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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다포식이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등의 사물(四物)을 봉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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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전으로 가는 언덕에서 바라본 청암사 대웅전 권역
맨 앞의 범종각너머로 멀리 보이는 청기와 지붕이 대웅전이다. 그 왼쪽으로 육화료(六和寮),선열당(禪悅堂) 등의
강원(講院)공간이 있고,오른쪽으로 진영각(眞影閣)과 율원(律院)인 중현당(重玄堂)이 있는 공간이다.
대웅전 앞의 2층 누각 정법루(正法樓)가 대웅전 권역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가람배치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어있는 형국이다.
▲ 극락전(極樂殿)
대웅전에서 극락교를 건너 자연석으로 촘촘하게 만든 돌계단을 올라 언덕에 다다르면, 각종 작물을 재배한
텃밭 가장자리에 반가(班家)의 모습을 한 전각이 의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은 대웅전 권역에서 100여 m 떨어진 남쪽 언덕에 터를 잡고 동향(東向)으로 앉아 고즈넉하고 정돈된
분위기에 낮은 돌담을 쌓은 소박한 모습이나, 흐트러짐 없는 매무새에 중후한 위엄이 풍겨나는 전각이다.
▲ 극락전 대문고리
입구의 일각문(一閣門)에 그려진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전각을 수호하고 있으나 채색이 많이 바랜 상태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입구를 들어서자 카메라를 든 나를 보고 한쪽 방에서 환담 중이던 스님 몇 분이 걷어올린 대나무발을
황급히 내리신다.
무심코 들어선 속인(俗人)은 그런 모습에 무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일이다. 나 때문에 스님들의 짧은 휴식이 방해받지 않았기를
바라는 죄송한 마음이다.
4년 과정의 강원(講院)과 2년 과정의 율원(律院)에서 수학하는 학인(學人) 스님들 대부분은 음력 3월15일
이면 청암사를 떠난다.
1년 가운데 제일 바쁜 때가 절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이기에 은사가 있는 절이나 출가 사찰로 돌아간다.
각자의 처소에서 부처님 오신 날을 보낸 후 음력 4월13일 청암사로 돌아오기 때문에 청암사는 약 1달간
정적에 빠져든다고 한다.
극락전은 조선조 숙종15년(1689)에 장희빈의 간교로 폐비가 된 인현왕후가 복위(復位)를 기다리며 3년간
은신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청암사는 인현왕후 복위 이후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사찰이 있는 불령산(佛靈山)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었고,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내려와 불공을
드리고 시주하기도 했다. 천왕문 오른쪽에 있는 공덕비 중 '상궁'의 공덕비가 눈에 띄는 것도 이런 연유다.
지금의 극락전은 인조 25년(1647)에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05년 당시의 주지인 대운 스님이 다시 지은 것이다.
▲ 극락전과 백화당
극락전은 정면 7칸, 측면 7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측면 2칸은 2층 누대(樓臺)를 설치한 복합
건물이다.
단청옷을 입지 않은 채 말간 속살을 수줍게 드러낸 모습에 소박하고 단아함이 묻어난다.그래서 그 속에
계시는 스님들의 얼굴이 더 해맑고 밝게 보이는 것 같다.
누대는 학인 스님들이 환담하는 다실(茶室)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런 형식의 사찰건물은 경북 영천 은해사 기기암(寄寄庵)의 신중단과 동종이 있는 누대에서 본 적이 있다.
▲ 극락전의 도깨비문양 화반(花盤)
전통한옥의 익공(翼工)계 건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장식판을 화반(花盤)이라고 하는데, 사찰건물의
화반에는 불교의 상징물이나 재미있는 그림들로 장엄을 한다. 도깨비문양은 잡스러운 것의 접근을 막는
수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극락전 누대의 풍경(風磬)
물고기는 종(鐘)에 물렸고 잠자리는 물고기를 물었다. 이들이 물고 있는 것은 결국 허공(虛空)이다.
▲ 보광전(普光殿)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보광전(普光殿)은 극락전(極樂殿)과 백화당(白華堂)사이의 서쪽 공간에서
동향(東向)으로 자리하고 있다.
보광전의 창건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782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어 적어도 그 전부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극락전에 은거하고 있는 인현왕후의 복위원당(復位願堂)으로 보광전을 건립했다는 설도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1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대운 스님이 새로 지었다.
▲ 보광전 42수 관음보살좌상
주불(主佛)로는 42수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는데, 이는 불상을 도난 당한 후 다시 조성한 것이다.
▲ 보광전 배례석(拜禮石)
보광전의 특징은 현존하는 전통 건축 가운데 드물게 다포(多包)양식과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翼蛋) 양식을
함께 쓴 절충식으로 공포(蛋包)를 만들어 사찰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 보광전과 극락전사이의 담장.
