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도리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 걸까. 길의 끝에 대한 물음은 자연히 목도리에게로 이어졌다. 이걸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주위에서 물은 적이 있다. 내 대답은 언제나 아니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 물음은 목도리와 함께 길게 이어져 갔던 것이다.
오토바이 소녀.
끝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간다.
그래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
더럽게 배고팠다. 더러움과 배고픔. 대체 어떤 것이 먼저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없는 것이 그것만은 아니었건만, 그 사실이 배고픔을 덜어주지는 않았다. 오른쪽 다리가 점점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면도날 위를 탭댄스로 질주한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뼈와 살이 분리되는 것이다. 골수가 흘러나와 거리를 적시고 때마침 흘러나오는 캐럴이 찬송하겠지.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거리는 추웠다. 주위로 스쳐가는 사람들도 추웠다. 팔짱을 끼고 서로 붙어다니는 모든 눈길은 눈길을 닮아 있었다. 눈이 소복소복 쌓인 길이라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발 구멍 사이로 눈물이 스며들었다. 찢어진 양말은 눈물로 가득 찼다. 걸음마다 질척거림이 따라다녔다. 실로 차가운 보도블록이었다. 밑창을 거쳐 다가오는 감각에는 슬픈 면이 있었다. 눈앞에서 눈을 감아라. 그렇게 배웠다. 어제 서울역 주위를 떠돌았다. 차마 밝은 곳으로 걸어갈 수 없었다. 무서웠다. 몇만 럭스는 되어 보이는 조명들이 창살처럼 지면을 꿰뚫고 있었다. 창살 사이를 자유로이 걸을 수 있는 건 오직 천사들뿐이었다. 연분홍 어그부츠와 볼레로 가디건을 날개 대신 단 천사들이 날아다녔다. 흩어진 깃털마저 감히 주울 수 없었다. 겁이 났다. 별다른 방법도 없이 미로처럼 얽힌 지하도를 걸었다. 1번 출구는 7번 출구와 얽혔고 2번 출구는 9번 출구와 엇걸렸다. 걸으면 걸을수록 헤매는 느낌이었다. 실타래를 풀어나가다 어느새 다시 실패를 쥐고 있었다. 뭉개진 스파게티처럼 두 손을 휘감는 실타래. 실타래를 언급하는 일은 언제나 실패를 동반했다. 나처럼 걷는 자와 내 앞에서 눕는 자가 교차했다. 잠바를 코까지 덮어쓰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가렸어도 시리도록 추워 보였다. 어느새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콘크리트도 막지 못한 바람이 공기구멍 사이를 유람하듯 지나갔다. 가끔 흘리는 패키지 여행권에도 진피까지 냉각되었다. 이제 걸을 장소는 신촌 지하도. 역 입구에서 선로까지는 천 걸음이 넘는다. 바람도 새어들어 오지 못하는 장소였다. 대신 사람의 눈과 사람의 시선이, 사람의 비열한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또아리를 튼 채 독을 흘렸다. 뱀은 자신이 무는 적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저 물뿌리개처럼 뿌린 후 까맣게 잊었다. 자신에게 독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띄엄띄엄 놓인 벤치마다 노숙자들이 누웠다. 통로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린 붉은 십자가만큼 따뜻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벽과 바닥에 붙고 깔린 타일은 현대 백화점 직원들이 청소해 놓은 것이었다. 깔끔하고 명료하게 닦인 타일에는 공적인 맛이 있었다. 삼성전자나 현대증권처럼 깡통 주식의 귀감이 될 만 했다. 소위 보통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먼저 지나갔다. 뒤에 남은 노숙자들은 취기와 함께 경멸을 안고 잤다. 흘낏 넘기는 눈길이 어찌나 차가웠던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따로 없었다. 나도 벤치를 하나 골라 누웠다. 딱딱하긴 했어도 차가운 기운은 훨씬 덜했다. 등을 기대자 딱 맞는 키보드 스킨처럼 등받이가 받쳐왔다. 비뚤어질 것도 없고 미끌어질 것도 없었다. 저절로 나오는 한숨이 심장을 가리고 그예 고동이 느려졌다. 태엽 풀린 회중시계가 조금씩 늦어지고 늦어져, 마침내는 달이 이지러질 즈음까지 멈춰 있었다. 암흑이 내려앉았다. 명료하지 않은 의식 속으로 대화가 들렸다. 소년 혹은 변성기 소년 둘이었다.
