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근본인 ‘나’란 무엇인가.
죄를 짓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서 한없는 고생을 하기도 하고
복을 지어서 천상(天上)에도 나고 사람 세상에 나와서
국왕 대신이나 큰 부자로 복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그 근본 주체는 다 마음이란 ‘내’가 하는 일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그 핵심을 잡아 내보라.
우주 전체가 내가 아닐 게고 오장육부인가, 귓구멍인가, 머리인가, 다리인가, 팔인가,
그 핵심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먼저 확인되어야 한다.
옛날에는 심장이 뭘 생각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대뇌(大腦)가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면 대뇌의 어느 세포인가. 대뇌만 하더라도 세포가 여러 수백만 개인데 그 가운데
어떤 세포가 나라 할 수 있을까. 그것 다 종합한 것이 나타나면 너무 막연한 말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물건을 모아 놓은 세포의 집단이지 어째 그게 나일 수 있는가.
나라는 소리는 그 핵심을 말한다.
여기 40억 인구가 있지만 그건 다 내가 아니고 마누라도 부모 형제도 내가 아니다.
내가 무엇인지 모르고 오늘은 이 사람 따라가고
내일은 저 사람 따라가고 엎어졌다 자빠졌다. 사는 것이다.
한평생 살아 봐도 누구를 위해 살았는지, 나를 위해 살았는지,
남을 위해 살았는지 까닭도 모르고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 바보가 되어 한강에 가자고 하면 한강에 가고 창경원(창경궁)에 가자고 하면 창경원에 가고
이리 가라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모두가 이런 식이다.
장사하는 사람도 다 그런 식이고 정치하는 사람은 더하다. 흘러가는 물과 한 가지다.
물이 흐르는 것은 정처 없이 그저 흐르다가 바위에 부딪히면
툭 치고 흙탕물이 되기도 했다가 또 거기서 뺑뺑 돌다 막 뒤집힌다.
한강 물이 어떻게 흐르느냐 하면 여러 억만년 흐르긴 흘러도 어떤 모양으로 흐르는 일정한 형태가 없다.
저쪽 모래에 부딪혀 모래를 뒤집고 흐르고 그러니 한강 물이 일정한 모양이 없다.
강원도에서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참 풍파가 많다.
강원도 오대산 산꼭대기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가고
고기가 마셔 버리기도 하고 사람이 받아먹기도 하고
나무뿌리로 들어갔다가 또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는 놈 그 신세가 어찌 될는지 모른다.
우리 인간도 한평생 사는 신세가 어찌 될는지, 오늘은 오늘 생각하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고
그러니 서양 철인들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하는데
이 말은 알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니까 그렇게 단정해 버린 말에 불과하다.
곧 나는 없다는 소리와 한 가지다.
허무한 인생이고 물거품 같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시집을 잘 갔느니 장가를 잘 갔느니 돈이 많으니 한다.
그렇지만 그게 어째서 제 돈인가. 돈에 이끌리는 것이다.
돈 일 원 모아 놓으면 일원에 구속되고 저걸 누가 집어 갈까 꾸어 달라면 어쩌나.
백만 원 모아 놓으면 백만 원만큼 생각이 많고 백억 원 모아 놓으면
백억 장이 낱낱이 사람을 눌러 밤에 잠이 안 오고 꿈에서까지 걱정이다.
그러니까 돈 많은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원수가 많아지고 친한 친구 다 떨어지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독해진다.
권리가 높아도 높을수록 원수가 많고 고독해진다.
그러니 돈도 모을 게 못 되고 권리도 높을 게 아니다.
개돼지 소리 들으면서 모았다가 나중에 죽을 때는
「지금 죽을 줄 알았으면 마음이나 좋게 쓰고 죽을걸.」 그렇게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러니까 일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 때문에 사는 건지 그 까닭을 모른다.
꼭 흘러가는 물처럼 아무 까닭 없이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산다.
