 등도 있었을 것입니다(16:8-13).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성소 건축(8-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시기 위해서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직접 세우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으로 짓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의 건축을 명령하시면서, 오직 자신이 보여준 양식대로 장막과 그 기구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막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예표이므로 성막을 건축함에 있어서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완전히 배제시키신 것은, 바로 그 구원 사역이 완전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입니다.
적용: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거하시길 원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당신은 지금 어떤 결심을 하겠습니까?0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물건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어떻게든 써먹어야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한 두 사람의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 백성 전체의 헌신으로 이루어집니다. 당신에게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습니까?
< 설 교 >
성막건설을 위한 헌물의 원리
출 25:1~9 / 피영민 목사
서 론
출애굽기는 총 40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전체 내용이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1~18장까지는 ‘출애굽’(구원)을 말씀하고 있고, 19~24장까지는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율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5~40장까지는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25~40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성막’(Tabernacle)입니다. 성막에서 드리는 희생제사를 통해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에 성막이 중요합니다.
출애굽기 25장 1~9절은 3주 전에도 살펴보았는데 왜 똑같은 본문으로 다시 설교하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본문은 출애굽기 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다루는 내용의 서론에 해당하기 때문에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절은 ‘성막건설을 위한 재정은 어떻게 공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3~7절은 ‘성막건설을 위한 헌물 또는 재료는 어떤 것으로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8~9절은 ‘성막건설을 위해 헌물을 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Ⅰ. 성막건설을 위한 재정공급의 원리(1~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출 25:1~2).
헌물을 낼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의 헌물을 받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헌물이나 가리지 않고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내라고 하셔서 할 수 없이 헌물을 드립니다”라고 하는 자들의 것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헌물을 받는 분이십니다.
헌금의 기본 원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되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억지로 드리거나 의무적으로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기 35장에 성막건설을 위해 헌물을 드릴 때 즐거운 마음과 자발적인 자세로 드렸습니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출 35:5). 마음에 원하는 자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또 출애굽기 35장 21절에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마음에 감동된 자, 자원하는 자가 드렸습니다.
또 35장 22절에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가슴 핀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거리와 여러가지 금품을 가져왔으되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원하는 사람이 드렸고, 35장 25절에도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낳고 그 낳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을 가져왔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29절에도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
녀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빙자하여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헌물을 드렸습니다. 마음에 원하는 사람이 드린 것이지 억지로 하거나 의무적으로 할 수 없이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헌금은 즐거운 마음과 자발적인 자세로 드리되 적게 드리지 말고 후하고 넉넉하게 드리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36장 5~7절에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물을 가져오는데 너무 많이 가져와서 모세가 이제 그만 가져오라고 명했을 정도로 쓰기에 남을 헌물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색하게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사람을 향해 인색하게 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넉넉하게 드리는 사람에게는 풍성하게 역사하십니다.
헌금의 기본적인 원리는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되 넉넉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고린도후서 8장 2~4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리스의 북부 지역을 마케도니아라고 하고, 남부는 아가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마케도니아(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가야 지역의 아테네와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지금 흉년을 만나 굶어죽을 형편이 되었으니 너희가 좀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1년 전부터 헌금을 하겠다고 약정을 해 놓고 동전 하나 모아놓질 않았습니다. 바울이 약정헌금도 드릴 줄 알고 잘한다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칭찬하고 다녔는데 공연한 말만 하고 다닌 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하면서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을 칭찬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약정한 것도 하지 않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의 성도들은 헌금 강요에 못 이겨서 의무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헌금에 참여할 기회를 주시도록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의 성도들은 돈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에 헌금한 것이 아니라 극한 가난 속에서도 헌금을 했고, 힘에 지나도록 풍성하게 했다는 것이 바울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헌금을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이 복된 마음입니다.
침례교회는 국가가 종교세를 거두어 목회자들에게 급여를 주는 것(국가교회제도)이 비성서적인 제도라 여기는 교단입니다. 국가가 왜 종교세를 거둬야 합니까? 종교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설령 종교세를 자발적으로 낸다 할지라도 국가가 거둘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제도인 것입니다. 침례교회는 이런 제도를 반대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교회제도를 시행하는 독일과 같은 국가는 목회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 번은 독일에 가서 현지 목회자를 만나 보려고 낮 12시에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잠옷을 입고 나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독일의 목회자들처럼 게으르게 일할 수 없습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교회에 나와 설교를 해야 하고 또 설교 준비를 하며 목회자로서의 임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국가가 목회자의 봉급을 지급하는 제도는 비성서적인 제도인 것입니다.
한편, “내가 하나님의 신령한 계시를 받았으니 헌금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악한 거짓말쟁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기입니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오순절파에 속한 목회자 중 오랄 로버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운 사람이었는데, 1977년에 믿음의 도성이라는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병원을 짓다가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빚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하니까 1980년에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가 빚을 다 갚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신장이 무려 270m이었다. 내가 어마어마하게 큰 신장을 가진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다 갚아 주시기로 하셨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빚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는 1987년에 다시 TV에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앞으로 1년 안에 800만 달러(한화로 80억에 해당하는 돈)를 모금하지 않으면 나를 죽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아주 못된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TV에 나와서 그런 간증을 하는 그에게 많은 오순절파 교인들이 헌금을 보내어 2년이 지난 1989년도에 8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다 갚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이 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 그 사람 능력 있다!”고 할 것이지만, 저는 병원을 짓지 않는 것이 낫지 이런 거짓말로 성도들에게 영적인 사기를 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병원이 하나 지어졌을지 모르지만, 그는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헌금을 내지 않으면 성도를 죽이실 수도 있는 분’이라는 악한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모세가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건설하기 위한 헌물을 1년 내에 다 가지고 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 것이라”고 말했다면,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창세기 25장을 읽으며 성경을 덮어버릴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나 헌금의 기본적인 원리는 자원함으로 넉넉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Ⅱ. 성막건설을 위해 드리는 재료(3~7절)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출 25:3~7).
성막 예물은 금, 은, 보석으로부터 시작해서 각종 진귀한 베실과 가죽, 향품 등 최고급 재료들입니다. 이것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유한 물건 가운데 가장 좋은 물품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성막을 건설하는데 최고급 재료를 사용해야 할까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고급 재료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400년 이상이나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광야에서 이런 고급재료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이 재료들의 출처가 어디인지 출애굽기 3장 20~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하나님은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패물을 요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웃집에 가서 패물을 달라고 하면 주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35~36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하는 대로 다 주었을까요? 그것은 열 번에 걸친 재앙으로 말미암아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 집의 장자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집집마다 장남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재앙이 무서워서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때리시고 겁박해서 재물을 빼앗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런 차원으로 이해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430년 동안 임금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일한 임금이 이보다 많으면 많았지 절대로 적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물품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련해 주신 것들입니다. 이후에 성막을 건설할 준비로 애굽 사람들의 패물들을 모아 광야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전도서 2장 26절에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이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면 하나님이 그것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로 옮겨 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재물을 모으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신약시대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원리는 동일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에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명을 주셨고, 가정을 주셨고, 직업을 주셨고,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것뿐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10~11절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지어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농부가 노력해서 얻은 것입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심을 씨앗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씨앗은 작은 것이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씨앗을 만들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컴퓨터로 씨앗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모기 한 마리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생명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농부가 노력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할지라도 씨앗과 비와 햇빛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힘으로 번 것을 왜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느냐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그 일부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드리는 것이 원칙이고, 적게 받은 사람은 적은 것을 드려도 하나님이 크게 보십니다. 마가복음 12장에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예수님은 이 사람들 가운데 가장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누구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갖은 노력을 다 하는데도 굶어죽는 사람이 있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우리의 마음 상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께 헌신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정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넉넉하게 드리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28세에 예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항상 돈이 없었습니다. 술집에 가서 탕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니까 십일조를 드리고 선교헌금도 드리고 각종 헌물을 많이 드렸는데도 술집을 다닐 때보다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왜 자꾸 십일조를 내라고 하느냐?”고 묻기 전에 자기 쾌락을 위해 쓰는 돈이 얼마인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제 경우는 술집을 다닐 때 항상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아무리 드려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Ⅲ. 성막건설을 위해 헌물을 드려야 하는 이유(8~9절)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 25:8~9).
