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일: 5월12일(7월30일)
헤르젝 노비의 성 레오폴도 만딕 사제, OFM Cap.
San Leopoldo Mandic
30 luglio (12 maggio)
Castelnovo di Cattaro (Croazia), 12 maggio 1866 - Padova, 30 luglio 1942
Etimologia: Leopoldo = che si distingue, dal tedesco
Saint Leopold Bogdan Mandic
Also known as : Adeodato Bogdan Mandic, Apostle of the Confession, Apostle of Unity, Bogdan Ivan Mandic, Brother Leopold, Leopoldo of Castelnuovo
Born : 12 May 1866 at Herceg Novi, Dubrovacko-Neretvanska Croatia as Adeodato
Died : 30 July 1942 at the Friary in Padua, Italy of oesophageal cancer
Venerated : 1 March 1974 by Pope Paul VI (decree of heroic virtues)
Beatified : 2 May 1976 by Pope Paul VI
Canonized : 16 October 1983 by Pope John Paul II
Leopoldo = che si distingue, dal tedesco(that it is distinguished, from the German)
Name Meaning: the God-given one (Bogdan)

성 레오폴도는
1866년 5월 12일 카스텔노보에처 태어나, 카푸친 형제회에 입회했다.
영웅적인 희생 정신으로 일생을 거의 고백소에서 보냈다.
고해성사 때 그의 훈계는 사람들에게 용서와 위로, 빛을 주었다.
그는 하느님께 동방 형제들의 회귀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1942년 7월 30일 파도바에서 선종하였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We have in heaven the heart of a mother,
The Virgin, our Mother,
who at the foot of the Cross suffered as much as possible for a human creature,
understands our troubles and consoles us."
- Saint Leopold Mandic,Capuchin

1866년 5월 12일 달마티아(Dalmatia)의 카스텔누오보에서 태어난 성 레오폴두스 만딕(Leopoldus Mandic, 또는 레오폴도)은 매우 작은 키에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겸손함, 침착함,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자신의 전부를 내놓을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지녔었다. 그는 우디네(Udine)의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1884년 수련기를 보내고,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와 베네치아(Venezia)에서 수학한 후 1890년 사제품을 받으며 레오폴두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동유럽에서 선교를 하고자 했던 그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네치아 지방에서 소임을 받았으며 파도바에서 40년 동안 살게 되었다. 인종과 종교가 다른 지역에서 성장한 그는 교회의 완벽한 일치로의 재건을 꿈꾸고 노력했다. 유명한 아르스(Ars)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Maria Vianney)처럼 성 레오폴두스의 특별한 은사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자신을 ‘새장에 갇힌 새’로 표현했듯이 그는 고해신부와 영적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1962년 성 레오폴두스의 복자품에 관련된 결의문에서 라라오나(Larraona)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분의 일상은 이러했다. 아침 일찍 미사를 지낸 후 고해소에 하루 종일 앉아 고백을 들었다. 어떠한 불만도 없이 40년 동안 이 소임을 충실히 해냈다.”
그는 용서와 평화를 증진하는 중심이 되었고, 그의 삶은 화해의 성사(고해성사)의 중요성과 이 성사를 통해 지상 여정에서 얻게 되는 안식의 중요성에 대해 사제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그의 시복 시성은 단기간에 추진되었다. 당시 교회법은 후보자가 복자품에 오르기 전에 50년이 경과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성 레오폴두스의 성덕이 너무도 명백해서 30년이 조금 지난 197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983년 10월 16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아르스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OFS) 축일: 8월4일