"어때. 우린 정말 행복한 거 아냐?"
"그렇죠."
"우린 이 깨찰빵이라도 먹고 있잖아. 얼마나 행복해."
닥치고 잠이나 자.
"그렇죠."
"지금 여기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라고. 800원짜리 깨찰빵도 먹지 못해서 얼마나 가련하냔 말이야. 우리가 이거라도 쥐고 있다는 사실은 크나큰 변별점으로 작용하고 있어."
닥쳐.
"그렇겠네요."
"제대로 듣기나 하고 있는 거냐."
"그렇죠."
"아무튼 말이야. 아주 웃기는 녀석들이야. 아까 지나가던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들었냐? 쟤네들처럼 되는 거야?라고 했잖아. 우리가 뭐 어때서. 단지 앉아 있는 게 다야. 그 녀석들은 걸어가고 있고 우리들은 앉아 있고, 다른 거라고는 그것뿐인데도 우린 구별되고 말아. 저기 봐봐. 방금 지나간 아줌마가 우릴 흘낏 보면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봤어? 무심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같잖다는 얼굴이었어. 거리에 널브러진 개똥처럼 불쾌한 존재로 보이는 거지.
내 옷이 그렇게 허름한 것도 아니야. 노숙을 오래 해서 지저분한 것도 아니고. 팔이 하나 없다거나 다리를 절고 있다거나 한 것도 아니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벤치에 앉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릴 다르게 보고 있어. 정말 웃기는 노릇이지. 너무 웃겨서 배가 아플 지경이야. 도대체가 저들과……."
닥치란 말이다. 그 입 닥치고 거기서 지하철이 다시 다닐 때까지 잠이나 자. 역겹고 메스꺼워서 내장이 스키드 마크를 그리는 느낌이야. 하지만 언제나 불공평한 잠이 눈꺼풀을 건드렸다. 근육이 탄력을 잃듯이 눈이 감겼다. 핏줄에서 콜레스테롤성 피곤이 용해되어 온갖 노폐물을 축적했다. 물론 의학적인 근거는 전무했다. 직관적인 번개가 스러지며 의식을 잠재웠다. 아마도 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한전의 은총만이 가득했다. 통로는 수은 방전으로 생성된 자외선에 노출되어 있었다. 밤이 되어도 돈을 안 내도 형광등은 발광했다. 오묘한 감각이었다. 신발 밑창이 조음하는 소음도 들리지 않고, 오직 공허가 내지르는 광기만이 전정기관을 자극한다. 세상이 미묘하게 뒤틀린다. 앞이 뒤와 섞이고 찬 기운이 더운 기운에 먹혔다. 가속되면서 뒤로 밀리고 다시 한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또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하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베개를 감싸 안은 것처럼 목도리를 감싸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톱 끝까지 새하얀 목도리에 휩싸여, 어디가 어디인지 보이지 않았다. 보풀 거리는 곳도 없었고 얼룩 하나도 없었다. 오직 새하얀 속성만이 전문을 대독했다. 두 손에 하얀 따뜻함이 묻어났다. 무릎에 떨어지고 바닥에 흘러 발바닥을 적셨다. 겨우 말랐던 양말에 하얀 물이 들었다. 몸을 일으키자 목도리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따스한 기운만은 전신에 감돌았다. 조금씩 눈물이 흘러내렸다. 뜨끈한 물방울이 콧속으로 흘러 올라갔다. 입술에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거리에서 흘리는 눈물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흘리는 눈물은 뜨거웠다. 심장이 데일 정도였다. 지하도는 온통 하얀색 투성이였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이 목도리로 덮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목도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 시작인지 결코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직관에 따랐다. 어디로 가든 끝이 나오지 않으리란 예감이 있었다. 뭔가를 원하는 걸음이 아니라 걷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걸음이었다. 푹신푹신한 보도블록은 슈크림 위를 걷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걸음마다 하얀 물감이 흩어지는 착각이 일었다. 지면이 모두 희게 변해 일렁거리는 바다가 되었다. 멀리서 유일한 등대의 탐조등이 비쳐왔다. 걸음이 빨라졌다. 느려졌던 고동이 제 속도를 되찾고 있었다. 짜릿한 아픔이 격벽을 통과해 심방에 닿았다. 내가 본 것은 작은 키를 가진 소년이었다. 소년은 하얀색으로 둘러싸인 땅을 맨발로 걷고 있었다. 눈을 감고. 연파랑 런닝셔츠와 짙은 남색 반바지에 남긴 재봉선이 별똥별의 궤적 같았다. 