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낙타
written by 괴소년
上편에서 계속♡ -타앙
마법의 시간이 끝나자, 나는 무대로 다가가 여자에게 그녀가 실로 아름다웠으며, 싫지 않다면 내 모자란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자는 새빨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뱅뱅 감으며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았는데, 정말로 목적이 그것뿐이냐고 묻는 듯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낙타 그림의 이야기를 해야 했으며, 이야기가 끝나자 여자는 세상이 떠나가라 웃으며 내게 말했다.
“당신, 화원 주제에 정말 대단해. 그림을 그린다고? 뭔가 착각하고 있네. 일단 당신이 화원이라든가 돈을 주겠다는 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하지만 당신은 날 그리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고 믿고 있잖아? 그 그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웃기지도 않는 일이야. 그건 오산이야. 아마 당신은 날 그릴 수도 없을 거야. 난 그런 바보 놀음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그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 지금 당신은 단지 과거에 인사를 보내려고 하는 것뿐이야. 그런 건 가치가 없어. 돌아가. 정 빨간 머리 여자가 필요하면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망치로 호되게 얻어맞은 느낌에 어지러우면서도 너무 명확한 것들이 오히려 당황스러워서, 갈고 닦았던 화술도 간데없이, 신음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어설픈 변명은 할 수 없었다. 경멸도 동정도 아닌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여자는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더운 바람에 탐스런 머리채가 거만하게 일렁였고, 그 일렁임은 파도가 되어 나를 더 혼란스럽게 몰아쳤다. 일순간 나는 내가 낙타와 나에 대해 바닥까지 생각해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점점 멀어져 가는 여자의 황혼 같은 베일이 그런 나를 비웃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과거에 인사를 하고 싶은 것뿐일까, 아니면.
“…당신이 본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그림의 주인은 당신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낙타가 죽는 이유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눈썹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한다면 나의 강에, 갈림돌이 하나 더 놓이겠지요.”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분명했다.
“…내일 그림자가 물 끝에 닿을 때, 남쪽 언덕으로 와.”
도시의 남쪽 문 바깥은 길에서 약간 벗어난 한적한 구릉지대로, 야트막한 땅이 꿈틀거리듯 뻗어 멀리 사막까지 닿아있다고 했다. 구릉은 큰 숲이 없이 교목이 간간이 섞인 키 작은 관목들로 메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한계선 이북과 세계의 끝 이남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딱새와 멧새, 종다리와 개개비, 지빠귀 등 꽃 만큼이나 많은 새들이 햇살을 부리에 물고 숲을 누볐고, 바람을 쪼며 노래했다.
내가 언덕을 올랐을 때, 그녀는 언덕 한 가운데 선 늙은 참나무 -근방에서 가장 큰- 아래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춤을 그치지 않았고, 나는 끝없이 흐르는 춤을 방해하지 못하고 가져온 화판을 풀밭에 내려놓은 채 태양이 질 때까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제 본 춤과는 사뭇 다른 춤인 것이, 어제의 춤이 싸우는 왕의 춤이라면 오늘의 춤은 날아갈 듯 날아가지 못하는, 꿈꾸는 어린 새의 춤 같았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정작 그 때문이 아니었다. 화원에게 춤이나 노래는 경건한 예식을 진행하거나 대제를 찬양할 때나 사용되는 것으로, 함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오로지 위대한 승리자의 광명을 노래해왔으며, 잘 다듬어져 완성된 전승의 형식으로만 다루어져야 했으므로 감히 필멸의 번뇌나 부정함, 하찮은 피조물 따위를 어떤 방식으로든 찬미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것이 학관에 낮은 예술이 없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춤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살며 죽어가는 생명을 춤췄으며 끓어오르는 사랑을 노래했고, 모든 낮은 이의 운명을 한탄했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춤을 췄고 높은 하늘 아래 감히 부끄럼도 없이 작은 아기새처럼 노래했다. 그녀가 노래이고, 노래가 그녀이듯, 마치 숨쉬듯 춤췄다.