도대체 성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성막을 위해 예물 드릴 것을 명하셨고,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헌물을 드렸을까요?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가지 큰 의미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첫째, 성막은 하나님이 지상에 특별히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편재하시는 분이시지만 성막에 특별히 거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거하실까요? 구름같이 거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0장 34~35절에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완공하고 하나님께 봉헌할 때에 구름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 구름은 ‘영광의 구름’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쉐키나’(Shekinah)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임재하시며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는 곳이 바로 성막입니다.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둘째, 성막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하는 중심지(Center of Worship)입니다. 성막에는 찬양이 있고 기도가 있고 희생제사가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귀중한 곳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반드시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막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의 보좌가 있는 ‘궁전’(Palace)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보좌는 하늘에 있지만 하늘 보좌의 지점이 바로 성막입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이스라엘과 열방의 모든 민족을 통치하십니다.
다윗이 솔로몬 성전을 위한 예비를 마친 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대상 29:1). 여기 ‘전’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궁전’을 의미하는 ‘Palace’로 쓰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왕이 거하는 처소를 의미합니다.
또 역대상 29장 11~12절에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보좌에 앉으셔서 부하게 할 자를 부하게 하시고, 귀하게 할 자를 귀하게 하시며 크게 할 사람을 크게 하시고 낮출 사람은 낮추시며 강하게 할 자는 강하게 하시고 약하게 할 자는 약하게 하셔서 만유를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넷째, 성막은 하나님과 죄인들이 화목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죄인들이 와서 희생제사를 드리며 제물의 피를 여호와께 드리면 하나님이 그 피를 보시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매일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죄인이다. 내게 함부로 오지 마라. 그러나 너희가 희생제물을 가지고 와서 피를 바치면 내가 그 피를 보고 너희 죄를 용서한다”, “너희를 위해 이처럼 희생제물이 될 메시아가 올 것이다. 너희는 그 피를 의지하여 죄 사함을 받고 그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매일 예표로서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출애굽기 25장 9절에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자 하는 죄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화목의 방식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타 종교인들의 열렬한 종교심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타 종교인들은 자기들이 정한 방식대로 각자의 신에게 접근하는 반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은 죄인들의 대속제물이 피를 흘려야 하고, 하나님이 그 피를 보시고 만족하셔야만 죄인들이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 피를 흘리셨고,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만족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사람들의 죄를 그 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피로 죄를 사해주시도록 간구하고, 믿음을 보이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 사함과 화목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막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막과 신약시대의 예배당은 의미의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막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예표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은 건물이고,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점에서 의미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성막과 오늘날의 예배당은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중심지라는 것과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예배당은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 와서 예배도 하고 성경공부도 해야 하지만 놀기도 하고 운동도 하며 교제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이 성도들과 우리 후손들의 삶의 센터, 즉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센터가 지어져야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더욱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건설에 헌신했듯이 우리 모든 성도들도 예배당 건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헌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설 교 >
서론
출애굽기는 총 40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전체 내용이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1~18장까지는 ‘출애굽’(구원)을 말씀하고 있고, 19~24장까지는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율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5~40장까지는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25~40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성막’(Tabernacle)입니다. 성막에서 드리는 희생제사를 통해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에 성막이 중요합니다.
출애굽기 25장 1~9절은 3주 전에도 살펴보았는데 왜 똑같은 본문으로 다시 설교하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본문은 출애굽기 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다루는 내용의 서론에 해당하기 때문에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절은 ‘성막건설을 위한 재정은 어떻게 공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3~7절은 ‘성막건설을 위한 헌물 또는 재료는 어떤 것으로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8~9절은 ‘성막건설을 위해 헌물을 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Ⅰ. 성막건설을 위한 재정공급의 원리(1~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출 25:1~2).
헌물을 낼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의 헌물을 받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헌물이나 가리지 않고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내라고 하셔서 할 수 없이 헌물을 드립니다”라고 하는 자들의 것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헌물을 받는 분이십니다.
헌금의 기본 원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되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억지로 드리거나 의무적으로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기 35장에 성막건설을 위해 헌물을 드릴 때 즐거운 마음과 자발적인 자세로 드렸습니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출 35:5). 마음에 원하는 자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또 출애굽기 35장 21절에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마음에 감동된 자, 자원하는 자가 드렸습니다.
또 35장 22절에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가슴 핀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거리와 여러가지 금품을 가져왔으되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원하는 사람이 드렸고, 35장 25절에도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낳고 그 낳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을 가져왔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29절에도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빙자하여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헌물을 드렸습니다. 마음에 원하는 사람이 드린 것이지 억지로 하거나 의무적으로 할 수 없이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헌금은 즐거운 마음과 자발적인 자세로 드리되 적게 드리지 말고 후하고 넉넉하게 드리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36장 5~7절에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물을 가져오는데 너무 많이 가져와서 모세가 이제 그만 가져오라고 명했을 정도로 쓰기에 남을 헌물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색하게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사람을 향해 인색하게 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넉넉하게 드리는 사람에게는 풍성하게 역사하십니다.
헌금의 기본적인 원리는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되 넉넉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고린도후서 8장 2~4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리스의 북부 지역을 마케도니아라고 하고, 남부는 아가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마케도니아(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가야 지역의 아테네와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지금 흉년을 만나 굶어죽을 형편이 되었으니 너희가 좀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1년 전부터 헌금을 하겠다고 약정을 해 놓고 동전 하나 모아놓질 않았습니다. 바울이 약정헌금도 드릴 줄 알고 잘한다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칭찬하고 다녔는데 공연한 말만 하고 다닌 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하면서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을 칭찬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약정한 것도 하지 않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의 성도들은 헌금 강요에 못 이겨서 의무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헌금에 참여할 기회를 주시도록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의 성도들은 돈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에 헌금한 것이 아니라 극한 가난 속에서도 헌금을 했고, 힘에 지나도록 풍성하게 했다는 것이 바울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헌금을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이 복된 마음입니다.
침례교회는 국가가 종교세를 거두어 목회자들에게 급여를 주는 것(국가교회제도)이 비성서적인 제도라 여기는 교단입니다. 국가가 왜 종교세를 거둬야 합니까? 종교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설령 종교세를 자발적으로 낸다 할지라도 국가가 거둘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제도인 것입니다. 침례교회는 이런 제도를 반대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교회제도를 시행하는 독일과 같은 국가는 목회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 번은 독일에 가서 현지 목회자를 만나 보려고 낮 12시에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잠옷을 입고 나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독일의 목회자들처럼 게으르게 일할 수 없습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교회에 나와 설교를 해야 하고 또 설교 준비를 하며 목회자로서의 임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국가가 목회자의 봉급을 지급하는 제도는 비성서적인 제도인 것입니다.
