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장 35 - 37절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메시야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는 반드시 다윗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그렇게 예언을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 9장 7절 말씀에 보면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렇게 예언을 하셨고, 아모스 9장 11절에서도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이렇게 예언을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던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셨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성경에 대해서 몰랐을 리가 없는데 이런 질문을 던지시면서 말씀하신 내용이 시편 110편의 내용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10편은 메시야 시편으로 유명한 시편인데 시편 110편 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 중에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를 하느냐? 이런 질문을 던지셨던 것입니다.
시편 110편 1절 말씀과 마가복음 12장 36절 말씀이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데 36절에는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가장 확실하게 다른 부분은 시편에서는 ‘여호와께서’라고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 12장 36절에서는 ‘주께서’라고 표현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칭호를 부르기 두려워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습관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쓰는 것조차도 두려웠던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할 때는 쓰던 붓을 놓고서 새 붓을 들어서 사용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시편에 기록된 ‘여호와’를 마가복음에서는 ‘주께서’라고 고쳐 사용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내’는 다윗 자신을 표현한 것이고, 뒤에 나오는 ‘주께’는 메시야, 바로 예수님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해석을 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예수님께 이르시되 하나님이 예수님의 원수를 예수님의 발아래 둘 때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이렇게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 다윗은 예수님을 표현하면서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오실 메시야를 자신의 주, 하나님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물어 보았더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 모두가 쉽게 이해를 하면서 너무도 지당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통찰력에 대해서 놀라며 즐겁게 여겼던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지금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에게 어떤 권세가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기 원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원수를 예수님의 발아래 둘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전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정복지에 들어가서 통치자의 권세를 가지고 정복한 사람들을 그 발아래 무릎 꿇게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원수를 발아래 두게 하시겠다는 것은 모든 원수, 사단의 세력을 제압해서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바로 그 순간에 하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 말씀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렇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가장 첫 번째 복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예언의 말씀을 다윗은 다시 한 번 언급했던 것이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최후 승리자가 되실 것임을 선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가 최후 승리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지금 이기고 있고 예수님의 승리가 안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던 것처럼 이 말씀의 역사도 반드시 지켜질 것이기 때문에 최후 승리자 되신 예수님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왕좌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누가 최후 승리자입니까? 예수님께서 최후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오늘 하루 우리의 삶도 전혀 달라질 수 있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 안에 있는 확신은 무엇인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게 될 메시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은 그 어떤 것에도 제한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지만 다윗과 비교되지 않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최후 승리자가 되실 분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친구처럼 다가오셔서 함께 하자고 말씀하시는데 거절할 이유가 무엇을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한계 때문에 자꾸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나쁜 습관을 가지게 되는데 그런 믿음으로는 최후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선택의 순간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아래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이 되느냐,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아서 최후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느냐! 그 어느 것으로도 제한할 수 없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귀하신 이름 예수님을 부르면서 최후 승리자의 꿈을 꾸며 소망 중에 살아갈 수 있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고, 그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는 복된 하루를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