그녀의 자유분방한 행동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게 일종의 경이였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고금의 위대한 지혜를 연마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어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어떤 비전秘傳같은 것이, 무의식중에 온기가 몸을 녹이듯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녀의 춤은 내가 알던 세계에 원형의 파문을 그리며 신기루처럼 천천히 나의 세계를 바꾸어 나갔다. 나는 환희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의 회오리 속을 쉬이 해쳐나가지 못하고, 소용돌이의 중심에 앉아 떳떳하지 못한 채 눈먼 추종자처럼 애써 그 붉은 발자국을 쫓아야만 했다. 그 발자국은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신비한 향내가 밀려오는 먼 남쪽으로 인도했지만, 나는 언제나 회오리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망설였다. 그때마다 그녀는 안타깝게 웃으며 그 나비 같은 움직임으로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노래를 부르고, 음악에 발장단을 맞추곤 했다.
그림의 완성은 더뎠다. 한 달 남짓한 시간동안 수십 장의 스케치가 버려졌고 그만큼의 좌절과 재기가 그만 잠들고 싶어 하는 나를 두들겨 깨웠다. 그 무렵의 나는 그녀가 말한 그림의 의미라든가, 학관에서 비아냥거리며 말하곤 했던 낮은 예술이란 것을 어렴풋이 이해할 듯도 했지만 그것이 그림의 완성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그녀를 그리기 위해 얻어야 할 것은 다른 종류의 무엇이었으며, 그렇게 명확히 느끼고 있음에도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명암선 하나를 그어 넣기 위해서 며칠을 지새워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에 화원들 사이에 나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도 알았으나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학관 밖의 천민과 화원 사이의 농도 짙은 염문은 드물긴 했으나 없는 일은 아니었으며,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심각하게 문제시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동안 소원했던 그 선학이 나를 찾아왔을 때도 그녀나 그림에 대한 일로 찾아온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나와 함께 화랑을 걷길 원했고, 우리는 주위의 시선과 웅성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역사와 수비학 따위를 논하며 내 작업실까지 걸었다. 나의 최근 작품을 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나는 흔쾌히 그녀의 초상들을 보여주었으며, 정말로 순진하게도 그 그림들에 대한 평을 부탁하고야 말았다. 그는 여전히 침착했지만 내 말이 떨어진 순간, 훨씬 그 이전부터 품어 왔음이 틀림없을 노기를 옅게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역시 그답게 나에게 조언했는데, 그는 말을 효율적으로 가려 쓰는 법을 알았고 또 능숙하게 그런 어법을 구사할 줄 알았으므로, 그 특유의 온유한 말은 나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나의 진일보한 기술과 조형에 대한 감각 따위를 칭찬할 때, 나는 그가 너그러운 아량으로 나의 일탈을 눈감아 줄 용의가 있으며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소중한 인도자이며 이해자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제 자네는 외교부가 아니라 화서畵署에 적을 두어도 좋을 만큼 실력을 갖췄네. 웬만한 경력의 도제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겠지. 그러나 나의 친애하는 형제여. 그대의 그림은 어느 샌가 광휘를 등지고 이제는 고귀하지도, 예스럽지도 않아서, 내가 처음 그대에게 권유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치고 말았지. 우리는 오로지 부단한 수양에 의해 저 높은 좌에 오르신 열둘의 승리자들을 찬양하고 그곳에 가까이 가기 위해 살아야 하네. 그것은 세상이 열두 목의 바다로 이루어졌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이지. 그대의 형상은 비길 데 없이 빼어나지만 그건 위로 올라 빛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 저 혼탁함 속에 뒤섞여 사라지는 것일세. 그것이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언제나 지독한 유혹임을 잊지 말게나. 창연한 광영의 길을 벗어나 속된 길로 떠난 자들이 저 춥고 더러운 거리에서 어떻게 추잡하게 죽어갔는가는 누구보다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터. 나는 그런 길을 선택한 안타까운 이들을 많이 알고 있네만 그들 중 누구도 제 이름을 온전히 보전한 자가 없지. 나는 그대의 친구이자 인도자로서 큰 불안을 느끼네. 나는 그대를 너무나도 아끼고 있고, 까닭에 그대가 자신이 가진 가치를 망각한 채 남루한 삶을 살게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네. 길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자네는 저 높은 곳에 오를 권리와 재능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게나. 오래지 않아 모든 영광과 권세가 그대를 위해 빛날 테니.”
