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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 톨레)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 7가지 문
(요약)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 문
1) 내면의 몸-몸 안의 에너지 장을 전체적으로 인식
2) 꿈 없는 잠-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들 때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 속으로 여행
3) 지금 - 정문
4) 생각 정지
5) '내맡김' -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저항하지 않고 수용
6) 침묵-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에서 침묵으로 존재
7) 죽음 직전에 열리는 문-찬란하게 빛나는 무색의 공간'
제7장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기
형체 없는 영역에서의 진정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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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면의 몸-몸 안의 에너지 장을 전체적으로 인식
몸을 편안히 쉬게 하고 눈을 감으십시오. 몇 번 심호흡을 하십시오. 아랫배로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을 느끼십시오. 숨을 들이쉬고 내칠 때마다 아랫배가 어떻게 부풀
고 가라않는지 관찰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몸 안의 에너
지 장을 전체적으로 인식하십시오. 거기에 대해 생각하
지 말고, 느끼십시오. 이랭게 함으로써 당신은 마음으로
부터 의식을 되찾게 됩니다. 필요하면 앞에서 설명한
빛'의 시각화를 이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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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로움이란 그러한 형체 없는 영역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눈에 보이는 모습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되고, 더 이상 모습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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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의 근원
현시되지 않은 세계란 기라고 부르는 일종의 우주 생명 에너지를 말하나요?
아닙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기의 근원입니다.기는 우리 내면의 몸의 에너지 장입니다. 곁거죽의 당신과
근원을 잇는 다리입니다. 그 다리는 모습으로 이루어진 현시된 세계와 현시되지 않은 세계 사이에도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꿈 없는 잠
2) 꿈 없는 잠-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들 때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 속으로 여행
당신은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들 때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 속으로 여행을 합니다. 근원과 합해지는 것입니다. 그 근원으로부터 잠시 동안 당신을 지탱해 주는
생명 에너지를 얻고 현시된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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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당신이 의식적으로 거기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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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내면의 몸을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사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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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문
2) 지금은 정문
지금은 정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면의 몸을 포함해 다른 모든 문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당신은 '지금' 속에 확고하게 현존하지 않고 몸 안에 있
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과 시간이 서로 뒤엉켜 있듯이 시간
없는 지금과 현시되지 않은 세게 도 긴밀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
3) 생각 정지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 또 다른 문은 생각을
정지함으로써 열립니다. 이는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출발할 수 있는데, 의식적으로 호흡하거나 예민하게 깨어
있는 상태로 한 송이 꽃을 바라볼 때, 그 순간 마음이 거기 간섭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생각의 흐름에 틈새를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수많은 명상법이 바로 그런 방법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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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맡김' -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저항하지 않고 수용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내맡김' 또한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면의 저항은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당신 자신, 그리고 주변의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차단시킵니다 그래서 에고가 의존하고 있는 분리감을 강화합니다. 분리감이 강해질수록 당신은 현시된 세상,분리된 형상의 세계에 읽매이게 됩니다. 그리고 형상의 세계에 속박되어 있을수록 당신의 모습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문이 닫히고 내면의 차원, 깊이의 차원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입니다.
반면, 내맡김의 상태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모습과의
동일시가 깨어지고, 어느 정도 '투명' 해지면서 현시되
지 않은 세계가 당신에게 빛을 비추게 됩니다.
사랑도 그러한 문 중의 하나인가요?
아닙니다. 사랑은 아닙니다. 그 문들 중 하나가 열리자마자 사랑은 합일의 느낌으로 당신 속에 자리잡습니다. 사랑은 문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문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옵니다. 당신이 완전히 눈에 보이는 모습과 동화되어 있는 한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할 일은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들어오는 문을 찾는 것입니다.
침묵에 귀 기울이라
방금 언급한 것들 말고도 다른 문들이 있습니까?
5) 침묵-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에서 침묵으로 존재
그렇습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현시된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지만, 아주 위장을 잘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보아야 할 곳을 알고 있다면, 어디에서나 그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문은 언제라도 열릴 수 있습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립니까? 차가 지나가는 소리는?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 속에서 현시되지 않은 세계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나요? 느껴지지 않는다면 소리가 들어가고 나오는 침묵 속에서 그것을 찾아 보십시오.