혜성의 꼬리인 양 목도리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목에 몇 번 두른 것이 다인데도 목도리는 한이 없었다. 맨발이 새로운 지면에 닿아도 목이 졸리는 기색은 없었다. 단지 그 전처럼 당연하게 다음 발을 움직일 뿐이었다. 눈을 감고 걷는다는 공포는 무한한 목도리에 매여버린 듯했다. 상체를 약간 숙이고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날개를 펼치듯이 두 팔을 뒤로 뻗었다. 위태위태한 모습이 새끼 새와 닮았다. 넘어진다.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져 버린다. 넘어질 리가 없다. 넘어질 수가 없다. 소년의 등 뒤에서 형광등의 광휘가 밀려왔다. 앞과 뒤의 명암이 순식간에 갈려나갔다. 명도가 깊어지고 또한 얕아진다. 거장이 손질한 터치가 곳곳에 내려앉았다. 마쉬맬로우로 만든 구름처럼 부드럽고 부드러웠다. 3차원적 물감이 번졌다. 빛은 스펀지에 물감을 찍어 군데군데 찍어놓았다. 과정 하나하나가 눈으로 보였다. 빛살이 엇갈리며 소년의 초록색 머리끝을 푸르게 물들였다. 기다란 속눈썹에 빛줄기가 걸려 있었다. 내 가슴이 파랗게 진동했다. 얼었던 손가락이 풀렸다. 지문에 닿은 가슴은 연하게 빨간 것을 품었다. 밟고 있는 목도리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뒤로 뻗은 다섯 손가락과 가끔 드러나는 벌건 발바닥이 아리게 보였다. 소년의 모든 게 내게 통증으로 전이했다. 눈물은 마를 줄을 몰랐고 나는 그것조차 몰랐다. 소년은 점차 멀어져갔지만 여전히 곁에 있었다. 멍하니 서서 목도리와 소년과 지하도에 가득 찬 빛을 바라봤다. 순간 소년의 등 뒤에서 끝을 볼 수 없는 날개가 솟아올랐다. 영원불멸한 전동 장치를 가리키는 표식처럼 영화롭고도 눈부셨다.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깨어난 곳은 크리스마스였다. 빨간 옷을 입은 도둑과 빨간 코를 단 괴물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소름이 끼치면서 땀구멍을 막았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악몽도 그들처럼 춥지는 않았다. 다시 얼어붙은 손가락과 이미 결빙된 오른쪽 다리가 조화롭게 아팠다. 어제인가 그저께인가 본 소년이 각막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래도 아픔은 가시질 않았다. 아팠다. 손도 아프고 눈도 아프고 아픔이 아팠다. 아파서 아팠기에 아픔이 아픔에 아프다고 아프다고 신음을 흘렸다. 앙상하게 말라죽은 가로수 저 너머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듯도 하고 연인이 속삭이는 듯도 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결에 실려온 소리여서 확실치는 않았다. 그렇지만 전신에서 힘을 앗아가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진부한 영화에서는 언제나 악당이 신선한 죽음을 맞도록 배려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영화가 진부한 이유는 시나리오 작가의 창작력이 바닥에 가깝기 때문이다. 내 절망의 진부함 또한 같은 이유에서 바닥에 가까웠다. 세상은 상상력 없이 소설을 쓰는 작가와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진부한 결말. 다리가 풀려 거리 위에 앉아야만 했다.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걸으라고 명령할 자격은 가지지 못했다. 신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내게 빵 한 조각 줄 양심도 없다고 장담한다. 밥풀 하나를 뺨에 붙여줄 누군가야말로 인정이 넘친다. 그러나 놀부 아내가 신보다 현실적 정당성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모두 부질없는 바보 짓이었다. 배에서 위장이 경련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도 오래 전 일이다. 이젠 다 필요없다. 다 그만두자. 우리 이런 건 이제 그만 두고 잠이나 자자. 엉덩이를 압박하는 붉은 콘크리트 블록이 무서웠다. 머릿속에서 딜리셔스 레이블의 노래가 울렸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일본말을 알아듣게 되지는 않는 법이다. 뇌에 이어폰을 꽂아 놓은 것도 아닌데 노래가 들렸다. 오토바이 소녀. 배기음을 닮은 드럼이 소년의 목도리처럼 이어졌다. 내게 있는 건 더러운 바지뿐이야. 그렇게 입 닥치고 있어야만 하늘에선 눈이 내리는 거야. 눈으로 진창이 된 진흙 수프 속에서 굴러버려. 누군가 리볼버로 대가리를 날려 줄 때까지 넌 굴러야 하는 거야. 숨도 쉬지 말고 말도 하지 말고 그렇게. 응? 알았어? 뒤에서 쫓아오는 녀석 따윈 하이힐로 걷어차야 해. 사타구니를 붙잡고 쓰러지겠지. 뒷굽으로 정수리를 짓눌러 줘. 그리고 읊조리듯 말해주는 거야. 네놈이 숨 쉰다는 사실이 너무 역겨워. 영원히 담뱃갑을 못 쥐게 해주겠어.