인정이 넘치는 카푸친 고해사제, 헤르젝 노비의 성 레오폴도
고해성사에 대한 나쁜 경험이 좋은 고해사제가 되는 동기가 되다
복단 요한 만디츠(Mandic)가 여덟 살 때에, 그의 누나는 어떤 사소한 잘못 때문에 복단을 혼낸 뒤 고해성사를 받으러 성당으로 끌고 갔다. 사제는 복단에게 보속으로 성당 한 가운데 한 동안 무릎을 꿇은 채 있으라고 했다. 나중에 그는 그 사건을 기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깊게 슬퍼하면서 거기에 머무르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사소한 잘못 때문에 아이를 이토록 엄하게 다루어야 하나? 내가 크면, 형제가 되고 고해사제가 되어 죄인들의 영혼들에게 크나큰 자비심과 선량함을 행사하는 형제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하여 약속한 대로, 복단 만디츠는 '헤르젝 노비의 레오폴도'라고 불리게 된 카푸친 형제가 되었고, 교회의 가장 유명하고 다정한 고해사제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죄인들을 자비롭게 다루는 모든 사제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다문화적 배경
1866년 5월 12일, 복단 요한 만디츠는 현 모네네그로, '헤르제그 노비'라는 곳에서 카롤로따 짜레비츠와 베드로 만디츠의 열두번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이탈리아말로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라고들 하는 '헤르젝 노비(Herceg Novi)'는 '신성(新城)'이라는 뜻이다. 베니스의 관구에서 온 카푸친들은 1688년부터 헤르젝 노비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먼저 해군 사목에, 그리고 나중에 설교에 종사했다. 헤르젝 노비의 다민족 주민들은 크로아티아, 그리스, 세르비아, 러시아, 터키 사람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은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매우 다각적인 지역이었다. 그런 만큼 로마 가톨릭 외에 정교회, 네스토리우스 교파, 그리스도 단성론자, 회교인들이 고루 섞여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한 환경에서 로마 가톨릭 신앙이 힘차게 살아남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베니스의 카푸친들 덕분이었다.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이'가 하느님께 자신을 드리다
세례명인 ‘복단(Bogdan)’의 뜻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이(라틴어로 Adeodatus)' 라는 뜻이다. 복단의 부모님은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지만 정치적인 변동에 의해 그 동안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한 가족의 곤경과 고뇌를 어려서부터 접해온 덕분인지 복단은 특히 사회적으로 품위를 잃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다.
1882년 5월 2일, 열여섯 살인 복단은 집을 떠나 베니스의 카푸친 작은 형제들의 소신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이탈리아, 우디네(Udine)로 갔고, 2년 후 1884년 5월 2일에 비첸사(Vicenza)에 있는 바사노 델 그라파(Bassano del Grappa)의 형제회에서 수도복을 입고 레오폴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리고 1885년 5월 4일에 첫 서약을 했고, 1888년 10월 28일에 파도바에서 종신서약을 했다. 1890년 9월 20일, 24세인 레오폴도 형제는 베니스에서 사제 성품을 받았다.
선교 생활에 부적합한 이로 여겨지다
성인이 된 이후의 모든 삶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지만, 선교사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는 고향에 돌아갈 희망을 품은 이 젊은 사제는 이탈리아 국적을 여전히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었던 제1차 대전 때에도 자신의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국적을 포기함으로써 고향을 배반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전쟁 기간 동안에 남이탈리아에서 국내 유배형(流配刑)을 살아야만 했다. 대전 후에 레오폴도 형제는 자신의 고향에 파견되어 설교 활동을 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특히 언어 장애가 있었고 더듬기까지 했기 때문에 설교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135센티 미만의 키에 연약한 몸은 굽었으며 얼굴도 창백했다. 시력도 안 좋았고 위장병과 신경통에도 자주 시달렸다. 그러한 이유로 카푸친회의 봉사자들은 레오폴도 형제를 설교와 선교에 적절하게 여기지 않았고, 대신에 그를 고백성사 사제로 임명했다.