한편, “내가 하나님의 신령한 계시를 받았으니 헌금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악한 거짓말쟁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기입니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오순절파에 속한 목회자 중 오랄 로버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운 사람이었는데, 1977년에 믿음의 도성이라는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병원을 짓다가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빚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하니까 1980년에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가 빚을 다 갚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신장이 무려 270m이었다. 내가 어마어마하게 큰 신장을 가진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다 갚아 주시기로 하셨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빚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는 1987년에 다시 TV에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앞으로 1년 안에 800만 달러(한화로 80억에 해당하는 돈)를 모금하지 않으면 나를 죽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아주 못된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TV에 나와서 그런 간증을 하는 그에게 많은 오순절파 교인들이 헌금을 보내어 2년이 지난 1989년도에 8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다 갚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이 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 그 사람 능력 있다!”고 할 것이지만, 저는 병원을 짓지 않는 것이 낫지 이런 거짓말로 성도들에게 영적인 사기를 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병원이 하나 지어졌을지 모르지만, 그는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헌금을 내지 않으면 성도를 죽이실 수도 있는 분’이라는 악한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모세가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건설하기 위한 헌물을 1년 내에 다 가지고 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 것이라”고 말했다면,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창세기 25장을 읽으며 성경을 덮어버릴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나 헌금의 기본적인 원리는 자원함으로 넉넉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Ⅱ. 성막건설을 위해 드리는 재료(3~7절)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출 25:3~7).
성막 예물은 금, 은, 보석으로부터 시작해서 각종 진귀한 베실과 가죽, 향품 등 최고급 재료들입니다. 이것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유한 물건 가운데 가장 좋은 물품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성막을 건설하는데 최고급 재료를 사용해야 할까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고급 재료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400년 이상이나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광야에서 이런 고급재료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이 재료들의 출처가 어디인지 출애굽기 3장 20~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하나님은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패물을 요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웃집에 가서 패물을 달라고 하면 주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35~36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하는 대로 다 주었을까요? 그것은 열 번에 걸친 재앙으로 말미암아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 집의 장자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집집마다 장남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재앙이 무서워서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때리시고 겁박해서 재물을 빼앗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런 차원으로 이해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430년 동안 임금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일한 임금이 이보다 많으면 많았지 절대로 적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물품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련해 주신 것들입니다. 이후에 성막을 건설할 준비로 애굽 사람들의 패물들을 모아 광야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전도서 2장 26절에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이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면 하나님이 그것을 하나님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로 옮겨 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재물을 모으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신약시대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원리는 동일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에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명을 주셨고, 가정을 주셨고, 직업을 주셨고,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것뿐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10~11절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지어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농부가 노력해서 얻은 것입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심을 씨앗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씨앗은 작은 것이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씨앗을 만들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컴퓨터로 씨앗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모기 한 마리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생명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농부가 노력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할지라도 씨앗과 비와 햇빛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힘으로 번 것을 왜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느냐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그 일부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드리는 것이 원칙이고, 적게 받은 사람은 적은 것을 드려도 하나님이 크게 보십니다. 마가복음 12장에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예수님은 이 사람들 가운데 가장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누구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갖은 노력을 다 하는데도 굶어죽는 사람이 있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우리의 마음 상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께 헌신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정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넉넉하게 드리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28세에 예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항상 돈이 없었습니다. 술집에 가서 탕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니까 십일조를 드리고 선교헌금도 드리고 각종 헌물을 많이 드렸는데도 술집을 다닐 때보다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왜 자꾸 십일조를 내라고 하느냐?”고 묻기 전에 자기 쾌락을 위해 쓰는 돈이 얼마인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제 경우는 술집을 다닐 때 항상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아무리 드려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Ⅲ. 성막건설을 위해 헌물을 드려야 하는 이유(8~9절)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 25:8~9).
도대체 성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성막을 위해 예물 드릴 것을 명하셨고,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헌물을 드렸을까요?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가지 큰 의미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첫째, 성막은 하나님이 지상에 특별히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편재하시는 분이시지만 성막에 특별히 거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거하실까요? 구름같이 거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0장 34~35절에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완공하고 하나님께 봉헌할 때에 구름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 구름은 ‘영광의 구름’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쉐키나’(Shekinah)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임재하시며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는 곳이 바로 성막입니다.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둘째, 성막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하는 중심지(Center of Worship)입니다. 성막에는 찬양이 있고 기도가 있고 희생제사가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귀중한 곳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반드시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막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의 보좌가 있는 ‘궁전’(Palace)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보좌는 하늘에 있지만 하늘 보좌의 지점이 바로 성막입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이스라엘과 열방의 모든 민족을 통치하십니다.
다윗이 솔로몬 성전을 위한 예비를 마친 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대상 29:1). 여기 ‘전’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궁전’을 의미하는 ‘Palace’로 쓰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왕이 거하는 처소를 의미합니다.
또 역대상 29장 11~12절에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보좌에 앉으셔서 부하게 할 자를 부하게 하시고, 귀하게 할 자를 귀하게 하시며 크게 할 사람을 크게 하시고 낮출 사람은 낮추시며 강하게 할 자는 강하게 하시고 약하게 할 자는 약하게 하셔서 만유를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넷째, 성막은 하나님과 죄인들이 화목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죄인들이 와서 희생제사를 드리며 제물의 피를 여호와께 드리면 하나님이 그 피를 보시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매일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죄인이다. 내게 함부로 오지 마라. 그러나 너희가 희생제물을 가지고 와서 피를 바치면 내가 그 피를 보고 너희 죄를 용서한다”, “너희를 위해 이처럼 희생제물이 될 메시아가 올 것이다. 너희는 그 피를 의지하여 죄 사함을 받고 그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매일 예표로서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출애굽기 25장 9절에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자 하는 죄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화목의 방식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타 종교인들의 열렬한 종교심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타 종교인들은 자기들이 정한 방식대로 각자의 신에게 접근하는 반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은 죄인들의 대속제물이 피를 흘려야 하고, 하나님이 그 피를 보시고 만족하셔야만 죄인들이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 피를 흘리셨고,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만족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사람들의 죄를 그 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피로 죄를 사해주시도록 간구하고, 믿음을 보이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 사함과 화목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막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막과 신약시대의 예배당은 의미의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막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예표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은 건물이고,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점에서 의미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성막과 오늘날의 예배당은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중심지라는 것과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예배당은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 와서 예배도 하고 성경공부도 해야 하지만 놀기도 하고 운동도 하며 교제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이 성도들과 우리 후손들의 삶의 센터, 즉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센터가 지어져야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더욱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건설에 헌신했듯이 우리 모든 성도들도 예배당 건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헌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출애굽기 25:1-9 / 피영민 목사
서 론
출애굽기는 총 40개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첫째는 애굽의 노예가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는 ‘출애굽 사건’(Exodus)에 대한 내용이고, 둘째는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기록해 둔 ‘하나님의 율법’(Law of God)과 이 율법을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내용인 ‘언약의 서’(The Book of Covenant)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해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인 25~40장까지의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어는 ‘장막’이나 ‘회막’으로도 번역되는 ‘성막’(Tabernacl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계속 출애굽기 강해를 해 나가면서 성막이라는 단어로 통일하여 사용하고자 합니다.