소리보다 침묵에 더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외부의 침묵에 주의를 집중하면 내면의 침묵의 창조됩니다.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하나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모든 소리는 침묵에서 태어나서 침묵으로 돌아가서
소멸하며, 살아 있는 동안에도 침묵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침묵은 소리를 존재하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소리,모든 곡조, 모든 노래, 모든 말이 지닌 특성이며 동시에 현시되지 않은 세계의 일부입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에서 침묵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침묵만큼
신성한 것이 없다고들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침묵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대화를 하면서도 단어 사이의 공백, 문장 사이의 무언의 틈새를 의식하십시오. 그러는 동안 당신의 내면은 점차 고요해질 것입니다. 내면이 고요하지 않으면 침묵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습니다. 밖에는 침묵이 흐르고 안에는 고요함이 자리
잡으면 당신은 현시되지 않은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공간을 인식하라
소리는 침묵이 있어야 존재하고, 물체는 빈 공간이 있어야 존재
소리가 침묵 없이 존재할 수 없듯. 빈 공간이 없다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체든 몸이든 모두 무에서 나와서 무에 둘러싸여 있으며 결국 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
가구, 벽 등과 같은 공간 속의 대상과 상응하는 마음의 대상들, 이를테면 생각이나 감정, 감각의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간과 상응하는 것은 의식입니다. 공간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듯 의식은 마음의 대상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해줍니다. 따라서 공간 속의 대상인 사물로부터 주의를 거두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마음의 대상들로부터도 주의를 거두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언가 생각을 내면서 공간이나 침묵을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 주변의 빈공간을 인식함으로써 당신은 동시에 무심의 공간을, 순수 의식을, 현시되지 않은 세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공간에 대한 묵상이 하나의 문이 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공간과 침묵은 본래 동일한 유와 무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그것들은 내면의 공간과 내면의 침묵이
외부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것은 고요함이고,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무한히 창조적인 자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차원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내면의 공간도 고요함도 없이, 늘 균형을 잃은 상태로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세계를 알거나, 최소한 세계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신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형상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본질에 대해서는 전혀 캄캄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형상을
지닌 모든 것은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두려움으로 인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잘못 인식하고 왜곡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해도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않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영성 그룹인 기적 수업' 에서는
이러한 진리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참된 것은 그 무엇도 위협받을 수 없다. 참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신의 평화
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현시되지 않은 세계와 생생하게 연결된
상태라면, 눈에 보이는 세상과 그 안의 모든 생명체가
형상을 초월하여 오직 하나인 생명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며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깨닫게 될 것입니다. 형상 있는 모든 것은 소멸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예수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것이고, 붓다의 말에 따르자면 '피안으로 건너가게' 되는 것입니다.
공간과 시간의 진정한 본질
다음과 같이 숙고해 봅시다. 침묵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면. 침묵은 당신에게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침묵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소리가 있어야 침묵 또한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공간 속에 아무런 물체도
없다면, 공간은 당신에게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별도 은하도 없는 텅 비어 있는 광활한 공간을
떠다니는 한 점의 의식의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갑자기
공간은 더 이상 광활하지 않을 것이며. 아예 거기 존재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저기까지의 움직임도 없을 것이고 속도도 없을 것입니다. 거리와 공간이 존재하려면 적어도 두 개의 점이 필요합니다. 공간은 하나가 둘이 되는 순간 존재하게 됩니다. 두 개의 극이 수만 개가 되면서 공간은 점점 더 광활해집니다. 이렇듯 세상과
공간은 동시에 생겨납니다.