청암사는 승가대학의 특성상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장소가 많다. 그럴려면 뭣하러 사찰을 개방하는가하고
반문하겠지만 사실은, 신경이 쓰이고 불편이 많은 쪽은 참배객보다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이 훨씬 클 것이다.
불편을 감수하며 참배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 자양전(慈養殿)
극락전의 남쪽 계곡 옆 낮은 곳에 콘크리트 2층 구조물의 자양전(慈養殿)이 있다. 자양전은 강당,교육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청암사는 서슬퍼런 수행자의 길을 가르치고 배우는 도량이지만, 지역사회와의 연대도 활발하다.
그 중에서도 매년 어린이 여름불교학교를 개설하여 스님들이 아이들의 담당 선생님이 되어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자양전(慈養殿)이 행사의 중심적인 장소로 이용된다.
▲ 자양전의 1층 측면 중앙부에 눈길이 멈췄다. 선제구(善梯口)라는 푯말이 붙어있는 곳이다.
선제구(善梯口)라는 어휘가 불교에서 쓰이는 별도의 의미가 있는 줄은 모르겠다.
글자의 해석만으로는 '부처의 가르침으로 가는 좋은 사다리'란 뜻으로 대강 짐작하고 마음에 담아 놓는다.
그런데, 그 위에 수행자가 근본을 잊고 변질되고 타락하는 것을 경계하며 출가(出家)의 뜻을 밝힌 서산대사
의 글이 적혀있다.
출가하여 스님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랴! 몸의 편안함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다.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나고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어려는
것이며, 삼계(三界)에서 벗어나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글을 찬찬히 읽다보니 극락전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에 마주친 비구니스님의 앳띤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콧등이
시큰해 온다.
외부인과 맞닥뜨리는 것에 익숙치 않은 듯, 옆으로 길을 피하며 깊게 눌러 쓴 밀짚모자 밑으로 보이는 뽀얀
피부에 홍조를 머금은 얼굴은 내 딸아이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조금 어릴 것 같았다.
무슨 사연으로 어떤 인연의 끈이 닿아 스님의 길을 걷게 되셨을까...애닯아하는 이런 마음은 나의 진심이 아니다.
사실은,세상살이 대충 다 알아버리고 삶에 지친 나같은 사람의 눈에는, 너무 어려운 길이고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처지기에 오히려 스님들의 삶을 그저 한없이 부러워할 뿐이다.
예전에 세상살이 힘들 때면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가 "절에 들어가서 머리 깍고 중이나 될까"였다.
머리 깍는 일이야 별 대수겠냐마는 스님되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몰라서 하는 소리리라.
종교를 직업으로 갖는, 소위 말하는 성직자 중에 스님처럼 힘든 과정과 계율을 지켜야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하물며, 불교의 대표적 율장인 '사분율(四分律)'에 따라 비구스님의 250계보다 더 많은 348계를 지켜야
비로소 정당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비구니스님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 고봉당(高峰堂) 부도(浮屠)와 탑비(塔碑)
자양전(慈養殿)의 동쪽 경사지에 돌담으로 둘러싼 아담한 터에 부도군이 있다. 모두 5기의 부도와 1기의 탑비
(塔碑)가 있는데, 그 중 다른 부도들이 석종형(石鐘形)인데 비해 1기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다.
이는 1960년대 청암사에서 강백(講伯)으로 주석한 고봉 태수(高峰 泰秀 1901~1967)대사의 부도(浮屠)와 탑비
(塔碑)다.
고봉당(高峰堂)부도는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기단부의 하대석에는 구름문, 중대석에는 사자문(獅子文),앙련
(仰蓮)의 상대석은 사천왕상이 조각된 탑신를 받치고 있다. 탑신 받침에는 가릉빈가가 조각된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 위에는 화려한 옥개석(屋蓋石)의 상륜부(相輪部)를 올려 놓았다.
1988년에 세운 탑비는 덕민당(德旻堂) 풍수(豊水)가 찬(撰)하고 황악사문(黃岳沙門) 현산(顯山)이 글을 썼다고
적혀있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난 고봉 스님은 25세의 나이로 용성 진종(龍城 震鍾,1864∼1940) 스님에게 출가했다.
용성 스님과 함께 도봉산 망월사에서 만일결사도량을 열기도 했던 스님은 석왕사 선원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뒤 해인사,통도사.은해사 해인사,청암사 등지에서 후학을 지도한 근세 선교를 겸한 대강백이었다.
스님은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걸림이 없었는데,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
스님과 함께 선문답을 나누던 대선승이기도 했다.