"크리스마슨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혼다 파이어블레이드 CBR954RR이 멈춰 있었다. 무릎에서 10c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HONDA"라는 다섯 글자가 박혀 있었다.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광활하면서도 숨죽인 소음이 배기통도 거치지 않고 터져나왔다. 동시에 PGM-FI 연료분사 장치가 감미롭게 먹이를 공급하는 소리가 울렸다. 검은색 모르타르가 조응하며 미세한 아지랑이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빠르게 활공하는 검이 티타늄 날을 빛내며 연기를 뿜어냈다. 천년 새가 훑을 먼지 하나 없는 붉은색 프레임은 광택제가 자아낸 반사광으로 가득했다. 진눈깨비보다 축축한 눈은 차체에 앉자마자 녹아버렸다. 대신 파이어블레이드의 시트와 연료 탱크가 조금씩 색을 더해갔다. 좀 더 짙고 좀 더 짙은, 피처럼 짙은 검이 몸서리를 쳤다. 나는 홀린 듯 차체에 손을 갖다댔다. 파이어블레이드 고유의 진동수에 손등과 손바닥이 공명했다. 타코마 다리가 붕괴되듯이 내 모든 세포가 순차적으로 파괴되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세포막에서 시작한 붕괴는 소포체를 거쳐 리소좀을 돌아 골지체까지, 리보솜에서 방향을 바꿔 마침내는 핵막을 건드렸다. 핵이, 인간이 가진 핵이 몸을 떨었다. 희락에 찬 것이었는지 아니면 반대 방향을 통해 무한급수로 발산한 것인지 불확실했다. 오직 사물이 지닌 고유 진동수만이 진실로 작동했다. 진동수를 가로지르는 맨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입은 화상 자국과 이유 모를 상처가 가득했다. 강인한 살집은 뼈로 받침대를 세운 듯이 근육을 품고 있었다. 평범한 자세로도 팽팽한 긴장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전쟁터에서 삶을 지켜본 숙련자의 사격 자세 같았다. 짧은 청 반바지 위로 살짝 드러낸 배꼽이 보였다. 그리고 사슬처럼 몸을 감싼 푸른 재킷이 눈에 젖었다. 역시 맨발인 그녀는 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안 탈 거야?"
머뭇거리며 일어나지도 못했다.
"바보.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 정신 몰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달리면 되잖아."
도로에 신발이 굳어 떼어내기가 힘들었다. 힘을 주어 얼어붙은 다리를 움직여 보려고 했다. 하지만 결코 움직일 줄 모르는 이순신 동상처럼 정지한 채 그대로였다. 콧물에 눈물을 섞어 흘리며 두 손으로 다리를 붙잡았다.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대로였다. 변할 수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 세상이었다. 여기 이렇게 볼트처럼 고정되어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허탈감이 썰물을 타고 밀려 갔다. 어느새 마지막 희망마저 같이 표류해버렸다. 새로운 크루소를 만날 때까지는 편지를 주고받지 못할 것이다.
"으쌰."
그녀는 왼팔을 들어 가볍게 날 들어올렸다. 하늘로 올려진 나는 금세 뒷자리를 차지했다.
"가볍네. 자, 꽉 잡고 있어. 이러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휩쓸려 날아가겠다."