25~31장까지는 하나님이 시내산 꼭대기에서 모세에게 성막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성막의 식양에 대해 계시해 주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고, 32~34장까지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돌비와 성막에 대한 계시를 받고 내려오다가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와 그 앞에서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는 모습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35~38장까지는 성막을 식양대로 제작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39장에는 성막이 완성되고, 40장은 이 성막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 25~40장까지는 32~34장까지의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성막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Ⅰ. 성막은 왜 중요한가?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성막에 관한 기록이 성경에서 차지하고 있는 분량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장 가운데 총 50개장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13개장, 레위기 18개장, 민수기 13개장, 신명기 2개장과 신약성경 히브리서 4개장을 모두 더하면 50개장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성막에 관한 기록이 성경에서 차지하고 있는 분량만 봐도 성막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출애굽기 25장 8절에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막은 ‘하나님이 지상에 거하시는 임시처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지상에 오시면 어디에 거하실까요? 성막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내가 거할 처소를 짓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출애굽기 39장에 완성된 이후 약 480년 동안 사용되었습니다.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교체되었습니다. 열왕기상 6장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년 시브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한 것은 B.C. 970년경입니다. 아버지 다윗이 즉위했을 때가 B.C. 1010년이고, 거기서 40년을 제하면 B.C. 970년이 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 만에 성전건축을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B.C. 966년에 성전건축이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480년 전에 출애굽이 시작되었으니 출애굽 사건의 연대는 B.C. 1446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은 성전이 건축되기까지 약 480년 동안 하나님이 지상에서 거하시는 임시처소가 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이유로 성막의 모든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8장 5절에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성막을 지은 것이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계시 받은 성막의 설계도는 모두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실체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막의 실체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가복음 24장 27절에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데 이는 모두 자기에 관한 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글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신약이 숨겨져 있고, 신약은 구약을 완성하고 설명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은 예표이자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이 중요한 것인데, 특별히 구약성경에서도 성막의 모든 구성요소가 예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성막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실체를 비교연구하면 더욱 분명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구약의 예표를 가지고 신약의 실체를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이후 르비딤에 이르러 물이 없다고 불평했을 때 모세가 반석을 쳐서 생수를 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는 반석을 쳐서 생수가 나온 것처럼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치셔서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생수를 공급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히브리서 10장 20절에도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던 휘장이 그리스도의 육체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것은 대제사장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예표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표로서 설명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이 신약에서 모두 실현되었으므로 신약성경의 내용만 잘 알면 된다”는 주장은 엄청난 오류입니다. 구약의 예표를 알아야 신약의 실체를 알 수 있고, 신약의 실체는 구약의 예표를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표는 영어로 ‘Type’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상징’(Symbol)입니다. 특별한 형태의 상징을 가리킵니다. 상징과 예표는 다른데,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시고, 문이시고, 떡이시라”는 것을 상징이라고 하고 예표라고는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표도 상징이기는 한데 특별한 상징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어떤 사람이나 사건, 사물이 신약에 나타날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그림자일 경우 그것을 예표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Ⅱ. 예표의 여덟 가지 특징
첫 번째 특징은 반드시 ‘미래적인 요소’(Future Reference)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훗날에 예표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속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을 예표라고 합니다. 성막이 예표가 되는 이유는 미래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반드시 역사 속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실존했던 인물, 또는 사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표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39~4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요나에게 “너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지만 요나는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원수국가이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하나님이 보내신 풍랑으로 말미암아 배가 파선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풍랑의 원인을 찾던 중 배 밑창에서 잠자고 있던 요나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를 바다로 던지게 됩니다. 마침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신 하나님이 요나를 그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물고기 위 속에서 소화액으로 말미암아 녹아 죽어야 마땅한 요나를 하나님이 소화액을 분비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니느웨 가까운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목숨을 부지한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헛소리가 어디 있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땅 속에 들어가셔서 삼일 간 계시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오실 육신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표는 반드시 역사적인 사건이라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에돔 땅을 거쳐 가려다가 그들이 허용해 주지 않아서 주변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한 백성들이 40년 동안 만나를 주신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괘씸하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부르짖었고, 모세가 백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명을 따라 장대 위에 매달린 놋뱀을 본 자는 깨끗하게 나음을 입었지만, 쳐다보지 않은 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게 될 것과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받게 됩니다. “나는 그런 것 믿지 않는다”고 하면 자기 죄를 지고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으면 보고 믿으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놋뱀 사건입니다. 놋뱀 사건은 예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체인 것입니다. 이 예표와 실체는 역사 속에 뿌리를 가진 사건이라야 합니다.
세 번째 특징은 예언적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 4절에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사장 되심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본디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 나올 수 있는 일인데, 유다지파의 예수님이 어떻게 제사장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레위지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고 그를 축복한 제사장입니다.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반차에서도 제사장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예언한 것이 바로 창세기 14장의 살렘 왕 멜기세덱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내용은 레위지파가 아닌 곳에서도 제사장이 나오는데 그 분이 바로 메시야가 되신다는 예언인 것입니다. 예표는 예언적입니다.
네 번째 특징은 예정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를 예정에 따라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예정된 계획을 따라 역사를 운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에 대해 지나치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한다고 고민한대로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역사는 계획 없이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정이라고 하면 성질부터 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획도 없이 움직이셔야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예표라고 하는 것은 수백, 혹은 수천 년 뒤에 그 실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예표를 주신다는 것은 수백, 혹은 수천 년 뒤에 그 실체를 보내실 것을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시는 분이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어로 예표는 ‘Type’이라고 하고, 실체는 ‘Antetype’이라고 합니다. ‘Antetype’은 ‘원형’이라고도 번역이 되는데, ‘예표’가 있으면 ‘원형’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실체를 예정해 놓지 않으셨으면 예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표는 하나님이 예정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된 것입니다.
다섯 번째 특징은 실체가 예표보다 더욱 우월하고 분명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캄캄한 방에 촛불을 켜 두고 그 앞에서 손으로 그림자를 만들며 놀았습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새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토끼를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이것은 모두 손으로 장난한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실체는 예표보다 더욱 분명하고 우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 양은 예표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 양보다 훨씬 우월하고 분명하신 존재인 것입니다.
여섯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하면 말씀에 근거가 있고, 요나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한다고 했을 때도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말씀에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경우 그것을 예표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할례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치르는 이 할례 의식이 유아세례의 예표라는 근거가 신약성경에 없습니다. 신약성경 어디를 읽어봐도 ‘유아세례’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 어린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었으니까 신약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유아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예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주장입니다. 예표와 실체를 바르게 연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유아세례를 베푸는 장로교 목사가 아니라 신자의 침례를 주는 침례교 목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장로교 간판을 걸어야 부흥이 된다고 말을 하지만, 저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예표와 실체가 전혀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구약의 할례는 신약에 ‘마음의 할례’를 예표한다고 보아야 정확합니다. 로마서 2장 29절에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즉, ‘중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할례는 신약시대의 중생을 실체로 삼는 예표라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고 성경적입니다. 구약의 할례가 유아세례와 연결된다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성경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장로교회는 아주 좋은 교회입니다. 침례교와 90%이상 동일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할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는 유아세례를, 침례교는 신자의 침례를 주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특징은 비슷하지만 차이점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예표이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실체이십니다. 히브리서 7장 23~26절에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여러 명이지만 신약의 제사장은 한 분이십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요? 구약의 제사장은 모두 다 죽기 때문이고, 신약의 제사장은 죽지 않기 때문에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차이점을 통해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표의 여덟 번째 특징은 구약의 모든 예표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구약의 모든 예표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에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한 것은 구약성경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표 없이 실체를 이해할 수 없고, 실체 없이 예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Ⅲ. 성막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세 가지 면
첫째, 성막의 위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군할 때에 40년을 살았는데,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성막도 일종의 텐트입니다. 그런데 성막은 백성들의 진영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막 가장 가까운 곳에 레위 지파가 있었고, 동남서북으로 세 개 지파씩 흩어져 텐트를 치고 머물렀습니다. 동쪽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 서쪽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 북쪽에는 단, 납달리, 아셀 지파입니다. 열두 지파가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정착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동할 때는 어떻게 행군했을까요? 맨 앞에 법궤가 있고, 동남서북 순으로 행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운데는 고핫 자손들이 지성소의 기구들을 어깨에 메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막이 이스라엘의 진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의 삶과 교회의 중심에 서 계셔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삶에 중심에 계십니까? 어떤 분은 졸리거나 피곤하면 교회를 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조금 더 수면을 취하는 것보다 못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주일에 골프 치러 갈래? 교회 갈래?”하면 고민도 하지 않고 골프를 치러 갑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아주 먼 변두리로 밀려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삶의 중앙에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자식이 중앙에 있는 사람도 있고, 돈이나 쾌락이 중심에 있는 사람도 있고, 자존심이 중앙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의 삶, 그 중심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자기가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에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중심은 목사가 아닙니다. 제가 이 교회 중앙에 있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 교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장로님, 권사님도 중심이 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교회의 중심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 중심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어납니다. 담임목사나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중심이 되면 그 때부터 교회는 온갖 문제로 홍역을 앓게 됩니다.