교회일치에 헌신하도록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
사실 그는 1887년, 기도 중에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몸 바칠 부르심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고, 특히 성모님의 중재로 그 꿈을 이루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더욱이 동방 유럽으로 선교사로 파견될 준비로 그리스어와 그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와 슬로베니아어도 배우고 있던 터라 그에게 있어 순종이란 적지 않은 고통을 준 희생이었다. 레오폴도는 그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새와 같지만 내 마음은 바다 저 너머에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여인의 계시로 인해 자신의 이 특별한 사명은 선교지에 있지 않고 고백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인은 그에게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 고해성사 안에서 당신이 도와주시는 모든 영혼이 바로 당신의 동방(東邦, 선교지)임을 알려주라고 저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레오폴도 형제는 교회일치의 사명에 대한 열정을 전혀 잊지 않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내가 동부의 민족, 즉 '동방교회의 반체제인사'들의 구원을 위해 뽑힌 것에 대하여 나는 하느님 앞에서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봉사직무를 통해서 오직 한 목자 아래 단지 한 양 떼 밖에 없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도록, 나는 나를 은혜로이 뽑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의 선하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선교의 꿈은 고해실에서 이루어지다
비록 자신의 하고자 하는 일과는 달랐지만 레오폴도 형제는 그 임명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 일을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고백실 안의 훌륭한 목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국 장상들의 불허에 온전히 복종했던 것이다. 고요하고 자비로운 성품으로 타인의 위한 봉사에 항상 준비된 그는 애덕의 실천을 위해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그는 임명된 모든 곳에서 사람들의 사랑과 칭찬을 받았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었던 카푸친 형제회 안에서는 봉사에의 몰두 때문에 자주 공동체 활동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로 오해하고 비난하는 형제들이 많았다. 또 고백자들을 너무 너그럽게 대하는 그의 태도에 반기를 드는 형제들도 있었다. 하지만 레오폴도는 고백성사의 직무를 인간적 품위에 걸맞은 자애로운 존경심과 이해심으로 이행했다. 사제의 친절함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화해의 성사 안에서 고백자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나쁜 모범' 따르기
어떤 사람들은 레오폴도 형제가 죄인들에게 '소매가 넓은(di manica larga)' 사람이라고 투덜댔는데, 생생한 관용 표현인 이 이탈리아 말은 죄인들에게 지나치게 너그럽다는 뜻이었다. 이 때문에 레오폴도 형제가 주교에게 밀고 당했을 때에, 그는 주교관 벽에 걸린 십자고상을 가리켜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죄인들을 향해 소매가 넓다'는 이유로 저를 나무라신다면 저는 주님께, '파로온 베네네토(Paròn Benedeto : 이탈리아말, 베니스의 사투리로 복되신 보스라는 뜻인데 레오폴도가 흔히 하느님을 높여 이르는 말)', 이에 대하여 당신께서 저에게 얼마나 나쁜 모범을 보여주셨는지요! 저로서는 아직 영혼들을 위하여 죽으신 그 어리석은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는걸요!'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이어서 그는 "어떤 사람들은 내가 고백자들에게 과도하게 착하게만 군다고들 하는데, 사실 사람들이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 저는 그들이 하느님의 용서를 원한다는 충분한 증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것을 뛰어 넘습니다." 라고 말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매일 고해성사를 받아야 했던 성스러운 고해사제
하지만 레오폴도 형제에게 이런 부드러운 태도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성질이 불같이 과민하여 상처를 쉽게 받는 성격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타고난 성질 때문에 평생 동안 싸워야 했고, 그 때문에 분노라도 할라치면 언제나 고해성사를 받았던 것이다.
고해성사를 매일 받아야 했던 고해사제였던 레오폴도 형제는 그러한 자신을 이겨내며 고백자들에게 조그만 보속을 주고는 남는 보속을 늦은 밤에 자신이 직접 했다. 어쩌면 레오폴도 형제의 가장 큰 개인 보속이라면 겨울에는 냉장고 같으며 여름에는 불가마 같은 (넓이197.5, 길이127.5, 높이187.5 센치) 작은 고백실에서 하루 종일 머물러야 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고해자들을 편안하게 해준 친절한 사제
그는 회개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안심하세요. 제 어깨에 모든 것을 지우십시오. 제가 떠맡을 거예요." 한 증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수년 동안 성사들을 받지 않았던 파도바의 한 신사한테 이런 경험담을 들었습니다. 그는 매우 당황되고 헷갈려서인지 고백실에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기는커녕 그만 사제석에 앉아 버렸는데, 레오폴도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해자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그의 고백을 들어 주셨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의 '복되신 여성 보스'이셨다
레오폴도 형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이 있었는데, 그분을 자신의 ‘파로나 베네데타(Parona Benedeta)’ 또는 ‘복되신 여성 보스’라고 일컫곤 했다. 무염시태의 부속제단에서 미사를 거행했으며 자주 묵주기도와 성모소일도를 낭송하곤 했다고 한다. 1934년 7월, 파도바 교구의 루르드 성지순례에 참석한 그는 그 곳 성모님께로부터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영감을 받았다. 성모님께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늘에는 우리가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어느 피조물인 인간이라도 겪을 수 있는데 만큼 모든 고통을 겪으신 동정녀이신 우리 어머니께서는 우리의 고민을 이해해주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레오폴도의 애덕
또한 그는 임신부들과 어린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 있어서, 병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파도바의 주변 병원에 자주 방문했으며, 또 아프거나 나이가 많은 형제들을 위로하려고 카푸친회의 환자실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레오폴도 형제는 의사들을 특히 좋아했는데 그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반복하곤 했다. "하느님께서는 의사이시자 의약이십니다."

