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富者)는 망하면 바뀐 현실(現實)을 순순히 인정(認定)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國家)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차 대전에서 패(敗)한 후 하루아침에 갈가리 해체(解體) 된 오스트리아(Austria)처럼 외압(外押)에 의해 몰락(沒落)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래도 대부분의 강대국(强大國)은 기본 체력(基本體力)이 있기에 서서히 기우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입니다.
이런 경우 냉철(冷徹)한 소수(小數)를 제외(除外)한 대부분은 자신들이 여전히 강력(强力)하다고 믿으며 전성기(全盛期)와 동일시(同一視)하고는 합니다.
↑오스트리아는 강대국에서 순식간 약소국으로 전락한 나라입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바뀐 처지(處地)를 깨닫고 부랴부랴 서둘다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당연히 그런 과정(科程)에서 뼈를 깎는 고통(苦痛)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England)도 마치 옥상(屋上)에서 지하(地下)까지 떨어진 것처럼 엄청난 변화(變化)를 경험(經驗)했습니다. 20세기가 시작되었을 때도 여전히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諸國)이었습니다. 강력(强力)한 외교적(外交的), 군사적(軍事的), 경제적 영향력(經濟的影響力) 덕분에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가 계속 유효(繼續有效)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유일 초강대국(超强大國) 미국이 한 순간 50 개주(開州)로 나뉘어져 사라진다는 상상(像想)을 하여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현재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씨스템 때문에 쉽게 상상이 갈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역사(歷史)를 돌이켜 보면 영원한 제국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영원하지 않지만 찰나(刹那)의 순간(瞬間)에 거대한 제국이 갑자기 사라졌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옛 소련은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용어만 이어받은 체제다
지난 세기만 봐도 서서히 사라진 대영제국(大英帝國)이나 냉전 시대(冷戰時代) 또 하나의 슈퍼파워였던 소련(蘇聯, Russia)의 몰락(沒落)이 있었지만 아직도 국제 사회(國際社會, International community)에서 영연방 종주국(英聯邦宗主國)으로 형식상(型式上)이나마 한 자리하고 있는 영국의 저력(底力)이나 소련의 대부분을 계승(繼承)하며 그 적통(嫡統)을 승계(承繼)한 것으로 대내외적(對內外的)으로 인정(認定)받는 러시아의 경우를 본다면 제국의 몰락이라는 것이 한 순간에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몇 백년간 유럽의 헤게머니(覇權, hegemony)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던 역사의 주역(主役)이 일 순간 몰락하였던 예(例)가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당대 슈퍼파워라도 한순간에 사라 질 수도 있다는 증거(證據)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가 아니고 불과 100 년도 지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합스부르그 오스트리아(Hofburg Austria,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가 바로 그러한 예의 주인공(主人公)입니다.
근세(近世)에 들어 비록 나폴레옹(Napoléon)에게 일시적(一時的)으로 무릎을 꿇기는 하였지만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법통(法統)을 물려 받은 가톨릭 유럽의 유일 제국(帝國)이었으며 20 세기초까지 유럽의 5 대 강국으로 군림(君臨)하였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敗戰)으로 한 순간 그저 그런 국가로 몰락하였으며,
나찌 독일의 지배(支配)를 거쳐 자신들의 의사(意思)와 상관없이 패전국으로 전락(轉落)하고 분할 통치(分割統治)의 시기(時期)를 거쳐 영세중립국(永世中立國)으로 간신히 독립(獨立)한 오스트리아를 보면 국가도 계속적(繼續的)인 자기혁신(自己革新)과 국민들을 편안히 다스리는 부단(不斷)한 노력(努力) 없이는 끝까지 존속(存續)하기 힘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황제 Karl 1세의 공군 사열
옆에 있는 약소국(弱小國) 스위스(Swiss)가 여러 민족(民族)으로 이뤄진 국가(國家)임에도 내부적 단결(內部的團結)과 외침에 맞선 투쟁(鬪爭)으로 국가를 존속(存續)시킨데 비하여 끓임없이 스위스를 괴롭혀온 오스트리아는 몰락(沒落) 후 주변 강대국(周邊强大國)들에게 구걸(求乞) 하다시피 하여 영세중립국(永世中立國)으로 겨우 국가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유지(有志)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들이 평생 괴롭혀 온 스위스에 비해서도 국제적 위상(國際的位相)이 보잘것 없는 그저 그런 국가가 되었습니다.
스위스의 영세중립은 투쟁을 통해 얻어낸 값비싼 승리(勝利)의 표상(表象)인데 비하여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은 국가의 존속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선택(選擇)한 굴욕(屈辱)의 결과(決科)이기 때문에 현재 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로마(Rome)나 몽골(蒙古)이 세계 제국(世界帝國)으로 군림(君臨) 하였던 시기는 강역(疆域)내 있는 모든 인민(人民)들이 제국의 시민(市民)으로 대우(對偶)를 받고 의무(義務)와 권리(權利)를 다하였을 때였습니다.
합스부르그(Habsburg) 가문(家門)의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o-Hungarian) 제국은 이러한 시도(始睹)를 게을리하여 제국내 민족간의 알력(軋轢)이나 반목(反目)이 극심(極甚)하여 결국은 이러한 내재적 모순(內在的矛盾)으로 제국의 종말(終末)이라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911년 카를 부부의 결혼식
↑마지막 황제 Karl 1세의 육군 사열
내부(內部)의 분열(分裂)은 제국을 허약(虛弱)하여 만들고, 결국은 외세(外勢)에도 무력(無力) 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構造的矛盾)에 빠지면 그것으로 제국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역사(歷史)의 교훈(敎訓)입니다.