성막이 이스라엘 진영 중앙에 있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에 계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2절에도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종들을 붙잡고 교회에 임재해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찬양대를 하고 예배 중간에 일어서서 나갑니다. 왜 나가는지 물어보면 결혼식을 가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결혼식만도 못하신 분이십니까? 예배에 임재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주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해 계신 예배시간은 매우 소중한 시간입니다. 만홀히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막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성막에 거하시며 백성들을 만나주셨을 뿐만 아니라(Meet) 그들에게 말씀하시고(Speak), 그들의 제사를 받아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Forgive). 그러면 신약시대에 어떻게 하십니까?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만나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죄 사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막에서 하셨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막의 모든 기구와 시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성막은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문이 동쪽으로 한군데만 열려 있습니다.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문이 하나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문이 되신다는 의미이고, 번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예표하고, 물두멍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야 함을 예표합니다. 성소 안쪽으로는 떡상과 분향단과 촛대가 있는데, 떡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생명의 떡임을, 분향단은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촛대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또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도 그리스도의 육체를 예표하고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법궤 위에 시은소도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예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성소의 모든 기구와 시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하나님은 모세가 마음대로 성막을 건축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시내산 꼭대기에서 보이신 식양 그대로 건축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가 보니 건축을 하면 이 사람 저 사람 참 말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골프 연습장에서도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배운지 3일밖에 안 된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모두 전문가인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도 얼마나 자기 뜻대로 하고 싶었겠습니까? 이렇게 짓는 것이 튼튼합니다. 저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여준 식양대로 지을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도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막의 모든 요소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성막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고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원자로 알고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예배하며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아 의를 받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 분을 창조주요, 구원자로 알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우리 모두 진실로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막 건축에 대한 명령
출 25:1-9 / 박덕기 목사
출 25-31장은 모세가 사십 주야를 시내 산상에 머물면서 받은 성막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 부분은 성소를 어떻게 지어야 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성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느냐 하는 계시인데, 얼핏 보면 성경 중에서 가장 흥미 없는 부분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부분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여기에 구속의 진리가 놀랍게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는 데는 단 6일을 요하셨지만, 성소의 설계를 모세에게 지시하신 데는 40일이 걸렸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성소에 나타난 계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단 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계시는 모두가 모형이나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뜻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앞으로 여러 주일에 걸쳐 이 성막 제도에 게시된 놀라운 구속의 진리들을 함께 상고하면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막 제도 규례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성막 건축을 위해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쳐야 할 예물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3절 이하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막을 건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 건축을 위한 예물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지 자신이 이스라엘의 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성들에게 예물을 강요하고 계신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물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들이 소유한 재물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위해 그들에게 임시로 맡기신 자신의 소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물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어디서 난 것이었습니까? 그들의 노동과 수고로 얻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출애굽 직전까지 애굽에서 종살이하였고 지금은 황량한 광야에 있습니다. 그러니 어디서 재물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소유한 재물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할 때 애굽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금 은 보화를 다 주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것은 근본적으로 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물을 바치라고 명령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그들이 가진 예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당연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넘치도록 예물을 바쳤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가진 것을 요구하시면 기꺼이 바쳐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진 것 또한 본래는 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가진 것은 우리의 노력의 대가로 얻은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본래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노력할지라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단 한 순간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몸, 물질, 시간, 지식, 재능 등은 모두 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들을 바치라 할 때, 우리는 그것의 본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바쳐야 합니다.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바치라 하시면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송명희 시인은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바치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이삭이 자신의 아들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 자세가 요청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을 하나님의 요구가 있을 때 하나님께 기꺼이 바쳐 드릴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것과 같이 더 큰 은혜의 축복으로 우리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막 지을 예물을 가져오게 하라고 하시면서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고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예물을 드릴 때 어디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물 자체나 그 예물의 양보다는 그 예물을 드리는 자의 마음에 더 관심을 두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예물을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 부족하거나 재물을 탐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친히 지으신 분으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예물을 요구하시는 것은 그 예물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이 은혜에 감사하기를 원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바치는 예물 그 자체나 예물의 양보다는 그 예물을 바치는 자의 마음 자세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많은 예물을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억지로 드리는 것이라면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적은 것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귀감이 된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해서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왔는데, 이는 그들에게 자원하는 즐거운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또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특히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한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물을 드릴 때는 결코 사람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예물을 드리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망각하면 자칫 예물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바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으로 드리는 예물임을 꼭 기억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여 예물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7절을 보면 성막을 짓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의 종류가 나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막 제도가 그러하듯이 여기에 나오는 성막의 재료들 또한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거나 상징합니다. 예를 들면 금은존귀하신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고, 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속전으로 사용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 30에 팔리실 것을 예표하고, 놋은 십자가에서 심판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청색실은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자색실은 통치자가 입는 옷으로 만왕의 왕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홍색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고, 가는 베실은 흰실로서 성결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염소 털은 아사셀 염소 곧 버림받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은 피 흘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해달의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이렇듯 성막에 쓰인 재료들은 어느 것 하나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한 것과 같이 성막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39권입니다. 이 모든 성경이 가르치고 증거 하는 핵심의 내용이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히 10:1절에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참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목적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믿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단(異端)이란 말은 한문으로 끝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저들이 처음 시작할 때는 비슷하게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끝이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예수를 부인하는 여호와 증인, 참 감람나무라는 박태선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끝에 가서는 다른 것입니다. 통일교의 문선명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리고 요즘 많은 성도들을 미혹하는 신천지 이단 집단도 그들의 교주 이만희를 가리켜 보혜사라고 하고 주님이라 아버지라 부릅니다. 여러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듯이, 성막도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구약의 성막을 확대해 놓은 것이 신약의 예수요, 신약의 예수의 생애를 축소시킨 것이 성막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막 전체는 예수님에 대항 상징 혹은 예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아야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만 진리의 광맥을 발견하여 참된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짓기 위해서는 많은 예물이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동일한 수준에서 예물을 준비하여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 동일하게 드리도록 명령하셨더라면, 가난한 자들은 결코 즐거운 마음으로 예물을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예물들을 말씀하시면서 각자의 형편에 맞게 가지고 있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형편에 따라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는 모든 재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의 형편을 고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도 동일했습니다. 