사목적 목표에 따른 평생 교육
사실 그는 의사들과 심리학 전문가들과 교류함으로써 더욱 더 좋은 고해사제가 될 방법들을 터득하고 노력했다. 그리고 평생 학생이길 원했던 레오폴도 형제는 죽을 때까지 성 토마스 데 아키노나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학 저서를 읽었고 최근의 윤리신학과 사목신학의 연구 자료들도 공부하곤 했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인상만으로도 사람의 영혼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며, 회개자 스스로 죄를 고백하기 전에 그는 사람들이 지은 죄를 다 헤아릴 수 있었다. 이 능력은 한 편으로는 초자연적 은사이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 신학과 자연학 연구의 결과였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선한 인성에 묻어난 배려심의 결과였다.
커피에 대한 의존도가 그의 죽음을 재촉했나?
고백실에서 그의 모든 생을 헌신한 레오폴도 형제는 졸음을 피하기 위해 뜨거운 커피를 많이 마시곤 하였는데 결국 그 커피 때문에 고통스러운 식도암에 걸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를 찾아오는 회개자들에게 "자! 저 여기 있어요. 그냥 들어오세요! 편히 쉬시지요!"라고 말하며 환영하였다. "사제는 오로지 사도직의 수고로 인해 죽어야 합니다. 그 외 다른 죽음은 그 어느 것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라는 자신의 권고를 끝까지 실천한 것이었다.

끝까지 노고하시다 결국 죽음 자매를 만나다
마침내 1942년 7월 30일, 레오폴도는 미사 제의를 입다가 제의실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자신의 독방으로 실려가 병자 성유를 받은 뒤, 그곳에 모인 온 형제들과 함께 '살베 레지나(Salve Regina)'를 낭송하는 도중에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 부분에서 선종했다. 그가 76세가 된 해, 카푸친 형제회에 입회한지 60년이 되었고 사제품을 받은지 52년이 되던 해였다. 그의 죽음은 역시 식도암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분 신체의 다른 곳은 모두 부패했지만 '고백성사' 사죄경을 주었던 그의 오른손은 오늘날 까지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1976년 5월 2일, 바오로 6세 교황은 헤르젝 노비의 레오폴도 형제에게 시복을 주었다. 그리고 1983년 10월 1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에게 시성을 베풀었다. 오늘날 성 레오폴도는 그의 삶의 지향과 모범으로 인해 '일치의 사도', '고백성사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다.

이루어진 예언
죽기 전에 레오폴도 형제는 고백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 형제회 건물마저 호되게 (폭탄을) 맞을 것이지만, 이 작은 독방은 맞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는 맞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영혼들에게 그토록 큰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에 이곳은 당신의 선하심에 대한 기념물로 남아야 합니다." 그 예언대로 1944년, 성당과 형제회의 건물은 미국 공군의 공습을 받아 완전히 무너졌는데 성 레오폴도의 고해실과 성인이 좋아했던 성모상만은 무사히 남았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성모신심이 깊은 이 고해사제의 평생 헌신에 대한 이 얼마나 좋은 기념물인가!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성 레오폴도 만딕 사제는 1976년 5월 2일 교황 바오로6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83년 10월16일 시성하셨다.
[고해성사의 중요성 재천명] 만딕 신부 시성식…그 배경과 의미 (상)
성년 · 시노드와 맥락 함께해, 화해와 용서의 모델로 제시
지난 10월 1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례로 거행된 복자 레오폴드 만딕 신부의 시성식에는 10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참석, 일생을 고백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고자했던 한 크리스찬의 시성을 지켜보았다.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 발표와 더불어 거행된 만딕 신부의 시성식은 내년 103위의 시성을 앞둔 한국교회의 관심을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불러일으켰다. 다음은 레오폴드 만딕 신부의 시성식에 참가하고 돌아온 이정운 신부의 참관기이다. <편집자註>
시성식이 거행된 10월 16일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재위 5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고 또 10월 초부터는 그리스도의 구원성업 1950주년을 기념하여 선포된 특별 성년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기 위해 ‘화해’를 주제로 한 주교 시노드가 열리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 평생 화해의 직무를 이행한 한 사제의 시성도 현대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사목적인 뜻과 그리스도의 참뜻을 전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세상에 자비로우신 구세주를 닮아 세상을 밝히는 위대한 성인의 생애를 우리에게 바로 새기기 위해 현대의 성인 레오폴드 만딕 신부를 성인 반열에 올려놓으신 것이다.
