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역경은 훈련이다. 그래서 바울은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경건의 훈련은 매사에 유익하다고 하셨다. 내가 주를 만난 이후부터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첫직장을 잡았지만 주일을 온전히 성수할 수 없었다. 오늘날은 토요일에 주일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다. 그것도 시대의 변화일까? 하나님의 은혜로 감히 꿈도 꾸기힘든 직장에 취업이 됐지만 월요일마다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우여곡절끝에 온전히 주일을 성수하는 기업체로 직장을 옮겼지만 전혀 상상치도 못한 문제로 결국은 몇개월만에 스스로 사직하고 말았다. 업무에 집중이 안되니 일이 되지를 않고 도리어 업체에 손해를 끼치는 입장이 되다보니 더이상의 근무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자의 길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졸업후 개척을 했지만 아무런 재정적인 준비도 없이 시작하는 개척은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나야 직장생활로 저축한 돈 신학교 다니느라 소비를 했다지만 나보다 나이도 20개월이나 빠른 아내는 그야말로 빈털터리였다. 번돈은 모두 고향집 생활비로 보탰다고 하였다. 설사 아내가 재력이 있었다 하여도 하나님이 결정하신 고난의 길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개척교회를 할 때 너무 어렵다보니 시골교회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시골교회를 소개하시던 선배목사는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절대 반대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버티면 해결된다고 격려해 주셨다. 그렇게해서 시골목회에 대한 꿈은 접었고 어떻든 선배의 격려처럼 버티다보니 교회가 파도를 헤치며 순항을 하는듯 했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의 긴장이 풀렸고 아내도 그동안 절제만하던 생활에서 누리는 생활을 하고싶어하는 욕구를 자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시 목회에 위기가 찾아와 교회도 약해지고 무엇보다 나 자신부터 목회의 의욕이 꺽이기 시작했다. 그러던중에 중국을 만나면서 선교사의 길을 전격적으로 결단하였다.
집을 매각한 자금으로 10여년을 잘 버텼지만 그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이런일 저런일이 발생하며 그나마 푼돈으로 조금씩 들어오던 후원들이 하나 둘씩 끊겨나갔다. 결국은 당면한 재정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마음에도 없던 취업을 하게 되었다. 촤저임금을 받으며 자식같은 직원들을 위한 행정보조원이 내 임무였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보직이 그러했다. 그러다보니 아내를 남겨두고 나혼자만 임시로 귀국을 했지만 매사에 남편만 의지하며 살아가던 아내의 입장에서는 외국에서의 홀로서기란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 결국 아내는 현지의 주택처리도 해결하지 못한채 2개월 후 귀국하고 말았다. 어쩔수 없이 직장근무중 연휴를 이용해 5번이나 오가며 임대주택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다녀온 것이 벌써 5년이다. 19년도 12월말 다녀온 이후 20년도 부터 시작된 코로나 격리로 인해 결국 대다수의 중국사역자들이 귀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나 역시도 길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어쩔수 없이 당장의 호구지책을 위해 일을 할수밖에 없었다. 20년도에 잠시 시골목회를 해볼까하는 생각을 하던차에 어떤 단체로 부터 청주외곽의 시골교회 소개를 받아 현지방문을 해보니 자신의 집을 교회처럼 꾸민 어느 목사의 주택임대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접고 말았다. 그러던중 몇일전 노회서기를 하는 후배목사로 부터 상주시 외곽의 시골교회 목회 희망자를 찾는다는 공지를 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낭만도 꿈도 아닌 엄연한 현실의 장벽과 싸워야하는 문제임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오늘 가을철 산불감시원 근무 첫날을 맞아 순찰을 돌다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차라리 직장생활을 할바에는 아예 처음부터 꿈의 직장에 입사한 곳에서 정년까지 있었어야 했던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만일 그랬더라면 아내의 말처럼 경제적으로는 부를 축적했을 것이고 자금처럼 늦은 나이에 저임금을 받으며 굳이 출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약은 사람들처럼 은퇴후 신학을 공부하고 사역의 길에 나설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인생 첫번 선을 본 여성과 결혼을 했더라면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자매는 심하게 다리를 저는 자매였다. 휴일날 직행버스를 타고 충주에 가서 자매를 만나고 귀가를 할 때 창밖에 보이는 여자들은 모두 그 자매처럼 절뚝거리며 걷는 것처럼 환영을 볼 정도이니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맞선인 셈이었다. 그 자매를 거절한 댓가는 가혹했다. 이여자 저여자 인연이 닿을듯 해보이는 일들이 있었지만 지나놓고 생각해보면 재앙이나 마찬가지 였다. 그러다가 허겁지겁 목회를 위해 지금의 아내와 번갯불에 콩튀기듯 가정을 이뤘다. 교제의 기간을 거치지 못하다보니 실망과 아쉬움이 교차했지만 결국은 그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