번제든 소제든 화목제든 그 어떤 제사에서도 제사를 드리는 제주가 하나님께 드릴 예물은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형편에 따라서 사람들은 소나 양이나 비둘기로 제물을 삼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제물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주가 드리는 제물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제물은 흠과 티가 없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많고 적음이나 귀하고 귀하지 않음 등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오직 제물이 온전한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어떤 이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받은 만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정성이 담긴 온전한 예물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것 중에 일부를 하나님께 바친 부자보다도, 비록 두 렙돈 밖에 안 되는 적은 것이었지만 정성들여 생활비 전부를 드린 과부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대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온전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8절에 보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가리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소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회막이라고도 합니다. 레 1:1에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이 회막에서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세를 만나셔서 뜻을 전하시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매개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라도 용납지 못할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를 구별하시고 특정한 사람들을 성별하여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스라엘은 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저와 여러분 또한 참으로 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인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형제를 잘 만나야 합니다. 또 남편을 잘 만나고 아내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친구를 잘 만나야 합니다. 스승을 올바로 만나야 합니다. 동업자를 잘 만나야 하고, 직장을 잘 만나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잘못 만나게 될 때에 인생의 실패자가 되고, 잘 만났을 때 성공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만남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이 세상에서의 나의 환경이 바꿔집니다. 설사 그 환경이 어려운 상황이라도 극복합니다. 또한 나의 잘못된 만남을 선한 것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역경을 순경으로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 33:12에 보면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복중의 복은 인생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 분이 주시는 양식을 먹고 그 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의 건축을 명하시면서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역을 예표하는 성막을 건축함에 있어서,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완전히 배제시키신 것은, 바로 그 구원 사역이 그 누구의 간섭이나 참여도 배제된 완전한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신 단독 사역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여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단독 사역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의 남은 모든 생애 동안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소를 지으라 하실 때 그들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지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보이는 식양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지을 때 자기들의 계획과 판단에 따라서 지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신 대로 실행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판단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결코 인생들로부터 만홀히 여김을 받으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섬기는 방법까지 세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성경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부지런히 배워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이 거하실 성소를 지으라고 명하실 때 “즐거운 마음으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원소유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되,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위하여 우리의 가진 것을 요구하실 때에는 자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드립시다. 특별히 우리 교회는 성전 신축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자신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을 수 있는 기회로 알아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봉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열납하시며 그것을 통해 큰일을 이루시고, 여러분과 자손만대에 영육 간에 큰 복을 내려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막 공부의 필요성
출 25장부터는 모세가 사십 주야를 시내 산상에 머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막 제도에 대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성소를 어떻게 지어야 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성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느냐 하는 말씀인데, 얼핏 보면 성경 중에서 가장 흥미 없는 부분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부분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여기에 구속의 진리가 놀랍게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는 데는 단 6일을 요하셨지만, 성소의 설계를 모세에게 지시하신 데는 40일이 걸렸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성소에 나타난 계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단 번에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계시는 모두가 모형이나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왜 우리가 성막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건강일까요? 돈일까요? 행복일까요? 이런 것들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사형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나 돈이나 행복이 아니라, 우선 살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그냥 버려두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우선 구원받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보아야 합니다.
어느 수필 이야기입니다. 어느 총각이 한 처녀를 너무나 사랑하여 매일 편지를 보냈습니다. 365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우체부가 매일 편지를 날라다 주러 가서 그 처녀를 365번을 만났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 처녀가 우체부와 결혼하였습니다. 만남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엔진이 고장 난 비행기는 우선 안전 착륙을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지금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이 아닙니다. 고장 난 인간입니다. 고장 난 자동차는 정비공을 만나야 하듯이, 고장 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냐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삶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행복만이 깃들어 있었고, 죄가 무엇인지를 몰랐고, 저주와 관계가 없었고, 병이 어떤 것인지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인간은 마귀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같이 고장 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만 고쳐질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의 변동의 역사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입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돌 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모세 이후에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성막에서 사람을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완성시키던 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내가 명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성막이란 본래 단어 ‘미쉬칸’이란 뜻은 거처한다는 말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기에 성막 공부를 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성막이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대답하면 ‘성막이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약도’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중심은 오실 예수, 신약의 예수는 오신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의 중심은 예수입니다. ‘헨리 홍’이란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어린 딸에게 성경을 매일 읽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성경을 읽던 딸이 “아빠! 너무 두꺼우니 요약 좀 해주세요.”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약 한 달간 요약해보니 결국은 ‘예수’ 두 글자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한 것과 같이 성막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구약의 성막을 확대해 놓은 것이 신약의 예수요, 신약의 예수의 생애를 축소시킨 것이 성막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몸이 찢어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히브리서 기자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희 육체니라”라고 성막과 예수님을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흠없는 짐승을 성막으로 끌고 와서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켜 죽임으로 죄사함 받았던 제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예표 합니다.
노르웨이 어떤 마을에 있는 교회 종탑에는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까지 조각되어 있다고 합니다. 관광객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교인 한 사람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다가 건축비가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기술자들을 보내고 자기들이 직접 건축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높은 종탑위에서 한 교인이 떨어졌습니다. 실수였습니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때 마침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교인은 양위에 떨어져서 양이 죽고 그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말했습니다. “아! 양이 죽어야 사람이 사는구나! 그렇습니다. 양이 죽어야 사람이 삽니다. 이것이 구약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구약을 의미하는 양과 신약을 의미하는 십자가를 동시에 종탑에 장식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같이 성막에서 짐승의 죽음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일치합니다. 그렇기에 성막을 공부해야 십자가의 뿌리를 알 수 있습니다.
3. 성경에서 50장이 성막에 대한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서 13장, 레위기에서 18장, 민수기에서 13장, 신명기에서 2장, 히브리서 4장, 모두 50장이 성막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모르면 성경에서 많은 부분에 무지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단일 주제로 최고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성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막을 공부해야 합니다.
4. 성막은 죄인의 구원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너무나 귀한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다음 몇 가지의 이유에서입니다.
1)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주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캄캄한 방에서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죄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을 도저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막 안에서 죄악 된 우리를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입니다. 그리고 상막을 본 자는 예수님을 본 자입니다. 성막이 곧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3)하나님께서 죄인들과 말씀하시는 장소입니다. 레 1:1에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이 성막은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 같이 대화하는 너무나 흥분된 곳입니다. 어느 날 한 사림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내게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지금 당장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그 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하나님을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소. 난 방금도 하나님과 30분을 대화하였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늘 죄인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성막입니다.
4)하나님이 죄인을 받아 주시는 장소입니다. 레 1:4에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받으시는 모습이요 방법입니다. 자동차는 네 바퀴 위를 굴러 가지만 복음은 두 바퀴 위를 굴러갑니다. 하나의 바퀴는 “누군가가 죽어야 누군가가 산다.” 다른 하나는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입니다. 구약은 흠없는 짐승이 죽고, 신약은 흠없는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막에서 짐승이 죄인 대신 죽음으로 죄인이 하나님께 용납되었습니다.