고봉 스님의 제자 우룡(雨龍)스님도 청암사에서 강백으로 주석하신 적이 있다. 지금은 경주 남산의 함월사에
계시는데 스님을 뵌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 석종형(石鐘形) 부도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는 부도와 담장과 바닥에 낀 이끼는 뜨거운 여름 햇빛에도 아랑곳 않고 파랗게 살아있다.
고봉 스님 부도와 함께 있는 석종형 부도 중 3기는 명문이 남아있어 주인을 알 수 있다. 제일 왼쪽에 있는 부도가
이곡당(莉谷堂)의 것이고, 두 번째가 백심당(白心堂), 세 번째가 신곡당(薪谷堂)의 것이다.
▲ 자양전의 남쪽 계곡 건너에는 청암사의 산내암자인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그 계곡을 건너는 다리 역할을
하는 BOX구조물의 상부와 도로의 경사 부근에는 안전 난간대 역할을 하는 담장을 운치있게 쌓아 놓았다.
▲ 백련암 가는 녹음 짙은 길은, 마치 나의 육신을 송두리째 빨아들일 것 같은 블랙홀(black hole)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 백련암(白蓮庵) 입구
백련암(白蓮庵)은 극락전을 중수한 직후 유안(有安) 비구니스님이 1906년에 창건한 암자이다.
극락전과 더불어 창건이래 지금까지 비구니스님만이 계신다고 한다. 비비추가 보라빛 꽃잎을
열고 나그네를 반긴다.
사람의 인적이 드문 것은 녹색물감을 뿌린 것 같은 길바닥의 이끼가 그것을 말해준다.
▲ 백련암의 주요전각
암자의 입구를 들어서니 방금 비질한 듯이 깨끗한 마당에 키낮은 화초들로 화사롭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이 고요한 적막에 갇힌 암자는 걸음걸이조차 조심스럽다.
전각으로는 지장전(地藏殿)과 수마제전(須摩提殿)이 있고, 두 전각 사이에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사찰의 전래놀이로 성불도(成佛圖) 놀이가 있다. 윷놀이처럼 주사위를 던져 나온 점수에 따라 말을 움직여 부처의
단계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 승리하게 되는 이 놀이는 조선시대 청허 휴정淸虛休靜(1520~1604)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한다.
성불도(成佛圖) 놀이에는 부처가 되는 과정을 도표로 만든 그림인 성불도를 포함해 주사위와 패가 쓰인다.
김천 직자사의 직지성보박물관에 소장된 2점의 성불도는 본래 청암사 백련암(白蓮庵)에 전래되던 것이라고 한다.
▲ 수마제전(須摩提殿)
단청을 칠하지 않은 전각은 여염집 사랑채같이 포근하고 정감스럽다.
'수마제전(須摩提殿)'은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의 금당선원(金堂禪院)에도 있긴 하지만 흔치않은 전각이름이다.
수마제(須摩提)는 안락(安樂)이나 극락(極樂)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sukhavati’를 음차한 것이니
서방극락을 칭하는 별명(別名) 즉, 수마제전은 극락전(極樂殿)의 다른 이름이다.
▲ 산신각
준다.김천 시내에서 1시간 이상 차로 달려야 한다. 도중엔 간간이 논밭이 떨어져 있을 뿐 8할은 숲이
우거진 육산이다. 엄연히 동물과 식물의 땅이었고 인간이 여기서 재미를 보려면 깎고 무너뜨려야 할 것
이 너무 많았다. 결국 비구니 스님들이 처음 이 곳에 들어올 때 1년도 못 버틸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절에서 출타할 일이 있으면 위패를 써놓고 나가야 한다는 말도 돌았다. <불교신문 발췌>
▲ 우물에 걸린 목탁
현재의 청암사는 강주이신 지형(志炯)스님이 도제 양성을 위한 원력으로 1987년 승가대학(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하면서 제 5중창기를 맞이하게 되엇다.
도선국사가 건립한 청암사는 17세기 회암정혜 스님부터 강맥이 이어지는 고찰이었다. 하지만 1987년 당시의
현실은 딴판이었다. 성한 건물은 육화료 한 채 뿐이었고 그마저 천장 곳곳에 구멍이 뚫려 비만 오면 대야를 들고
뛰어다녔다. 큰 방 하나에서 강사와 학인이 같이 먹고 잤다. 처음에 들어올 때 가져온 건 쌀 한 가마와 된장 한
박스가 전부였다. 18명이 9인승 승합차에 실려 비포장도로 고갯길을 꾸역꾸역 넘었다. 김천에서 청암사로 넘어
가는 ‘가리재’는 비탈이 심해 차바퀴가 동시에 지면에 닿는 경우가 드물었다. <불교신문 발췌>
▲ 요사채와 정원의 화초
청암사는 까마득한 숲 속에 있어서 자연환경을 이용한 운력이 많다. 가을 초입엔 도토리를 줍고 10월이면
단감을 따러 다닌다.
