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구조체가 진화하는 여정도 처절하다
신체적으로 열악한 인간은 정신, 즉 생각을 사용하여 만물을 지배하게 되었다.
생각이 복잡하고 정교할수록 신체도 또한 그에 따른 구조를 가지면서 진화한다.
그러자면 엄청난 마찰과 투쟁을 통해서만 생각이 보다 정묘해진다.
인간은 에고(행위하는 주체로서의 나)를 자신과 동일화함으로써, ‘개인의 의지력’를 사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동물에 비해 월등하게 한결 진화했고 . 그로 인해 창조계의 우위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빠진 함정은 바로 “행위하는 나(에고)”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즉 개체로서의 몸과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육체적 힘과 정신력이 강할수록 물질 세상에서 권력을 갖게 되고 그 힘을 극대화하려고 함으로써 더욱 에고가 강해진다.
행위하는 나(Doer I, 에고)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바로 “내가 존재한다.(I AM)”느낌이 먼저 존재해야만 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행위하는 나’는 지각에 드러난다.
그래서 보일 수도 알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존재한다.”라는 현존의 지각은 절대로 감각기관에 잡히지 않는다.
마치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존재한다”의 느낌(마하타트바)이 없이는 에고(아함타드바, 나는 행위한다. I do)도 없고 경험(찌따, 나는 행위를 했다,I have done)도 없다.
우리는 오직 지각할 수 있는, 변하는 에고와 경험(기억)에 의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불안할 수 밖에는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변하는 현상계를 ‘제행무상’이라 한 것일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활의 첫 일성은 “회개하라”였다. 히브리어로 그 말은 “돌아가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 말은 “본래의 나(I AM, 본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일단 마음의 시작, 즉 창조라는 신(I AM)의 릴라(놀이)의 시초인 “I Am현존”으로 회귀할 때 진정한 평안에 닿을 수가 있다.
분리가 없는 하나임의 본향(Home), 위에서 마음껏 에고와 경험, 물질이라는 대상 속에서 울고 웃으며 자유로운 춤을 추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이 아닐까? .
첫댓글 아름다워요. 우리의 존재와 그와 함께 추는 삶의 왈츠.
고마워요 샨티지~나마스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