5)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엡 1:7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죄인은 성막에서 제물을 드렸고, 하나님은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받았다는 영수증입니다. 성막의 번제단에서 불이 타오를 때 이는 바로 용서의 표징이었습니다. 이같이 성막은 죄인이 구원받은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죄인이 구원받은 유일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5. 성령이 인도하시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철저한 성령의 인도, 가장 분명한 성령의 인도는 성막의 인도였습니다. 성막이 완성된 후 바로 성막에 구름기둥이 임하였습니다. 출 40:34-38에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으며, 구름이 성막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 생활하면서 “자 이제는 그만 가자! 여기서 오래 머물렀으니”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천부장 회의에서 떠날 날짜를 다수결로 정한 것도 아닙니다. 또한 12명의 족장 회의에서 타협을 본 것도 아닙니다. 교회라는 하나님의 공동체는 민주화되면 안 됩니다.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좀 더 쉬고 싶어도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가야했습니다. 좀 더 가고 싶어도 구름 기둥이 머물면 멈추어야 했습니다. 풀밭에 매어 놓은 소가 그 끈을 반경으로 풀을 뜯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벗어날 수 없듯이 지금은 성령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성령을 거슬려도 안 되고 성령을 훼방해도 안 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하고, 성령 안에서 찬송해야 하고, 성령으로 말씀도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고 예수만 붙잡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성령에만 의지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6. 신앙생활의 전체를 한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막의 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배우고, 번제단에서 우리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배울 수 있습니다. 등대에서 우리의 사명을 배우게 되고, 떡상에서 말씀의 축복을 배우게 되며, 분향단에서 기도를 배우고, 법궤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의 부활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의 전체요 성경의 전체입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의 완벽한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막 공부는 균형 잡힌 신앙생활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좋은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모형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형을 통하여 수많은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구리 뱀을 높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본 이들은 구원을 받았고, 보지 못한 이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문설주에 피를 발라 구원받았습니다. 이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모형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예수님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희생 제물입니다. 흠없는 짐승이 안수를 통하여 죄를 전가 받아 죽는 모형은 가장 정확하고도 분명한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8. 복 받는 길을 정확히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말씀하신 첫 선포는 축복의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와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복되게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공부하게 되면 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또 그 복을 찾는 비결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용서받는 길이 번제단 안에 숨어 있고, 은총을 얻는 길이 물두멍에 들어 있고, 축복과 응답을 받는 비결이 분향단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막을 공부해야 합니다.
9. 영혼의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고장은 병원에서 진단하여 고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의 고장은 성막을 통해서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부터 공부하면 영혼이 어디가 고장 났는지 영혼의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막의 문에서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가? 번제단에서 나의 죄를 예수 피로 속죄 받은 것을 확실히 믿는가? 용서받은 의인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물두멍에서 나는 죄를 버린 후 성결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중생하고 지은 죄의 사슬을 끊었는가? 촛대에서 나는 빛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가? 떡상에서 나는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분향단에서 나는 기도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는가? 법궤에서 나는 말씀 속에서 살려고 애쓰고 있는가? 나는 죽은 나무에게도 싹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는가? 나는 주님을 통하여 부활할 것을 믿고 있는가? 이같이 성막 공부를 하면 영혼의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막 공부를 해야 합니다.
10. 하나님의 일군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알면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성막을 공부하면 성경의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 어설프게 예수를 알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고 예수를 분명히 안 다음부터 베드로는 예수님께 모두를 다 드릴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을 때까지 그는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성막은 예수님을 너무도 분명히 가르쳐 주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게 해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얼핏 보면 성경 중에서 가장 흥미 없는 부분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성막에 관한 부분을 왜 우리가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왜 우리가 성막을 공부해야 합니까? 성막 공부를 통하여 1)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고, 2)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게 되며, 3)성경에서 50장이 성막에 관한 기사이기 때문에, 4)성막은 죄인의 구원의 장소이기 때문에, 5)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6)신앙생활의 전체를 한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7)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좋은 모형이기 때문에, 8)성막은 축복 받는 길을 가장 정확히 알려 주기 때문에, 9)성막은 영혼의 종합 진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10)성막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막을 공부하는 동안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시기를 바라고, 그리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주님께 충성을 다 바쳐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성막의 진정한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막 건축 준비
출 25:1-9 / 임덕순 목사
출애굽기의 절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실 수 있는 집을 짓는 일입니다. 그 집이 바로 성막입니다. 이스라엘이 과거 애굽에서 살 때에는 애굽 사람들처럼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 우상은 사람들이 작은 집을 만들어서 거기에 넣어둘 수가 있었고 가지고 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하던 우상과는 영 달랐습니다. 그분은 너무 크시고 소멸하는 불이십니다(히12:29)
그분 앞에 서는 자가 티끌만한 죄만 있어도 태워버리는 분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갔을 때 산 아래서 보니까 온 산이 불붙는 것 같았고, 천둥번개가 온 산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불에 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화산이 터지는 불 속에 들어가서도 죽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너무 두려워했고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굉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로 와서 계시겠다고 하면서 그 집을 지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지어야 그 두려우신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가 있을까요? 철로 지어야 할까요? 아니면 돌로 피라미드같이 지어야 할까요? 그런데 예상외로 하나님은 텐트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지금 여행 중이어서 텐트 속에서 자고 아침이면 그것을 거두어 짊어지고 또 여행을 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집도 텐트 형식으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출25:-27: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을 어떻게 지을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그 성막을 짓는 자재와 그 조달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신 부분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지어야 하는 성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자재는 어떻게 조달하였으며, 그것으로 성막을 지을 때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이 성막은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성경은 66권이고 신구약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실상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책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5:39) 라고 하신 말씀은 구약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기다리게 하는 책입니다. 히1:1“옛적에 우리 조상들로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로 친히 말씀하셨으니” 라고 하여, 계시가 점진적으로 구체화되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발전했지요? 구약성경을 한번 더듬어 보십시다.
구약에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예고하는 그림자들이 너무나 많지만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생각해 보십시다.
창세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그림자 중에 대표적인 것은 가죽옷입니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께 죄짓고는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나뭇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었지만 금방 말라 부스러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가서 책망하시고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주셨습니다. 짐승 한 마리를 죽여 그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가죽 옷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서는 죄 없는 희생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민수기에서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은 광야에서 높이 들렸던 놋 뱀인데, 원망하는 죄 값으로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처방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한 그 뱀 모양을 만들어 높이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방법은 죄인 모습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계시하지만, 상징과 그림자들로 하시기 때문에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대가 지나며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시대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 활동했던 사사들과 선지자들은 구체적인 말씀으로 예언하였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 22편이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이사야7장이나 53장 등은 그리스도가 짊어지실 십자가에 대하여 얼마나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몇 구절만 읽어볼까요?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리스도가 남자를 모르는 처녀를 통해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직접 예언입니다.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실 절규를 그대로 예언하였습니다.
시 22:15-18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이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이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부끄러움과 고통을 당하실 것이라고 천년 전의 다윗이 자세히 예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분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들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요 희미한 그림자이며 예고편이지만, 신약은 그 예고대로 이루어진 분명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 신구약은 동일한 그리스도에 관한 책,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 중에서 성막보다 더 분명한 예언은 없습니다. 성막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분과 그 사역에 대하여, 얼마나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예언하는지 놀랄 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성막은 회막, 증거막 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거룩한 천막이라는 뜻에서 성막, 하나님과 만난다는 의미에서 회막, 거기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다는 의미에서 증거막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 성막의 양식과 재료와 규격과 등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동식 텐트인 회막은 나중에 고정식 건물인 성전으로 바뀌었고, 그 성전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성되었는데, 성막, 혹은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혹은 방법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하나님께 인도하러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고,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이 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라고 하신 것은 자신이 참 성전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주님을 예언했는데,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인간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이시고, 인간을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려고 오신분이 그리스도 이십니다. 임시 건물을 짓고 잠시 찾아가 하나님을 만났던 성막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제사만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막의 재료와 모양과 배치까지도, 모든 것이 어쩌면 그렇게 그리스도를 잘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음주일부터 이 성막을 배우면서 신약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막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헌납 받아 준비하는 과정을 공부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재를 지정해 주시며 그것으로 지으라 하셨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즐거움으로 헌물을 내는 것만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러 저러한 물건들을 바치라고 명령하게 하셨고,
명령을 받은 자 중에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것만 받으라 하셨습니다.