구원의 특별성년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린 인간을 죄의 속박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가까이 가면서 자비로우신 구세주의 마음에 달려가도록 함이 그 목적이다. 말 그대로 구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상징하는 성년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성년문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고, 이 사랑을 받아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사랑을 전하는 사도적 사명 안에서 교회는 구원성년을 선포하고 이 성년 안에서 전세계 각처에서 모인 주교 시노드의 주제를 하느님의 사랑에 귀의하는 인간의 참회를 역설하면서 닫혀있는 마음의 문을 열라고 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문으로 오라고 하고 있다.
용서를 청하러 와도 마음 안에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모진 마음을 열기위해 하느님의 구원의 문, 성년문, 사랑의 문, 용서의 문을 열어놓았다. 성년문이 열려있다. 이는 바로 천국의 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성업 1950주년 기념성년을 기해 모든 참회자들을 받아들이는 고백성사에 대하여 현상(現象)에만 집착하고 있는 수많은 신자들의 나태성을 일깨우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 모두 나에게 오라고 이르시는 주님의 마음에 초대되기 위하여 마련된 것 주교 시노드이다.
9월 말에 개최하여 10월 말에 폐막된 화해와 일치, 참회와 용서, 사랑과 만남에 대한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구세주의 마음 안에 달려가는 자신을 도로 찾고 자신도 사랑과 자비의 문을 열어 용서를 청하는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전해주는 각성을 요청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이 거룩한 해를 보내면서 세계 신자들의 목자로 계시는 교황님과 주교님들은 한가지로 자비로우신 구세주를 닮아 참된 목자로 살며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을 찾아서 항상 용서와 사랑의 문, 성년문, 화해의 문, 일치의 문을 열어 놓고서 이 성년문의 참뜻을 찾아내었다.
그래서 평생 고백소에서 지낸 레오폴드 만딕 신부를 이 기회에 성인반열에 올렸다.
[가톨릭신문, 1983년 12월 11일, 이정운 신부 · 수원교구 사목국장]

[고해성사의 중요성 재천명] 만딕 신부 시성식…그 배경과 의미 (하)
평생을 고백신부로 살아, 참회자들을 주께로 인도
이는 모든 신자들과 사제들에게 주님의 사제 직무를 알게 함이었고 새로운 신자들은 항상 자비로우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 나아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사제들은 신자들의 고백을 언제든지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하여야 함을 레오폴드 만딕 신부님의 전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었다.
레오폴드 만딕 신부님은 1866년 5월 12일 까스뗄노보(Cast-einovo)에서 탄생, 1884년 5월 2일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1890년 9월 20일 사제로 서품되었고, 1942년 7월 30일 선종하였다. 76세의 생애 동안 이태리 북부 파도아(Padoa)에서 50년간을 고백신부로 일하였다. 그는 생애 동안에 하루도 건강이 좋은 날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작은 키에 갸냘픈 체구였고 언변도 부족하여 설교도 잘하지 못하였다.
그는 오로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하루에 12시간 내지 15시간 고백성사를 주며 지냈다. 그가 고백성사를 집전한 고백소는 여름에는 가마솔같이 뜨겁고, 겨울에는 냉장고같이 추웠다한다. 밤중에도 고백성사를 요청하는 많은 참회자들에 “예, 어서 오시오” 하고 항상 반갑게 맞이한 것은 그가 사제가 되는 순간부터 화해를 위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그의 사명이 화해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제가 되자 처음에는 동부 유럽에서 전교하기를 희망했으나 장상들이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지방인 달마티아(현재 유고슬라비아)에서 평생 일하기를 원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 로마와 달리하는 동방교회가 있어서 이 교회와 일치를 목표로 살고자 결심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장상들의 허락이 내리지 않자 그는 파도아에서 50년이란 긴 세월 동안을 오로지 고백성사 사목에만 전념하였다. 성녀 소화 데레사가 가르멜 봉쇄수도원에 속하여 평생을 평화를 위하여 일을 하였듯이 그는 작은 골방 고백소에서 주님의 뜻에 복종하여 생애를 바쳤다.
