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378
■ 2부 장강의 영웅들 (34)
제 6권 꿈이여 세월이여
제 4장 흔들리는 진(晉)나라 (11)
일단 진군(秦軍)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하였으나 조순(趙盾)은 언제 또 진군(秦軍)이 쳐들어올지
몰라 불안했다.이에 대부 첨가(詹嘉)를 하(瑕) 땅에 파견하여 도림(桃林)의 요새지를 지키게 했다.
도림의 요새지는 동관에서 함곡관 까지의 땅으로, 지금의 섬서성 화음현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하남성 영보현 서쪽까지의 지역을 말한다.
이 곳은 진(秦)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므로 진(晉)나라에서는
이 지역 곳곳에 요새를 만들어 늘 진군(秦軍)의 침공에 대비해 왔던 것이다.
도림 요새지를 굳건히 하긴 했지만 유변(臾騈)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는 조순을 찾아가 말했다.
"지금 진(秦)나라에 머물러 있는 사회(士會)는 우리나라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가 그 곳에 있는 한 우리는 베게를 높이 베고 잘 수가 없습니다."
"어찌해야 좋겠는가?"
"6경(六卿) 회의를 열어 우선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들어보심이 좋겠습니다."
얼마 후, 조순(趙盾)은 강성 교외의 제부(諸浮) 땅 별관에서 6경 회의를 가졌다.
6경이란 곧 6장(六將)으로, 중군대장 조순을 비롯하여 상군대장 극결, 하군대장 난순, 중군좌장 순림보,
상군좌장 유변, 하군좌장 서극을 가리킴이었다.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자 조순이 안건을 꺼냈다.
"호사고(狐射姑)는 노적에 망명중이고, 사회는 진(秦)나라에 귀화해 있소.
그런데 이 두사람은 각기 우리 진(晉)나라에게 불리한 일을 벌이고 있소. 이들을 어찌 처리하면 좋을지
경들의 의견을 듣고 싶소."순림보(旬林父)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호사고를 불러들이십시오. 호사고는 외교에 능통할 뿐더러 공신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를 귀국시켜 진(秦)을 상대하게 하면 우리로서는 큰 수고를 덜게 됩니다."
극결(郤缺)이 반대하며 다른 의견을 내었다."호사고는 안 됩니다. 그는 어지러운 일을 꾸몄고,
또한 대신을 죽인 큰 죄인입니다. 그가 돌아오면 득(得)보다는 오히려 실(失)이 많습니다.
호사고보다는 사회(士會)를 부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회(士會)는 지혜가 많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지금은 비록 진(秦)나라에 살고 있지만,
사실 그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다만 사신으로 갔다가 일이 묘하게 꼬여 그곳에 살고 있는 것뿐입니다.
듣자하니 선멸(先蔑)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호사고와 사회를 놓고 저울질한 끝에 여섯 대신들은 사회를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떤 방법으로 사회를 데리고 오느냐 하는 것이었다.
"듣자니 사회(士會)는 진강공의 신임이 두터운 모양이오. 우리가 돌려달란다고 해서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오. 좋은 계책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조순(趙盾)의 물음에 유변(臾騈)이 얼른 말을 받았다.
"그 문제라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좌중의 시선이 유변에게로 쏠렸다.
유변은 말을 이었다."저와 절친한 사람 중에 위수여(魏壽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수여는 위만의 손자이자 위주의 조카뻘 됩니다.
지금은 비록 위(魏) 땅의 한 읍을 다스리고 있습니다만, 그의 지혜와 권변은 가히 한 나라를 다스릴 만합니다.
원수께서 사회를 데려오고 싶으시다면 위수여에게 부탁하십시오.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낮은 음성으로 자신이 생각해낸 계책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유변의 계책을 듣고 난 조순(趙盾)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묘책이오.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위수여(魏壽餘)를 만나주오."
6경 회의가 끝난 다음날, 유변은 수레를 타고 위(魏) 땅으로 갔다.
위수여(魏壽餘)는 유변을 반갑게 맞아들였다."조용히 나눌 말이 있소."
유변과 위수여는 별채 방으로 들어가 밀담을 나누었다. 유변의 청을 받은 위수여는 두말 없이 승낙했다.
"알았소. 사회(士會)를 데려오는 데 일조하리다."유변은 위수여의 손을 굳게 잡은 후 강성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였다.진(秦)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접경 지역에 비상령이 떨어졌다.
- 위(魏) 땅을 비롯한 변방의 수장(守長)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국경을 철저하게 지켜라.
만일 국경 수비에 조금이라도 소홀한 점이 보이면 참수형에 처하리라.
변방 수장들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민병대를 조직하는 일도 일이거니와 그 넓은 국경을 어떻게 방비하란 말인가.
위읍의 수장 위수여(魏壽餘)는 곧 주변 장수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강구했다.
"농사 짓기에도 바쁜 우리들이 아니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함께 궁성으로 올라가
우리의 어려운 점을 호소해봅시다.""좋소이다. 차라리 군대를 파병해달라고 합시다."
위수여(魏壽餘)의 선동에 변방 수장들은 강성으로 올라가 진영공(晉靈公)에게 알현을 청했다.
그때까지도 진영공은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에 그 곁에는 재상 조순(趙盾)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위수여(魏壽餘)가 수장들을 대표하여 진영공과 조순에게 아뢰었다.
"신(臣)등은 오랫동안 황하 유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군사에 관한 일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어찌 국경을 방비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황하 유역으로 말하면, 그 길이만도 1백여 리가 넘습니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황하를 건너가고 건너오고 하는 형편입니다. 그 넓은 유역을 어찌 일일이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조순(趙盾)이 불같이 화를 내며 호통을 쳤다.
"조그만 벼슬아치가 어찌 감히 나라의 큰 계획을 비방하느냐? 당장 목을 벨 일이로되 이번만은
용서할 터이니, 어서 돌아가 사흘 안에 민병대의 병적부를 만들어 바쳐라.
만일 명령을 어기는 날엔 반드시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조순(趙盾)의 서슬퍼런 기세에 눌려 위수여와 수장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강성을 떠나왔다.
위읍으로 돌아온 위수여(魏壽餘)는 분을 못 이겨 입술을 깨물었다.
"조순은 무도한 놈이다. 어찌 사흘 안에 민병대를 조직하여 이 넓은 황하를 지키라는 말인가.
조순이라는 자가 있는 한 진(晉)나라는 희망이 없다. 나는 차라리 진(秦)나라로 가겠다,"
이렇게 떠벌려대고 나서 집안 사람들에게 짐을 꾸릴 것을 명했다.
그날 밤이었다.위수여(魏壽餘)는 술을 마구 퍼마셨다.- 안주가 왜 이리 맛이 없느냐?
잔뜩 취한 그는 부엌일을 보는 머슴을 불러 등에 매질을 하였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으나 위수여(魏壽餘)는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1백 대를 맞고서야 풀려난 머슴은 위수여에 대해 이를 갈았다.'내 반드시 이놈을 죽이리라.'
그는 밤길을 달려 강성으로 들어가 조순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위수여가 진(晉)을 배반하고 진(秦)나라로 달아나려고 합니다."
조순은 즉시 사마 한궐(韓厥)에게 군사를 주어 위수여를 잡아오게 했다.
한궐이 위읍(衛邑)으로 갔을 때까지도 위수여(魏壽餘)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강성에서 군사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부랴부랴 단신으로 달아났다.
한궐(韓厥)은 위수여를 쫓는 대신 그 가족들만을 체포하여 강성(絳城)으로 돌아갔다.
379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