공간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지만 공간 자체는 무입니다. 우주가 존재하기 이전에 빅뱅이 있기 이전에 광활한 빈 공간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면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공간도 없었습니다. 단지 현시되지 않은 세계' 하나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 하나가 수만 개가 되면서 갑자기 공간이 거기 있는 듯이 보였고 많은 것들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간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신이 우주를 수용하기 위해 만들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공간은 사물이 아니며, 따라서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맑게 개인 밤에 밖에 나가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육안
으로 볼 수 있는 수많은 별들은 실제로 거기에 있는 별들의 지극히 적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미 초강력 망원경을 통해 십억 개의 은하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각각의 은하는 다시 수많은 별들을 갖고 있는 '우주섬' 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주 자체의 무한함과 이를 데 없이 장엄한 그 깊이와 고요함입니다. 우주의 무한한 광활함과
고요함보다 경이롭고 장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비어 있음입니다. 광활한 비어 있음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감각을 통해 우주 속 공간으로 보고 있는 것은 현시되지 않은 세계가 외부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것은 신의 몸입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기적은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그 고요함과 광활함이 공간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완전하고 철저하게 현존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심의 고요한 내적 공간으로서 그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
안에서 그 공간은 깊고 광대합니다. 확장의 측면에서 광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서 특별히 확장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초월의 한 속성인 무한한 깊이를 잘못
인식한 것뿐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공간과 시간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같은 시간이 공간의 네번째 차원이라는 의미 같습니다. 그는 그것을 '시공연속체' 라고 불렀더군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외적으로 공간과 시간을 인식하는 것은 어차피 환상이지만, 거기에는 핵심적인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공간과 시간은 신의 두 가지 본질적 속성인 무한함과 영원함이며, 당신은 마치 그것들이 당신
바깥에 있는 것처럼 인식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내면에
시간과 공간의 진정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공간은
무심의 평온하고 끝없이 깊은 영역이며, 시간은 현존
즉 영원한 지금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공간과 시간이 내면에서 무심과 현존이라는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인식될 때. 외부적인 공간과 시간은 여전히 당신에게 존재하긴 하지만, 훨씬 덜 중요해집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존재하지만, 당신을 더 이상 속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초월하는 데 있습니다. 공간 속에 물체가
없으면 공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은 세계를 깨닫기 위해서는 나타난 세상이 필요합니다. 붓다는 "환상이 없다면 깨달음도 없다."고 했습니다. 나타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당신을 통해 그 자신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주가 그 신성한 목적을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깨어 있는 죽음
7) 죽음 직전에 열리는 문-찬란하게 빛나는 무색의 공간'
이미 말했던 꿈 없는 잠 외에도 저절로 열리는 또 하나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은 육체가 죽는 순간에 잠깐 열립니다. 당신이 평생 동안 영적인 깨달음을 위한 모든
기회를 놓친다고 해도 육체가 죽는 순간 마지막 하나남은 문이 열릴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대개 그 문을 찬란한 빛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더없는 축복과 깊은 평화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는 '찬란하게 빛나는 무색의 공간'으로 묘사하면서 그것이 곧 당신의 진정한 자아' 라고 말합니다. 이 문은 아주 잠깐만 열릴 뿐이며,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현시되지 않는 세계의 차원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놓치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친 저항과 두려움을 갖고 있고 감각 경험에 지나치게 연연하며, 현시된 세상에 너무
깊이 동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을 보고도 두려움이 앞선 나머지 돌아서게 되고 의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이후에는 대부분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결국엔 탄생과 죽음의 윤회를 되풀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현존이 의식적인 불멸을 이루기에 충분히 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모든 문을 통과할 때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빛나는 본성은 남아 있습니다. 개성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개성 안에서 진정한 가치가 있는 참된 것은 빛을 발히는 진정한 본성입니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치 있고 참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음이 가까워진 상황이나 육체적인 형상이 분해되는
죽음 자체는 항상 영적인 깨달음을 위한 크나큰 기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그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그러하듯. 죽음에 대해서도 거의 완전한 무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은 죽음의 문입니다. 거짓 자아가 죽는 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할 때, 심리적인 마음이 만들어낸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서의 당신 자신은 막을 내립니다. 그때 당신은 눈에 보이는 모습과의 동일시가 환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환상이리는 것을 깨닫습니다. 죽음은 환상이 끝나는 것일 뿐입니다. 환상에 매달리고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출처: 에크하르트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