그의 말은 분명 옳았고, 곧 정체의 감옥을 꿰뚫는 차가운 작살이 되어 붉은 발자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망설이고 있던 나를 꿰어 끌어올렸다. 나는 학관의 가운데 서서 어느 틈엔가 자신의 처지를 까맣게 잊고 있는 나를 보았으며,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몰입하고 있던 자신에 놀랐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그녀를 화폭에 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녀는 내가 낙타의 땅으로 가기 위해 놓았던 갈림돌 그 자체였으며, 그녀를 그리겠다 마음먹은 나에 대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나는 숨쉬듯 춤추는 예술에 목말라 하면서도, 여전히 불안정한 디딤돌에 두려움을 느꼈고 약속된 영광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그 둘을 양립시킬 힘이 내게 없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갈림길 위에 바늘로 꽂힌 듯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도 며칠 동안, 나는 언덕에도 학관에도 발을 들이지 않고 빛이 들지 않는 외진 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자꾸 선택을 종용하는 세계가 두려웠고 이윽고 어느 한 길로 들어서, 어떤 한 가지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 나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를 일주일 째, 회랑을 지나다 여전히 언덕 위에서 피어나듯 손짓하는 붉은 나비를 보았을 때, 나는 눈앞이 텅 비어버렸다. 언덕으로 달리는 내 등에는 화판이 매여 있었고, 이미 완성되어 색으로 가득 차있었으나 그녀의 머리칼만이 텅 빈 색으로 남은 채였다.
선학의 말은 옳았다. 잠시라도 날지 않으면 죽어버릴 듯 춤추는 그녀는 그녀를 내리 누르는 태양에 지쳐 이제 떨어지는 꽃송이처럼 초라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피로 얼룩진 흉터가 질 날이 없었음에도 그녀는 분명 아름답게 살아 있었고, 나를 돌아보는 눈빛은 낙타의 그것처럼 오만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시간이 멈춘 땅에서 온 사람처럼 아주 천천히, 분명하게 그림을 완성할 수 없었다고 말했고 그녀가 무언가 말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녀 또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하는 것처럼 웃으며 다가와, 붓을 들고 화판에 대더니, 내가 놀랄 새도 없이 가볍고 경쾌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림은 흡사 코끼리 발로 문지른 것 같이, 세상의 절망을 뚫고 나왔다는 듯 기괴한 모습이 되어 시원하게 웃어젖혔고,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 그림, 사실은 완성할 필요가 없었어. 그렇지?”
그제야 나는 그것이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님을 깨닫고 덩달아 웃었고, 오히려 그림의 놀라운 형상에 만족했다. 그렇게 난생 처음 바다를 걷게 된 아이처럼, 순수하게 기쁨만을 위해 웃고 있는 내게, 그녀는 세계를 검 끝에 올려놓은 여신의 딸처럼,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화원도 아니고 그림도 그릴 줄 몰라. 그러나 춤추며 기뻐할 줄은 알아. 그리고 나의 그런 기쁨이 당신이 나를 그리며 얻는 기쁨과 같은 것이고, 살아 있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나를 그리기를 망설인다는 것도 알지. 마치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기 무서워하는 어린애처럼.
당신은 나를 선택함으로써 안식을 잃고 초라해질 것이 두려운 거야. 인간은,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법이니까. 나는 당신이 내 초상을 완성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이곳에서 당신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지. 그래서 당신은 나를 그리지 못해. 반대로 나를 얻으면,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대신에 모든 것을 얻게 될 테고. 하지만 이곳에서는 안 돼. 이렇게 추악한 승리가 숭배되는 땅에서는 당신도, 나도,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의 세계를 바꾸어 버릴 선택을 요구했다.