깨달으면 지옥도 극락
부처님이 말씀하신 뜻대로 하면 「네가 너를 알고 너대로 살아라.」 그렇게 된다.
왜 빈껍데기만 가지고 사느냐.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하느냐.
가령 이성끼리 상종하는 것을 보더라도 여자가 바람이 나면
오늘 저녁은 이런 남자한테 끌려가고 내일 저녁은 저런 남자한테 끌려가고 그런 건 미친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자꾸 하면 또 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이 세상은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
물질문명만이 발달하고 성(性)을 개방해 놓으면 인생이 고독해지고 허탈해진다.
나를 아껴 주는 사람도 없고 아껴 줄 사람도 없는 신세가 되니
이유 없는 반항과 욕구불만이 되어 자꾸 자살하는 것이다.
결국 물질문명은 인간의 행복을 객관세계에서 얻으려고 하므로 그렇게 된다.
나한테 본래 있는 행복이 정말 행복이다.
죽을 수 없는 마음을 깨쳐 얻어야 영원한 행복이다.
불에 뛰어들어도 안 죽고 칼로 쳐도 안 죽고 원자탄 다 퍼부어 놔도 까딱없는 것
그 자리에서 얻어진 것이 비로소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렇게는 못됐다고 하더라도 그런 원리를 알고 믿기라도 해야 한다.
안심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까짓 돈 천만 원 얻어 놓고 안심할 수야 있는가.
바람만 불어도 어느 놈이 담 안 넘어오나 깜짝깜짝 놀라고 불쌍한 게 돈 버는 재미다.
그러나 마음을 깨치면 정말 돈도 필요 없고 의식주도 필요 없고 생사고도 아무 상관 없는 대-행복을 얻는다.
지구가 다 깨져도 나는 까딱없다.
마음을 깨쳐 놓으면 지옥을 가서 기름 가마에 집어넣어도 거기가 극락이 된다.
그 자리는 뜨겁고 찬 것도 없고 마음대로 안 돌아가는 게 없으니
이 마음 앞에 나를 어찌할 수 있는 법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그래도 오늘 저녁 법문한 후에 저녁밥을 안 준다고 위협하면 이 법회 안 할지도 모른다.
저녁밥 한 그릇 있으니 안심하고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의식주 밥 세 그릇에 생명을 달아-가지고 사는 것이고
육신에 매달려 온갖 고생을 하느라고 밤에 잠을 안 자고 허덕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주인과 노예와의 관계에 비할 수 있다.
둥근 것도 인고 모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금강경 전체를 남을 위해 말해 주면 더욱 좋지만,
사구게 열여섯 글자만이라도 남을 위해서 설명해 주는 것은 우주의 핵심인 마음.
만사의 주체인 진짜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므로 그 공덕은 십억 세계에 가득 찬 보배를 가지고
온 중생을 잘 살게 해준 복덕보다도 몇천만 배 큰 것이라고 한다.
물질로 보시해서 얻는 복은 그 과보(果報)도 역시 물질로 받고 몸으로 받는 중생의 과보일 뿐,
복덕 지을 수 있는 주체, 주인공을 찾는 복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을 깨치는 일은 주인이 되는 일이고 영원불멸하는 절대자가 되는 것이지만
객관에 끌리고 몸뚱이로 사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이고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제정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름꾼 만나면 노름꾼이 되고 술꾼 만나면 술꾼이 되고 아편쟁이 만나면 아편쟁이 되고
도둑놈 만나면 도둑놈 되고 깡패 만나면 깡패 되어 온갖 곳으로 다 끌려다니며
마음에도 없는 일을 시키는 대로 종노릇 하느라고 온갖 고생을 한다.
그러니 자기를 아는 사람, 마음을 깨쳐 주객을 초월하여 부처를 안 사람은
누구를 따라가더라도 거기 따라가서 나한테나 남한테나 이익이 되면 따라가지만, 이익이 안 되면 안 간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 따라다니면 덕(德)-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인간이란 몸뚱이를 나라고 속아 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나에게 정말 이익이 되는지도 모른다.