그에게 찾아오는 모든 참회자들 가운데는 다른 이교도도 있었다. 그는 더욱 하느님께 이교도들을 하느님의 하나의 양우리에 들어오게 할 수 있게 하기위한 영신적 봉사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였다. 그는 그가 선종하기 바로 전날에도 50명의 사제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나의 전생애의 목적은 ‘하느님의 계획’이었다. 나는 비록 하잘 것 없지만 하느님의 지혜가 명하는 대로 갈라진 형제들이 돌아오도록 노력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항상 고백소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거기에서 그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또 이르기를 “역시 나는 나의 보잘것없는 생애보다 더욱 위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영혼들 때문에 내가 이곳에 머무를 수 없는 순간까지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겠다.”고 말하였다.
약한 건강으로 오로지 영혼들을 건지려는 열망 안에 살아온 만딕 신부님을 구원의 1950주년 기념성년이 이루어지고, 맺고 푸는 권한을 베드로에게 맡기신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5주년이 되는 날 주님의 사제로써 이 구원의 성사인 고백성사를 평생 주면서 살으신 신부님의 시성식이 거행된 것이다.
구원의 1950주년 기념성년 안에 우리는 참된 고백성사를 받고 성년 지정성당을 순례하면서 그 성문이 바로 로마 베드로 성전 성년문, 주님의 사랑의 문, 자비의 문, 사슬에서 풀린 자유의 문을 새겨야 하겠고, 고백성사를 잘 받아야하고, 진정 우리는 두려움 없이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달려가야 하겠다.
[가톨릭신문, 1983년 12월 18일, 이정운 신부 · 수원교구 사목국장]
(가톨릭홈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홈에서 www.capuchin.or.kr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 인준받은 회칙 1:1
“우리의 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복음을 최고의 법으로 따르고
구원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처럼 우리 마음에서 새깁시다.” -카푸친 회헌 1:6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던 작은 형제회의 최후의 개혁으로서
1528년 교황님의 인준을 받은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기도와 가난과 더욱 작음으로써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 동료들의 생활양식을 할 수 있는 만큼 닮으려고 했다.

형제애 - 카푸친들은 형제들이다
“너희는 모두 형제이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다.” 마태오 23,8-9
한 분 뿐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수도회로서 우리 카푸친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대로 모든 피조물의 맏형이 되신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하는 형제들이다.
사실 우리 형제회를 하나로 묶어 주시는 분께서는 주님의 성령이시다.
그래서 같은 부르심을 받은 우리 수도회의 모든 회원들은 사제든 평수도자든 차별 없이 형제라고 불린다.
참 형제로서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어려울 때 서로를 도와주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서로를 위로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형제애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어디서 만나든지 한 가족임을 서로간에 보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신뢰심을 가지고 필요한 것을 서로간에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정성되이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준받은 회칙, 6:7-8
우리의 형제애는 우리 자신들에게만 제한되있지 않으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에까지 퍼져야 하는 것이다.
위계적이고 왜곡된 권위에 기초한 사회 제도들과 인종 차별, 민족간의 분쟁,
빈부간의 계층갈등, 노동력 착취, 생태계의 파괴 등에 찢어진 세상에
우리가 무엇보다도 이바지할 점은 바로 우리의 복음적 형제애이다.

관상 - 하느님께 기도하는 형제들이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오 6.6;8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는,
프란치스코를 기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스스로가 곧 기도 자체인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는 카푸친 형제들의 생활 목적이기도 하다.
개인의 관상기도와 공동체의 전례기도는 우리 카푸친들의 생활양식과 모든 사도직을 가능하게 한다.
카푸친 회헌에서 기도에 대한 다음의 내용을 읽을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릴 기도는 사랑의 호흡으로서, 성령의 활동에서부터 비롯하여
그 활동으로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내면적인 사람은 귀담아듣는다.” -회헌 6:45
우리 카푸친들의 관상기도는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매일매일 자연과 인류역사,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의 양심,
성서에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담아 듣는 기도라는 뜻이다.
이 관상기도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하여 침묵과 고요와 충분한 시간과 고독이 필요하다.
이런 조용한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에 응답하여,
그분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서부터 부르짖는 소리로 “아빠, 아버지”라고 기도를 바치신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과 성체에 대해서 자주 묵상하여
마음으로부터 불타 오르는 사랑으로 사랑 자체이신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도록 노력했다.
그리스도의 육화와 수난, 성체에 중심이 되는 우리 카푸친들의 기도도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마음의 기도 또는 정신적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긴밀히 체험하며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게 한다.
이 긴밀한 체험과 관계는 전례 시간 외에도 침묵 속에서 바치는 개인기도 시간으로 길러진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