“-남쪽으로 데려가줘. 저 붉은 왕의 땅으로, 나를 데려가줘.”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이름을 얻은 것 같은 환희와, 미래의 바닥돌을 알게 된 희열과, 온전히 나 자신으로 설 수 있는 자유를 보았다. 그와 동시에 저 강인하고 아름다운 꽃부리를 감당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안락한 새장에서 풀려난 새의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대답을 회피하며 언덕을 도망쳐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여름은 막바지에 이르러 미친 듯 남은 생명을 불살랐다. 세상은 질식할 것 같은 빛의 포화를 피해 그늘로 스며들 듯 숨을 죽이며 돌아섰고, 대기는 너무나도 밝아 그 아래에서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은 저마다의 초라함을 저주해야 했다. 그러니까 그 날이, 나에게 선택의 활시위를 재촉한 그 날이, 그렇게 압도적인 찬란함으로 무장하지 않았더라면 내 선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음날 오후, 그녀가 속한 유랑 예인단의 난장이 하나가 찾아와 그녀가 첩자로 몰려 화형 당할 거라고 말했을 때 말이다.
나는 무의식중에 아침 일찍 학관을 찾아왔던 구레나룻을 기른 정보부의 한 관리를 떠올렸고, 그가 한 말을 되새기려 애썼다. 그는 협상을 위한 제물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곁에 서서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나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런 나를 바라보다, 좋은 희생물을 한 마리 알고 있다고 조용히 이야기 하던 그 선학의 얼굴이 뇌리에 뚜렷이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날카롭게 벼려진 작은 칼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정 하나를 깊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런데 마침 그 선학이 찾아와, 가을에 있을 외교부의 승급 심사에 내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문 곁에 세워진 그림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단지, 나의 긴 노력이 이제야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거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떠난 뒤, 나는 갑자기 태양이 너무 뜨거우니까, 지금 나섰다간 치안 사무국까지 가는 길에 녹아 버릴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해가 저물 무렵에야 마지못해 일어섰다.
화원의 백금패를 제시한 뒤 내려간 감옥은, 어둡고 차가워서, 지상의 찬란함을 내쫓아 나의 머리를 깨우고,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주머니의 칼을 쥔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가게 했다. 나는 그제야 어째서 그 천진한 난장이의 표정 대신, 선학의 표정만이 여름 낮의 태양처럼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 할 수 있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그녀는, 가느다란 밧줄에 묶여 넝마처럼 매달려 있었다. 얼굴빛은 창백했고 헐벗은 사지는 피에 젖어 메말라, 낮게 그녀를 부르는 내 목소리를 새벽별처럼 떨리게 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웃었다. 춤추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 두 손과 두 발은 거친 밧줄에 매여 있었으나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 위는 여전히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었고, 그 발아래는 당연하게도 검은 흙과 여린 물이 세상의 시작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춤자락에 우주는 붉은 머리칼 위의 꽃부리가 되어 스스로 빛나기 시작했고, 그 신성한 기적에 나는 몸을 떨며 반쯤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칼자루를 꼭 쥐었다.
그녀 앞에 무너지듯 무릎 꿇고, 그 손등에 입 맞추려던 찰나, 늦은 햇살이 감옥의 높은 창을 미끄러져 내려와 탐욕스럽게 내게 화살의 방향을 물었다.
네가 진정 그 바람을 다 걸을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문득 칼을 쥔 손을 놓으며, 울먹이며, 나는 그 영원으로 걸어갈 수 없으리라고 답했다. 그녀와 달라서 나는, 손닿을 수 없이 멀리 있는 그 찬란함의 사막을 걸어가다 말라 죽을 것이 두렵다고.
갈 데 모를 두려움에 떨며 나는 등이 차가운 돌벽에 닿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흐느낌 속에서 끝없이 뒷걸음쳤다.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며 밀려드는 절망을 저주했다. 가련한, 그래서 아름다운 나의 여신은 내 어리석은 선택을 깨닫고 길고 긴 춤을 그쳤고, 끝내 웃었다.
이윽고 감옥의 문이 열리고 간수가 들어와, 눈물 흘리는 나와 힘없이 웃는 그녀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거리로 갈라놓았다. 두꺼운 돌창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은 내 손을 잡은 채 배를 잡고 웃어댔고, 떨어져 바닥을 뒹구는 화원의 백금패 위에서 춤추며, 돼지와 왕자의 차이를 시끄럽게 노래하고, 날개를 떨군 붉은 나비의 머리를 짓밟았다.
그리고 그녀는 웃으며, 한 음절 한 음절을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새기듯 말했다.