봄철엔 지천에 널린 민들레나 싸리를 따서 차를 해먹는다. 벽지에서 함께 땀 흘린다는 생각 때문인지 자매처럼
화목한 분위기다. 마을 코흘리개들에게도 청암사 학인들은 마음씨 고운 언니누나들이다. 고개 너머 초등학교에서
열린 운동회에는 아이들보다 스님들이 더 많다. 1989년부터 시작한 어린이 여름불교학교에는 아이들 400명에
학부모 200명까지 도합 600명이 몰려와 며칠을 산다.
청암사가 일년 중 유일하게 소음을 허락하는 날이다. 이날을 제외하면 산은 다시 완강히 입을 다문다.
수행만이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을 독송하는 법회다. 일주일 동안 글 읽는 소리가 한시도 끊어지지 않는 장관이 연출된다. <불교신문 발췌>
▲ 창고의 장작더미와 통나무계단
청암사승가대학의 특강은 무엇보다 태극권(太極拳).검(劍).선(禪)이 백미다. 단순한 교양수업과 심신의 단련을
넘어 전문적인 선수를 양성하는 수준이다.
'국민생활체육협회장배 전국우슈대회’나 '문화체육부장관배 전국우슈대회'등의 대회에 청암사 스님들이 참가해
시범을 보임은 물론, 단체전 우승 및 전원이 메달리스트가 됐다. 강주와 주지 스님, 학인들 모두가 유단자란
이야기에 알아서 눈을 깔게 된다.
한때 청암사 사천왕문 코앞에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인근 주민들이 단합대회를 하며 고성방가를 퍼부을 때는
유원지가 따로 없었다. 강원이 바로서기 전 청암사는 고시생들의 전지훈련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어느 날
수리를 하려고 마루 밑을 들여다봤는데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곧 무례한 세속과 맞서려면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부지런히 닦아야 했던 셈이다. 부단한 실랑이 끝에 정류장은
시야 밖으로 밀어냈고 헛기침도 미안할 만큼 깊고 적막해졌다.
스님들은 강해졌고 덕분에 자연은 보다 완벽한 자유를 누리게 됐다. <불교신문 발췌>
▲ 청암교
백련암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돌아나간다. 들어올 때는 천왕문을 통하여 경내로 들어갔기에 건너지 못했던 청암교로 지나간다.
청암사 홈페이지(www.chungamsa.org/ )를 열면 화면에 제일 먼저 보이는 다음의 글귀가 있다.
" 삶의 나침반이 되는 청암사. 과거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는 전환점..."
고뇌와 번민에 빠지지 않고 갈등과 문제와 실수가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살다보면 인생의 갈림길에서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을 만나고 싶을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으랴.
누군가가 마음에 담을 만한 절집을 말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청암사를 이야기할 것이다.
청정도량에서 눈과 귀를 열고 부처의 가르침과 자연의 섭리를 조용히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더군다나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깨우쳐주는 절집이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 축복 - 해와달
다시 세상에 태어나서도 나는 당신을 만나고 싶소
주어도 아직 다 못준 사랑 남아있기에 나는 당신을 꼭 만나야 겠소
나 또한 당신을 다시 만나서 그 사랑 다 받고 싶소
당신 하나만을 섬기라 하시는 하늘의 뜻 따르겠소
어디에 계시든 믿고 따르리 당신의 사랑은 나요
가끔씩 힘겨운 삶 세월의 무게 앞에서 우리의 사랑 약해져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 두려울게 없어요 나는 당신을 나도 당신을 사랑해~~
나 이제 당신께 받기만 했던 사랑의 빚 다 갚겠소
나만의 사랑인 당신을 만난건 하늘의 축복이었소
어디에 계시든 믿고 따르리 당신의 사랑은 나요
가끔씩 힘겨운 삶 세월의 무게 앞에서 우리의 사랑 약해져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 두려울 게 없어요 나는 당신을 나도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 두려울 게 없어요 나는 당신을 나도 당신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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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부처님~~~()()()
마하반야바라밀 부처님()()()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부처님()()()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부처님()()()
고맙습니다
세상너머님~정말 진귀한 설명과 사진 잘보고 읽었습니다,
인현왕후의 흔적이 남아있고 비구니도량의 청결함, 그리고 자양전에 대한 상세한 글 많이 배웁니다.
다시 갈 때 유심히 보고 오겠습니다()
세상너머님의 자상하신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거의 20년전에 남편과 다녀온 청암사를 자세한 설명과 함께 새로 단장된 모습을 보니 새롭고
너무나 곱고 청정하여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너머님!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다음에 갈땐 더 유심히 봐야 겠어요. 몇번을 갔는데도 못 보고 온곳도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