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에도 슬럼프라는 게 있다.
모든 기계들이 다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주변에 있는 기계들은 대체로 그렇다.
우리집 보일러가 그렇다.
이 집에 산지 삼 년이 다 되어가는데, 보일러는 두 번의 슬럼프를 겪었다.
난방은 잘 되는데 온수가 안되는 것이었다.
보일러 대리점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까 뭐라고 한참 설명을 하더니
부속품 하나를 갈아끼워야 한다고 했다.
A/S기사를 보내주겠다고 하는데 그 때 하필 돈이 하나도 없어서
나중에 부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보일러를 살살 달래어 쓰기로 결심했다.
일단 보일러실로 가서 보일러에게 이야기를 했다.
나 지금 머리감아야 되거든.
어떻게 따뜻한 물 좀 안될까.......라고......
보일러는 나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묵묵부답이었다.
며칠간 찬물로 씼고 지냈다.(애기 씼길땐 주전자에 물끓여서...)
그래도 나는 보일러를 믿었다.
며칠 후부터 조금씩 온수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지금은 온수 잘 나온다.
그런식으로 보일러는 두번의 슬럼프를 극복했다.
나는 보일러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다.
야단을 칠 수도 없고, 부품을 갈아줄 수도 없고, 전문가를 불러줄 수도 없고, 집을 나갈수도 없었다.
그냥 보일러를 믿고 기다릴수밖에.....
내 핸드폰도 그렇다.
몇 번의 자잘한 사고끝에(아들이 어릴적 물고 빨고 침섞어 놓기, 설거지통에 빠트리기, 가방에 눌리기 등등) 꽤나 아프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하여 병원에 두 번이나 다녀와야 했고,
병원에 다녀온 보람도 없이 문자메세지 한 번 오면 방전, 전화벨 한 번 울리면 방전되는 사태가 생겼다.
전문가의 말로는 배터리가 오래되서 그렇다고 배터리만 새걸로 사라고 했다.
그러고 싶었지만......4만원이 없었다.
(있긴 있었는데 살려니까 손이 떨려서...)
주변사람들이 핸드폰 바꾸라고 아무리 성화를 해도 나는 꿋꿋하게
아쉬우면 또 전화하겠지 뭐....라고 말하며 내 핸드폰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 녀석의 슬럼프는 꽤나 오래갔다.
그래도 끝내 녀석은 극복해냈다.
지금은 배터리가 꽤 오랜시간을 버티고, 몇 통의 전화도 문제 없이 받는다.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기특한 핸드폰이다.
내가 절전형 컴퓨터라고 부르는 내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한 시간 이상 사용하면 전기요금 절감을 위해 자동으로 기절한다고...)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땐, 멀리서 와서 그런지 적응하기가 꽤나 힘들었나보다.
(경북 안동에서 왔다.
몇 다리 건너 아는 사람에게서 산 거라......)
툭하면 기절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 컴퓨터를 아끼고 사랑하고 고마워했다.
그나마 이거라도 없으면 나는 심심해서 죽었을꺼라고......
컴퓨터가 기절하면 나는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피로라고 생각하고 컴퓨터 사용을 자제했다.
내가 눈 나빠질까봐 게임은 절대 한 시간 이상 못하게 했다.
전기요금에 내 건강까지 생각해주는 착한 컴퓨터였다.
이 컴퓨터를 병원에도 안보내고 그저 기절하면 좀 쉬게 해주며 나는 계속 부려먹었다.
컴퓨터는 나와 이 집에 적응하고 슬럼프를 극복했다.
이제 게임 네 시간까지는 끄떡도 없다.
(그래도 많이 피곤하면 혼절하곤 한다.
주로 대화 중에 많이 혼절한다....)
물론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한 기계들도 많다.
아이가 어려서 뭐든 입으로 가져가던 시절, 텔레비전에 침을 섞어놔서 A/S를 받아야만 하기도 했고,
지금도 내 카세트는 테이프는 거부한 채 라디오만 인정하고 있다.
미니카세트는 40분 이상되는 테이프는 거부하고, 그보다 짧은 테이프는 쌩쌩하게 나온다.
(나와 타협을 거부하는 기계도 있다.
비디오.....녹화는 하겠는데 예약녹화는 아직 못하겠다.....)
소리만 요란하고 제 할 몫을 전혀 하지 않는 청소기도 있긴 있다.
.......
기계들이 그렇다고 한들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믿고 기다려보는 거다.
내가 헤메고 다닐때, 나를 믿고 기다려준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그들 스스로 슬럼프를 극복하리라고....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관심이 가고, 같이 좋아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나는 내 아들때문에 구슬동자, 마하특급 델타트레인, 요리킹 조리킹, 디지몬 프론티어, 보글보글 스폰지밥, 다다다, 4차원 탐정 똘비, 그리고 호빵맨을 본다.
내 아들은 나 때문에 체포하겠어, 소년탐정 김전일, 정글은 언제나 맑음 뒤 흐름 디럭스 그리고 포켓몬스터를 본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맞긴 맞나보다.
나는 그렇게 재미없는 호빵맨도 같이 봐주고, 아침마다 키커체조도 같이 해주고, 방귀대장 뿡뿡이 보면서 짜잔형 흉내도 내주는데,
아들은 재미없다고 이누야샤랑 후르츠 바스켓을 같이 안봐준다.
(지만 안보면 되지, 나까지 못보게 한다.)
어쨌거나 나는 아들때문에 요즘 구슬동자를 열심히 본다.
그리고 무심결에 구슬동자 주제가도 흥얼흥얼 부른다.
잘 부르다보면 꽤 좋은 노래다.
오늘도 나는 구슬동자 주제가를 부르며 하루를 마감한다.
'맨날 노는 것처럼 보여~ 때가 되면 뭔가를 보여준다구.
장난 치는 것처럼 보여~ 난 언제나 세상을 신나게 살아.
질 때도 있지, 울 때도 있어. 아무렴 뭐 어때 아무렴 뭐 어때
나만 좋으면 그만이잖아. 맞아!
만들자 만들자 만들자 만들자 사랑으로 가득찬 세상을
달리자 달리자 달리자 달리자 활짝 핀 내일을 향해~'
첫댓글 재밌네요.. 저도 물건들이랑 종종 얘기하는데... 물론 대부분이 혼내는 말들이지만 키득... 웬지 콘님은 세상을 재미있게 사시는 느낌이 드네요 그래서 저도 절로 그 기분이 휩쓸리는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아요...
이누야사 재밌죠. 이누야동도 좋습니다...
재밌게 살려고 맘먹은 바가 있지요. 그런데 이누야동은.......
애기 너무 귀여워요~!!성우야 성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