“낙타가 죽는 것은 길을 잃고 목이 말라서가 아니야. 그는 스스로가 낙타임을 잊었을 때 죽는 거지. 그래서- 그대는 영원히 나를 잊지 못하겠지. 왜냐하면 나는 그대의…….”
끝을 모르는 절망을 휘돌며 화형장으로 향하는 계단은, 그녀의 유언을 내게 끝까지 전하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만큼이나 들리지 않은 말을 잘 알고 있었고, 태양에 미혹당한 나의 어리석음에 미친 듯이 떨고 있었다.
광장의 불길이 넘실대는 시간은 내가 수백 번 절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길었고, 잔인하게 나를 농락했다. 불이 나뭇단을 삼키고 그녀를 삼키는 동안 나는 학관으로 달려 들어가, 마치 그럼으로써 시간이 되돌아오기라도 할 듯이 그녀가 휘저었던 그림을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광장으로 달려 나가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나 나락의 바닥을 밟고, 비명 지르는 나를 다시 황금칠이 벗겨진 영광의 권좌에 앉혀야만 했다. 미친 불길이 사그라지고 환호성을 울리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 깊은 밤의 침묵이 찾아든 뒤에야, 나는 화판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냉혹한 밤이 찾아든 광장은 언덕보다 멀지 않았고 이제는 낮의 햇살도 사라져 조용했지만,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몇 번이나 무릎 꿇고 주저앉아야 할 만큼 어렵고 멀었다. 기어가듯 광장에 닿은 나를 위해,
-그녀는 너무나도 고운 재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광장을 휘도는 바람은 애도하듯 그녀를 어루만졌지만, 그녀는 한 점 흩날리지 않고 내가 와서 흩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사랑했던 내 영혼, 그럼에도 내가 버리고자 했던 내 영혼이 그곳에서 파리한 낯으로 달빛에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의 세계가 내 손으로 파괴되어 이미 멸망했음을 알았다. 이제 어리석은 낙타는 길을 잃고 영원히 나락에 갇혀 지낼 것이며, 어디서도 생을 찾을 수 없으리라.
세상은 너무나도 검고 검어서, 더 이상 아무 곳에도 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쫑, 났습니다.
에. 수정 보려고 했긴 했는데,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워낙 손이 손인지라 이대로는 한 해가 더 넘어가도 못 올릴 것 같아 결국 그대로 올립니다 OTL (단지 게으르단 말일 뿐)
귀여니 옹 말씀대로, 학교 다닐 때 쓸 수 있는 글이 따로 있나봅니다.
이 글로 더 이상은 써지지 않는군요. 하하.
여기까지 졸필 읽으시느라 고생하신 분들 하늘이 두 쪽 나도(?) 감사합니다아.
실망하신 분들 죄송합니다아.
용서하세요. 사실 그런 놈인걸요.
그래도 앞부분은 공들여 썼었는데. 흑흑.
늘 뒷부분이랑 마무리가 힘이 빠져 허한데 어째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군요 OTL
짱돌과 기타 등등은 피하겠습니다만 감상, 감평은 두 손 두 발 들어 환영입니다! 자, 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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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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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마지막이 인상적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세요. : )
멋집니다.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이 떠오르는군요. 쓰는 동시에 사색하는 기가 있어 조금 문장이 헤매고 있습니다. 그 부분만 다듬으면 걸물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 무희님. 예리하시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헤세를 읽고 얼마 되지 않아 썼습니다아(...) 저는 늘 읽은 책의 문체를 따라가버리거든요. 쿨럭;; 로어님, 제로군님 모두 감사합니다 :)
지인의 소개로 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만 처음 무희를 본 자리에 대해 좀 더 강렬한 묘사와 주인공이 무희에게 그 순간 '압도적으로 사로잡힌' 심리를 묘사했더라면 더 좋았을 듯 합니다. 닿을 수 없는 오만한 존재를 어린 새라 하시니 그저 평범하게 사랑을 구하는 보통 여자가 돼버린 듯 합니다.
그리고 무희가 주인공의 모델이 되는 걸 승락하는 부분도 설명?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약간 뜬금없다는 느낌. ''a
잘 읽었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