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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2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루카 8,1-3
감사가 거짓이 되지 않게 하려면!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을 다시 소환해서 매우 조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지만,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고인이 된 최성봉 씨 삶을 되돌아봅니다.
세 살 때 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 맡겨지고 형들의 구타에 이기지 못하고 탈출하여 껌과 박카스 등을 팔며 10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그 10년 동안 산에 산 채로 묻히는 등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게 음악이라 성악을 하기를 원했고 다행히 그를 무료로 가르쳐 준 스승이 있어서 예고에 들어가고 대학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다닐 돈이 없어 학교를 자퇴하고
일용직을 전전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했습니다.
그때 그의 스승에게서 전화 한 통화가 왔고 2011년 tvN ‘코리안 갓 탤런트’ 준우승을 차지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휴대폰 판매원에서 세계적 스타가 된 영국의 폴 포츠와 합동 공연을 하며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021년 코로나로 상황이 어려워졌고 다시 대장암 3기와 전립선암, 갑상선 저하증 및 갑상샘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라 밝혔습니다. 암이 다른 곳으로의 전이가 일어났지만, 3억 대의 수술비 때문에 치료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한강 다리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습니다.
다행히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뛰어내리는 일은 막았습니다.
이때 10억 원을 목표로 후원금 모금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를 만났던 모든 사람은 그가 암 투병 중인지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입고 찍었던 환자복도 인터넷으로 구매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흡연과 음주, 폭식을 일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또한 2천만 원 정도 모인 후원금은 유흥비와 여자친구와의 사치로 탕진했다는 의혹이 일었습니다.
그는 이런 글을 올리고 생을 마감합니다.
“나의 어리석은 잘못과 피해를 본 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고 거듭 사과드립니다.
지난 2년여 동안 후원금 반환 문의해 주신 모든 분에게 반환했습니다.
이제는 죗값을 치르려 합니다.”
그도 처음에는 나름대로 자선하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후원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왜 점차 희망이 아닌 불행을 팔기 시작했을까요?
불행을 파는 이유는 ‘피해의식’ 때문입니다.
나의 불행은 내가 덜 받았다는 불만에서 나옵니다.
고 최성봉 씨는 그래도 당연해 보입니다. 부모에게 두 번, 세 번이나 버려지고 그가 말하듯이 자신에게 부모가 되어주겠다던 사람 중 하나도 자기 곁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더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보호해 줄 부모의 대체자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몸은 컸지만, 어린이로서 보호받고 싶었는데 세상은 그를 이용하고 쓸모가 없어졌을 땐 잊었던 것입니다.
그는 더는 버려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여자 팬에게 사귀자고 할 정도였고 연인 사이로 발전한 사람에게는 폭력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무시하고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은 나의 불행을 파는 사람이 아닌 감사하여 보답하는 삶으로 이끕니다.
성당에서 성체를 영할 때 솟아나야 하는 감사가 이 전환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감사를 하지만, 진정한 감사가 아닐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최성봉 씨의 마지막 글의 앞 부분입니다.
“제 삶의 마지막으로 팬분들께 보내는 글이면서 이 글이 보인다면 저는 이미 죽어있을 것입니다.
2011년부터 정말 많은 분들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마지막 글이라 이 분통함을 알리고 싶지만, 여러분께 받은 사랑이 더 커 마음속에 묻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나름 노력하여 반환해 달라고 한 후원금을 반환하고 마지막 죗값은 안타까운 선택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나름 감사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감사는 내가 가진 돈이 어디에 쓰이느냐로 결정됩니다.
최성봉 씨는 그 돈을 자기를 위해 썼습니다. 감사한다면 그것을 감사한 대상을 위해 썼어야 할 것입니다.
돈이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결국 감사하는지, 아닌지가 결정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주님께 돌려야 하는 감사의 선악과를 자신들이 먹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감사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감사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여러 여성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감사가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돈을 자기가 더 가지고, 더 즐기고, 더 높아지기 위해 쓸 때입니다.
삼구를 위해 돈을 쓴다는 말은 아직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직 부모의 사랑만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참 부모는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분을 위해 보답하기 위해 돈을 사용합니다.