파이어블레이드는 그렇게 출발했다. 여려 보였던 허리는 의외로 든든했다. 푸른 재킷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았다. 바람이 지나갔다. 머리가 날렸다.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소름이 돋았다. 솜털이 곤두섰다. 핏줄이 맺혔다. 소리가 사라졌다. 재킷 안은 관념만이 통하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어떤 소리도 없었다. 저절로 뚫리며 함성이 흩어졌다. 고막을 채우는 건 내 성대가 내고 있는 함성과 바람소리와 파이어 블레이드의 배기음이 전부였다. 타이어가 내는 마찰음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캐럴은 물론이고 그 흔한 찬송가도 없었다. 마치 포스코 제2공장에 들어온 사람처럼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떠들썩하기로는 지옥의 카니발보다 더한 크리스마스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옆구리에 쿡쿡 찌르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봐. 저거 안 보여?"
할로겐등처럼 밝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헬멧도 쓰지 않고 파이어블레이드를 다뤘다. 그러면서도 뒤를 돌아봤다. 걱정이 되어 뭐라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곧 말을 잊었다. 모든 차와 모든 오토바이가 멈춰 있었다. 파이어블레이드만이 달리는 도로에는 중앙선 대신 목도리가 깔려 있었다. 소년의 하얀 목도리는 검은 도로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이 도로에 나와 있었다. 길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도 시선은 목도리에 향해 있었다. 거대한 도시를 양분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기름이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엔진이 멈춘 것일까. 목도리는 깨끗했다. 발자국 하나, 신발 자국 둘 존재하지 않았다. 보풀도 없는 목도리는 천사가 흘린 깃털보다 하얗게 빛났다. 검은 모르타르 땅에 새하얀 빛살로 흐르는 강이 있었다. 따뜻했다. 뼛속까지 온기가 스몄다. 골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거칠어진 살갗이 풀렸다. 마침내 마비가 풀리고 동결이 해제되어, 온몸이 무르녹았다. 공포를 누르고 뒤를 돌아봤다. 두 소년이 목도리를 따라오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목도리는 말이지. 우주의……."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웃었다. 더없이 기쁘고 즐거웠다. 하얀 괴물은 차갑게 머리카락에 내려왔다. 달콤해 보여 혀를 내밀었다. 달았다. 사탕만큼 달고 설탕보다 더 달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지평선, 해가 지는 곳에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소년은 여전히 눈을 감고 걷고 있을 것이다. 기나긴 목도리를 늘어뜨린 채. 무한의 날개를 무한대로 펼치며 지구를 밟아나가고 있을 것이다. 소년의 손이 되고 소년의 발이 되어주고 싶었다. 둘이 함께 걸으며 조용한 별을 가꾸고 싶었다. 따뜻할 것이다. 갓 구운 빵 속살만큼 따뜻할 테고, 사랑하는 사람 품에 안긴 사람처럼 따뜻할 것이다.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언니 고마워요."
그렇게 나는 내 소년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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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독특한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
묘사가 참 멋있어요...제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운 글이지만 그래도 뭔가 감동적이네요... 다 읽었는데도 '목도리' 가 뜻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그래도 멋있어요!
제로군/으아 감사합니다. 미에코짱/어렵게 생각지 마세요. 이해하시는 그대로가 진실이니까요.
조금만 현실적으로, 보는 사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쓰면 어디서든 상당히 인정받을텐데.... 망상의 덩어리일 뿐이라 폄하될 여지가 있음.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잘 쓴 글이라 생각함. ^^
히히히. 사실 저도 못알아 봅니다요.
먼말이야 ㅠㅠ 하지만 어떠한 계기를 얻음으로써 모든 것이 얼은 몸이 녹듯이 마음 속에서 해결되어 가는 과정이란 것은 대충 느끼겠다는 ㅇㅅㅇ(아닌가 ㅠㅠ)
히히 흑영미화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게 정답입니다.
음 읽어보니 하고싶은 말은 이것 아닙니까 ? 소녀에게는 소년이 필요하고 소년에게는 소녀가 필요하다. 그리고 작가에게 소녀가 필요하다. 누가 날 ~ 꼬셔줘~ 애인을 구해줘~ 올 겨울은 따듯하게 ~
그렇지요.
냠. 잘 읽었습니다.
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