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자국제약사 수익감소 우려해 반대
“한국의 환자와 의사들은 신약에 대한 접근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 의약품 분야의 협상 중단에 대한 웬디 케틀러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미국 쪽 수석 대표의 말이다. “포지티브리스트 시스템이 (시행되면) 신약을 차별하게 돼” 한국의 환자와 의사들이 미국의 신약을 이용할 수 없을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전만복 보건복지부 한-미 FTA 국장은 13일 “포지티브리스트 시스템은 건강보험 제도를 지속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한 주요 수단이며 FTA와 아무런 관계없는 국내 정책이다. 양보는 물론 협상 대상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포지티브리스트 시스템은 가격에 비해 효능이 우수한 약만 골라 보험약으로 등재하는 제도로 오스트레일리아·프랑스·스웨덴 등 선진국들이 대체로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왜 우리에게 포지티브리스트 시스템 추진의 중단을 집요하게 요구할까? 답은 간단하다. 자국의 값비싼 혁신적 신약들이 보험 적용을 받기 어려워 자국 제약사들의 수익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 약제비는 전체 보건의료비 중 28.8%를 차지할 정도로 지나치게 높다. 그 이유는 가격 대비 효능 여부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약이 보험약으로 등재되는 등 약가결정 제도의 문제 탓이 컸다. 포지티브리스트 시스템은 약값을 줄이기 위한 약가 개혁의 핵심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오로지 자국의 제약사들의 수익과 연관시켜 이 제도 추진을 철회하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게 보건의료계의 진단이다.
FTA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안기종 한국백혈병환우회 사무국장은 “포지티브리스트 시스템 중단은 의약품 분야의 협상 중 미국이 요구하는 것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면서 “아직 본격 논의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신약의 특허 보호권 강화 등 더 큰 요구 사항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요구는 먼저 특허 기간을 늘려 달라는 것이다. 보통 특허권 보호기간은 20년인데, 의약품의 경우에는 특허출원 뒤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심사 등으로 인해 시판허가를 받을 때까지 3~5년이 더 걸린다. 심사가 늦어져 더 길어지기도 한다. 미국은 이를 모두 인정해 특허존속기간을 늘려달라고 요구한다.
미국은 또 특허와 시판 허가를 연계하라고 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시판을 허가할 때 특허 침해 품목에 대해선 허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남희섭 변리사는 “이는 특허청은 물론 법원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면서 “이런 요구는 결국 국내 제약사의 제네릭 의약품의 시판을 막자는 의도에 다름아니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요구대로 특허권 강화가 이뤄질 경우에는 국내 제약산업이 큰 타격을 받을 게 불보듯 뻔하다.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기간이 늘어나면 국내 제약사의 복제약 생산도 그만큼 늦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환자들이다. 특허권 강화와 혁신적 신약의 가치 인정 등은 중·장기적으로 약값상승으로 이어져 최악의 경우에는 특정 환자들이 약을 사먹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인 김아무개(30)씨는 그동안 먹던
항암제인
글리벡에 내성이 생겨 미국계 제약회사
브리스톨 마이어스(BMS)사의 이른바 혁신적 신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다. 한달치 약값이 400만~600만원에 이른다. 미국 제약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의 요구대로 한-미 자유무역협상이 이뤄지면 김씨처럼 난치성 질환자들의 상당수가 역설적으로 케틀러 대표 말대로 약을 먹을 수 없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김씨는 지금 BMS사의 신약을 먹지 못하면 3~6개월 이상 살 수 없는 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