이를 봉헌이라고 합니다.
이것 없이 하는 감사는 아무리 찬미를 드려도 거짓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2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루카 8,1-3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는 여성들의 존재!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12 사도 만의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일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공동체의 이런저런 필요를 채워주던 협조자, 후원자들도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 완전매료되어,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뒤 따라다니던 추종자들까지 합하면 엄청난 사람이 무리를 지어 다녔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이지 엄청난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알량한 권력이지만 쥐고 있었던 헤로데를 비롯한 권세가들의 우려도 컸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설교하는 회당은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엄청난 수효의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기 질투는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특별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복음 8장 2~3절)
참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개방적인 예수님을 태도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여성들이 당하던 차별대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평범한 여성들이 아니라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치유받은 여성들,
그 어디에서도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여성들까지도 당신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허용하셨습니다.
피정집을 운영하면서 새삼 느끼는 바가 큽니다.
피정이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양질의 프로그램도 중요합니다.
시의적절한 명강의도 필요합니다.
쾌적한 환경과 숙소도 요구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더군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갈진 식사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 식사 준비는 남자인 제가 아무리 백방으로 노력해도 충족시킬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머니의 정성스런 손맛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하던 복음 선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 뒷전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헌신하던 여성들의 손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 여성들이 자신들의 재산마저 팔아가며 공동체를 뒷바라지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큰 매력과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세상과 이웃을 위해 얼마나 활짝 열려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누구라도 와서 기쁘게 헌신하고 봉사하고픈 마음을 갖게 하는 매력을 갖춘 우리 공동체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든든한 기초요 기반으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는 여성들의 존재에 깊이 감사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강론>
(2023. 9. 22. 금)(루카 8,1-3)
<내적인 부르심>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사도행전을 보면, 마티아를 사도로 뽑기 전에
베드로 사도가 ‘사도의 자격’에 관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루카가 복음서에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그 여자들이 열두 사도만큼이나 ‘사도의 자격’을 갖추었고, 사도들보다 더 ‘부활의 증인’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여자들은 실제로 ‘부활의 첫 증인들’입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이라는 말은,
여자들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여자들의 관계는 은총과 믿음으로 일치되어 있는 관계였음을 나타내는 말이고,
또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이나 호감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자들이 특별한 은총을 ‘체험’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가 있는데, ‘체험’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은, 또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은 믿음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언제나 항상 체험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체험하려고 애쓰지 말고 믿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름이 맨 앞에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났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첫 번째로 전한 ‘특별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앞의 7장에 나오는 ‘죄인인 여자’와 마리아 막달레나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두 여자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중을 들었다.” 라는 말은, 음식을 드렸다는 뜻인데, 아마도 ‘옷’도 마련해서 드렸을 것입니다.
시중을 들었다는 말에서 바로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이 말씀에 대해서,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시중을 들었다면, 예수님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였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자들 덕분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궁핍한 생활을 면하게 된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에 동참한 것이라고...
‘자기들의 재산으로’ 라는 말만 보고 여자들을 부자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억측입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남편이 있는 여자들이 과연 재산을 얼마나 마음대로 쓸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남편이 없는 과부라면, 거의 대부분 재산도 없었을 것입니다.
<명단에는 없지만,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도 포함시켜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루카 10,38).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의 집에 들르셨는데, 그때마다 그들 남매는 정성껏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여자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으로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시중을 들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내적인 부르심’에 응답한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겉으로 표시 나게 여자들에게 직책을 맡기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르심’과 ‘응답’이 작용한 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했던 그 일은 나중에 교회의 공식 조직과 직책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사도 6,2-5ㄱ).”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여러 가지
‘직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1코린 12,4-6).”
교회의 공적인 부르심이든지 개인의 내적인 부르심이든지 간에, 또 교회가 맡긴 공적 직분이든지 개인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는 봉사활동이든지 간에, 공동선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하시는 일이라는 점에서는(1코린 12,7) ‘같은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공식 직책을 맡은 것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봉사자들이 하는 일들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는 ‘거룩한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