금강경의 사구게 스무 자를 일러주는 것은 곧 영원히 행복한 행복의 모체. 주체를 밝혀 주는 것이지만,
물질로 복을 짓는 것은 아무리 크게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부분밖에 안 된다.
사구게(四句偈)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도 있고, 이 금강경 맨 끝에 가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란 게송도 있다.
또 제26장에 가면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란
게송도 있고 금강경 어느 구절에도 네 글귀의 내용이 다 있다.
물질로 많이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잘해도 종을 호강시켜 주는 폭 밖에 안되고
사구게를 잘 일러주는 것은 수많은 종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일(것)의 주인이 되는 마음을 깨우쳐 준 것이므로 그 공덕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 모든 부처님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경에서 나온다고 한 것이다.
이 마음은 둥근 것도 모난 것도 아니고 얻은 것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며
어떻다고 결정된 내용이 있거나 어떤 개념으로도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라고 하셨던 것인데, 그러면 그 속뜻이 무엇인가.
강의를 안 들으면 칠판도 글씨도 아무것도 아닌 셈이고 아무런 뜻이 없으니, 팔만대장경도 그런 것이다.
그런데 경을 읽어보고 거기서 조금 알았다고 해서 어떤 소견을 내면 그러다간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것이다.
눈먼 봉사가 봉사에 끌려가는 것 한가지여서 나중에는 둘이 다 구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소위 불법이란 참말로 불법이 아니라, 그런 게 불법이다.
불법이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게 불법이다. [소위불법 즉비불법所謂佛法 卽非佛法]」의 뜻은
글자 음성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 마음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설명하는 이 마음자리를 자꾸 생각하면 깨달아지는 때가 있다.
밥 먹다가 깨닫거나 변비로 애쓰다가 대변보는데 툭 터진다.
부처님은 이렇게 물으시고 수보리는 또 이렇게 대답하셨는데 그러면 그 논리가 어디로 들어맞는가.
그것을 자꾸 생각해 보면 탁 깨친다.
이 문자와 인연이 없어서 여기서 깨치지 못하면 더 뒤에서 깨칠 때가 있다.
그리고 이 금강경 보고 못 깨치면 『유마경(維摩經)』보고 깨칠 때가 있다.
이렇게 깨치는 것도 여러 가지다.
「오직 이 법문을 설명할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인생의 가장 근본 문제다. 이것은 한마디로 대답이 안 된다.
동서 오천 년 문화를 다 듣고 나서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학문으로라도 이것은 설명이 안 된다.
부산에 혜월(慧月) 스님이라고 하는 큰 도인(道人)이 계셨다.
이 어른은 일자무식(一字無識)인데 선지식 가운데도 한국 최근세(最近世)에서는 유명한 분이었다.
동네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하게 어린애 모양[樣]을 한다.
당시에 어떤 목사(牧師) 한 사람이 혜월 스님이 불법을 잘 아는 선지식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혜월 노장 스님은 「선생님」하고 부른다. 「예」하고 대답하니
「저 샘물에 가서 물 한 그릇만 떠다 주시오.」
그래서 목사는 할 수 없이 노장님 시키는 대로 물을 한 그릇 떠다 드렸다.
그러니 노장님은 「그게 불법입니다.」하고 대답하셨다.
그렇지만 목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목사가 과거세에 불연(佛緣)이 깊은 아주 수승(殊勝)한 선근(善根)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주 깨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목사로서는 수수께끼도 아니고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싱겁기만 했다.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나 떠 오라고 해 놓고는 불법 설명 다 했다고 하니
그 스님이 무심해서 그런 것인가 어떤 것인가 하고 물러났다.
이에 대한 대답이 고래(古來)로 수백 가지 수천 가지가 되지만
대개가 다 이 혜월 스님이 보이신 거와 비슷했고 그때그때 경우 따라서 방법이 다른 것뿐이다.
- 청담 스님 - <금강경 강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