당대의 강대국도 이러한데 일반 군소 국가(群小國家)들은 말 할 필요가 없겠죠?
우리는 강대국이 아닌데 요즘의 현실을 보면 어찌도 강대국 말기(末期)와 비슷한 분열(分列)의 모습만 보이는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카이로부터 케이프타운까지 영국의 지배를 풍자한 그림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몰락의 조짐(兆朕)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에 위치한 독일이 통일(統一)을 이룬 후 위협적(威脅的)인 경쟁자(競爭者)가 되었고 대서양(大西洋) 건너 미국은 경제력(經濟力)에서 영국을 압도(壓倒)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0세기 전반기(前半期)에 연이어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초강대국(超强大國)의 몰락을 가속화(加速化)시켰습니다.
결국 미국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승전국(勝戰國)의 지위(智威)를 차지(借地)했으나 종전 후(終戰後)에 영국의 위상(位相)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대서양 회담에서 영국은 중립국 미국의 가랑이를 잡고 도와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더불어 그동안 제국(帝國)의 근간(勤幹)이던 식민지(植民地)들은 수탈(收奪)해서 얻는 이익(利益)보다 유지(有支)에 들어가는 비용(費用)이 커지면서 애물단지로 변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존심(自尊心)을 놓으려 하지 않던 영국에게 1956년에 벌어진 제2차 중동전쟁(中東戰爭)은 더 이상 자신들이 초강대국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認定)하게 되는 결정타(決定打)가 되었습니다.
지난 제국주의 전성기 시절(帝國主義全盛期時節)에 툭하면 써먹던 약소국(弱小國)을 상대(相對)로 한 침략 전쟁(侵略戰爭)이 불가능(不可能)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2차 중동전쟁 당시 영국 항공모함 이글(Eagle)에 비상 착함한 드 해빌랜드 씨 베넘(de Havilland Sea Venom)
결국 영국은 현실(現實)을 인정(認定)했고 그에 맞춰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과거(過去)와 같은 위세(威勢)를 부릴 수 없기에 애완견(愛玩犬)이라는 비아냥을 받을 만큼 동맹(同盟)인 미국에 철저히 의존(依存)했습니다.
이런 변화(變化) 속에 20세기 중반(中般)까지 무기사(武器史)에서 엄청난 흔적(痕迹)을 남긴 군용기 산업(軍用機産業)도 서서히 몰락(沒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60년대가 되자 영국은 해군(海軍)의 시 빅슨 전투기(Sea Vixen)와 공군의 헌터 전투기(Hunter)를 교체(交替)해야 했습니다.
↑영국이 독자 개발한 마지막 전투기인 해리어
↑미 해병대에 F-35B가 도입되면서 순차적으로 도태가 되고 있는 AV-8B 해리어 II 전투기의 공중폭격훈련 영상입니다. AV-8B 해리어 II는 미 해군 및 해병대와 스페인 해군, 이탈리아 해군의 함재기용으로 운영이되었는데요,
수직 및 단거리 이착륙시 연료 소모량이 크고 다량의 연료 탑재를 위해 탑재 중량이 제한이 되는 단점도 있었지만 이륙과 착륙의 공간 제약이 적은 장점때문에 함재기로 각광을 받는 전투기입니다.
이때 개발 막바지 단계(壇戒)인 수직이착륙기(垂直離着陸機, Vertical takeoff and landing, VTOL)인 P.1127(이후 해리어로 제식화 됨) 획득 사업(獲得事業)을 마지막으로 전투기 단독 개발(單獨開發)을 포기(抛棄)하고 사상 처음으로 미국에서 주력기(主力機)를 도입(導入)하기로 결정(決定)했습니다.
제2차 대전 중에 국산 전투기의 공급량(供給量)이 부족(不足)해서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와 사정(事情)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게 영국은 오랫동안 국산전투기에 대해 가져왔던 자존심(自尊心)을 내려놓았습니다.
↑영국이 전투기 독자 개발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도입한 F-4K 팬텀
이때 눈에 들어 온 것이 다목적기(多目的機)인데다 함재기(艦載機)로 개발된 미국의 F-4 팬텀(Phantom)이었습니다.
1965년 영국은 F-4J형을 기반(基盤)으로 하는 영국산 팬텀을 주문(注文)했습니다.
이때 내세운 최소한(最小限)의 자존심(自尊心)은 장비(裝備)와 부품(部品)의 상당 부분을 영국산으로 충당(充當)하고 유지 보수(維持補修)도 영국이 담당(擔當)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로지 영국만을 위한 해군형 F-4K 팬텀 FG.1와 공군형 F-4M 팬텀 FGR.2가 탄생(誕生)했고 지난 1991년까지 활약(活躍)했습니다.
↑시험 비행을 위해 이륙중인 KF-21 실험 6호기
이후 영국은 엔진, 사출좌석(Ejection Seat, 射出座席) 같은 여러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력(技術力)을 유지(維持)하고 있음에도 단독 개발(單獨開發) 대신 토네이도(Tornado), 타이푼(Typhoon)처럼 다자간 협력(多者間協力)이나 F-35B처럼 처음부터 미국의 사업에 참여해서 주력기(主力機)를 획득(獲得)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투기 개발은 전통(傳統)의 강대국(强大國)도 어려워하는 도전(挑戰)입니다. 현재 우리는 그런 어려운 길을 묵묵히 가고 있습니다. 고난(苦難)을 극복(克復)하고 노력(努力)한 만큼 좋은 성과(成果)가 있기를 기대(期待)합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