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적(五賊)
김지하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
옛날도 먼 옛날 상달 초사흗날 백두산 아래 나라 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 이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야
포식한 농민은 배 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 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 시절에도 사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햔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 살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남녘은 똥 덩어리 둥등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쪽
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하략>
(『사상계』, 1970.5)
[작품해설]
이 시는 1970년 5월 『사상계』를 통해 ‘담시(譚詩)’라는 독창적인 이름으로 발표되어 파문과 물의를 일으키며 김지하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작품이다. ‘담시’란 ‘단형 서정시보다 길고 단편 소설보다는 짧은’ 분량 속에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기습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 시’의 독특한 장르를 말한다. 이러한 새로운 장르의 출현은 역사적 현실의 가장 첨예한 내용의 요청에 부응하려는 시도에서 그 정당성을 지니다.
이 시는 일제 강점의 암흑기 속에서 쇠잔하고 소실되어 버린 민족의 가락을 되찾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분명한 목적의식 아래 씌여졌다. 이러한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민족 문학의 새로운 진로에 커다란 가능성을 시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시를 감상할 때는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 못지않게 양식과 가락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시가 발표된 1970년 전후반은 박정희 정권의 국토 개발 5개년 계획에 의거해 경제 발전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의 경제 개발은 정치적 독재 체제의 비호 아래 이루어졌으며, 그 개발 주체들은 정경 유착을 통해 불합리한 방식을 동원해 자본을 축적해 나가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임금 노동을 제공하던 일반 민중들의 권리는 극도로 억압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억압적 과정이 결국에는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분신(焚身)을 가져왔고, 그 반작용으로 노동 운동과 민주화 운동이 촉발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풍자’는 사회의 부조리, 악습, 불합리 등과 개인의 어리석은 행위, 위선, 결핍 등을 지적하여 조소함으로써 골계적 효과를 얻게 하는 언어 표현의 한 형태로, 대상의 부정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풍자는 항상 현실에 대한 부정적, 비판적 태오에서 성립하므로 해학과 같이 한 단계 높은 개혁이라는 교훈적 의미까지 곁들인다. 또한 풍자는 인간의 악에 대해 비우호적 공격이긴 하지만, 그것의 개선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하고 부조리가 성행하는 시대에 특히 발전한다. 그러나 해학과는 반대로 그 부정된 대상 속에 부정하는 자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대상에 대한 호의가 아니라 공격성 또한 강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여기서 ‘오적(五賊)’이라고 규정하고 풍자하는 대상들, 즉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은 일제 통치의 수혜 특권층으로, 민중의 고혈(膏血)을 짜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부정적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이 이 작품을 통해 의도하고 있는 것은 진정으로 자율적이고 근대화된 질서를 이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딜제 잔재를 완전히 청산한 다음, 새로운 인간에 의한 새로운 통치 이념을 구현해야 한다는 방향 제시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대상을 풍자하는 이 시의 표현 방식과 판소리의 표현 방식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술자의 태도이다. 판소리에서 서술자는 시치미 떼는 수법을 사용하는 반면, 담시에서는 서술자가 모든 책임을 지고자 한다. 둘째, 작품의 길이와 짜임새이다. 작품 길이는 판소리에 비하여 암시가 훨씬 짧은데, 이것은 시대 상황에 따른 변천으로 보인다. 작품의 길이가 길며 구연되는 관계로 짜임새에 있어서 판소리는 ‘부분의 독자성’이 인정되지만, 담시에서는 각 부분이 유기적인 찌임새로 집약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주제이다. 판소리는 표면적 주체와 이면적 주제가 존재하는 ‘주제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지만, 단시는 하나의 주제로 되어 있다.
[작가소개]
김지하(金芝河)
본명 : 김영일(金英一)
1941년 전라남도 목포 출생
서울대학교 미학과 졸업
1969년 『시학』에서 시 「황톳길」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70년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
1975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에서 수여하는 ‘로터스상’ 수상
1981년 국제시인협회에서 수여하는 ‘위대한 시인상’ 수상
1981년 브르노 크라이스티 인권상 수상
2002년 제14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시집 : 『황토』(1970), 『타는 목마름으로』(1982), 『대설 남(南)』(1984), 『애린』(1987), 『검은 산 하얀 방』(1987),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나의 어머니』(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중심의 괴로움』(1994), 『빈 산』(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