3절부터는 성막을 건설하기 위하여 백성들로부터 받아야 할 물품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입니다. 7절까지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위에서 읽은 대로 하나님은 성막을 짓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일러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진귀한 보석도 있고 별로 진귀하지 않은 실도 있었습니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어디에 쓰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막이 다 완성되었을 때, 자기들이 바친 그 작은 것들이 얼마나 귀하게 쓰였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들이 바친 색실로 지성소와 성소의 천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자기들이 낸 금으로 법궤를 감쌌습니다. 그들이 작은 조각들을 바칠 때는 그것이 무엇에 쓰일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것들이 하나씩 제 위치를 찾게 되었을 때 상상할 수 없는 귀한 용도로 쓰였습니다.
우리도 가진 것이 별것 아니고 아무 쓸모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재능도 지식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순종하면 아주 아름답고 거대한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집을 지으라 하시면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것처럼, 최고급 자재를 내려주시고, 그것으로 지으라고 하시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선 생각할 일은 은혜를 받으려면 무언가 봉사를 해야 합니다. 주님은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만날 처소, 자기들이 죄 사함 받을 장소를 짓는데 자기들의 물질을 들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으려면 당연히 돈을 낼 줄은 알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데는 공짜 의식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좋은 것을 기쁨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을 해 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이 바치라 하신 그 금이나 은이나, 혹은 다른 보물과 물건들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지요? 그들이 돈으로 산 것인가요? 애굽에서 해방되던 날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너희들에게 보물을 주면서 나가라고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보물을 주는 것은 고사하고 해방되어 나간다는 것조차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대로 유월절날 어린양 한 마리씩 잡아서 그 피를 바르고 고기를 구워먹고 있노라니까, 애굽의 장자들이 몽땅 죽었고, 애굽 왕이 항복하면서 어서 나가라고 명령했고, 애굽사람들은 자기 패물을 가지고 와서 이것을 가지고 어서 나가라고 재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얼떨결에 자기들의 주인들이 애지중지하던 보물들을 받아가지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 보물들은 사실 그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보물을 왜 그들에게 주셨을까요? 그들이 광야에 나와서 성막을 지을 때를 대비해서 가지고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가지고 있는 보물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막을 지을 때 쓰라고 맡겨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지요?
여러분에게는 그런 물질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너무 가난해서 우리의 것을 달라고 하실 분인가요? 그분이 여러분의 것을 달라고 하실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주제파악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까워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고, “아, 이때 쓰라고 우리에게 맡기셨구나, 참 신기하네, 하나님은 참 위대하시다.” 라고 헌납하면서 찬양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그러셨나요?
그동안 종살이하던 자기들이 만져볼 수도 없는 보물을 그동안 가지고 있게 하셨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건을 내어 성전을 짓는다는 것 자체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뿐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어 애굽을 이겨 주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의 백성을 삼아주시고 가나안에 그들을 위한 땅을 준비해 놓고 인도하신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축복이 아닙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도, 그들이 겪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도, 그들이 가지게 된 담대함도 계산 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닙니까? 죄인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보다 더 복된 특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쓰신다고만 하시면 자기 목숨이라도 내어놓아야 하는 것이 그들이었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 4:7절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너를 구별 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으면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처럼 자랑하느뇨”
저는 평신도로 봉사할 동안 세군데 예배당 건축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여사교회와 홍성중앙교회는 아주 어릴 때 벽돌 몇 장 날라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도 제게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년 때 서천읍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게 되었는데, 저는 목사님 다음으로 책임을 맡았고, 일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성전건축에 참여하여 헌신한 것이 이렇게 귀한 상을 받을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봉사가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것이 틀림없다고 나는 믿습니다.
두 주 전에 태국에 다녀왔습니다. 프라왔자나교회 헌당식을 하고 왔는데, 대부분의 태국교회는 한국교회가 다 지어주고 사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기분도 좋고 그들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열 살 넘도록 밥 먹여주고, 옷 입혀주고, 화장실 데리고 가고, 학교 데리고 가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태국선교를 하면서 지난 25년 동안 그렇게만 했습니다. 그들은 헌금할 만한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엇을 하든지 필요한 경비는 다 대주었습니다. 그 결과 태국교회는 선교사라면 돈 갖다 주는 사람으로 알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 탓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와 한국 선교사 탓입니다.
우리는 예배당 구입비용의 절반은 그들이 내라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낙담했고 성도들은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고, 태국교회를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선교사가 이해하고 힘껏 설득했고, 그들이 이해하고 참여했습니다. 그들이 자기네 교회라는 인식과 책임을 갖고 힘겨운 헌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나는 태국에서 일어나는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마 앞으로 큰 기적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자기 성전은 자기 돈을 내어서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돈 낸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이미 맡겨 두신 것입니다. 그것 알고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이고 그 일이 대단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가끔 국립공원에 갔다가, 절에서 기왓장에 이름을 써주면서 헌납하라고 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건축은 그렇게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성막을 짓는데 누가 금을 내고, 누가 판자를 냈다고 기구들과 천막에 새기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유도 할 것이 아니라, 너는 당당히 명령만 하고, 그 말씀에 감동되어 자원하여 내는 사람의 것만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과 나 자신 사이에 하는 것이지 누가 하라고 부추기거나 체면 때문에 해서는 안 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바라야지, 사람의 칭찬을 바라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평생을 살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대하고 그렇게 바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알려주신 대로만 지어야 했습니다.
9절을 보면,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재나 모양이나 치수나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일러주신 대로 해야지, 단 한 가지도 사람의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가져오는 물건들을 받아서 성막과 기구들을 제조하게 하였는데, 한 가지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여 주시고 그려주신 도안과 설계도대로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만든 것은 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용납되지 않으며, 우리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왜 모양과 치수까지도 다 정해주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멋진 의식을 가진 종교라 할지라도, 인간이 고안하여 만든 종교는 사람을 구원하는데 이르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을 마취시켜서 정치인이나 사기꾼에게 이용당하게 되어있습니다. 태국에 가서 불교와 정권이 어떻게 결탁되어 있는지 보시고, 영국에 가서 성공회와 영국왕실이 어떻게 결탁되어 있는지 모시면 알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보여 주신대로 그들이 만든 나뭇잎 옷으로는 부끄러운 몸을 가릴 수 없었고, 거친 환경으로부터 그들의 몸을 보호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가죽옷만이 필요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실 인류의 구주는 사람이 고안하여 세워놓은 조각품도 아니고, 사람들 중에 누구를 뽑아 세울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주는 오직 하나님만이 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죄 없는 분이 어디에도 없고, 인류를 대신할 만큼 존귀하신 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반역한 것이 근본이므로, 하나님께서 사하셔야 사함을 받으며, 그가 길을 열어주셔야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하인간에 우리를 구원할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일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주셨습니다.(행4:12)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것을 분명히 각인시키려고 성막도 하나님이 명하신 자재와 모양과 치수대로만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에 약속한 그리스도를 믿되, 말씀대로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여기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성막의 건조과정을 배우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구체적으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서 그분의 모습과 약속을 발견하면 그대로 믿어야만 그의 영이 우리 안에 역사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마다 거기서 우리 구주의 모습을 찾고, 그 약속을 발견하려 해야 하고, 진리를 발견하면 내 보배로 삼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축복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