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루카.
4,16-30)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lad tidings to
the poor.
말씀의 초대
테살로니카 1서가
작성되던 시기에, 신자들은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신자들이 염려하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시리라고 설명한다(제1독서).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의 설교로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당신의 사명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이로써 구약의 기다림이 성취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내용이 복음서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각 복음서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가 예수님의 첫 말씀으로 소개되는데, 일종의 취임 연설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펴서 읽으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명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이 돋보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 곧 메시아시라고 선언하셨는데, 나자렛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한 부분이기도 하지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으로 당신께서 구약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분이라고 선포하시자, 고향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못합니다. 둘째는 메시아
예수님의 사명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희년 선포라는 점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예수님의 첫 말씀으로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인 복음 선포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다 알지만 따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기차역에서
노숙인들이 사소한 문제로 시끄럽게 다투는 소리를 듣는 순간, 조용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들이 서둘러 자리를
옮겨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오늘의 복음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곧바로 그 생각을 접기는
하였습니다만, 이런 마음이 지속된다면 “요셉의 아들”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결코 알아볼 수도, 고백할 수 없다는 점도 깨달았습니다.
며칠 전,
약속장소에 나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저는 택시를 타면 기사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눕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분이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일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제가 먼저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분이 먼저 말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그 말의 요지는
지금 이렇게 어려운 것은 종북과 같은 빨갱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라는 것은 그냥 생각만 하고 있어야지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너무나 극단적으로
말씀하셔서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었습니다. 특히 말끝마다 욕을 하시는데 듣는 저로써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기 자랑을 하시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지금은 택시기사를 하고 있지만, 특허출원을 2개 해
놓았는데 이것이 대박 나면 100억 수입은 날 것이라고 하더군요. 여기에 대해서도 침묵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운이 아직 안 되었는지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되지 않는다는 이상한 말씀을 하세요. 지금까지 로또 복권 숫자 6개 중에 5개 맞은 경우가 일곱 번이나 되었는데, 운이 없어서
1등에는 당첨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을 이야기하시네요.
대화란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의 생각만을 이야기하고, 자기 자랑만을 한다면 이는 대화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네요. 저 역시 상대방의 생각은 존중하지 않고 제 생각만을 이야기할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상대방의 좋은 점을
발견하기 보다는 제 자랑을 더 즐겨 말하기도 했었지요. 그럴 때 제 대화의 상대 역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 대화의 상대인 주님께도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내 입장에 맞춰서 기도하고, 내 이득만을 위한 기도를 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당신의 사명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낮춰 보면서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고을 밖으로 내 몰아 벼랑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지요. 이런 모습을 똑같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잘 말해야 합니다. 혐오감을 주는 기도, 상처를 주는 기도,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한 기도,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피해야 주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대화법을
떠올려 봅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시는 예수님, 그러나 강자에게는 철저히 강자의 모습으로 올바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떨까요?
모든 사람에겐 다른
사람에게 없는 자기만의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하시디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그 나라의 음식들을 찾아 먹습니다. 신기하기도 하지만, 이제까지 맛보지 못했던 맛이기에 열심히 그 나라의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한 일주일
정도 지나다보면 점점 한국음식이 그리워집니다. 더군다나 전날 과음이라도 했다 싶으면 그 나라에서 가장 맛있다는 음식도 필요 없습니다. 고급
레스토랑의 특별 음식 역시 필요 없습니다. 바로 싸고 편리한 음식이라 할 수 있는 ‘라면’ 한 그릇이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까지 들게 됩니다. 얼큰한 국물과 쫄깃쫄깃한 면말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됩니다.
고급 음식은
아니지만 생각나는 라면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는 가끔 생각나서 찾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따뜻한 마음, 사람들이 찾는 사람보다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더 원할 때가 많습니다.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은 아닐까요?
새로운 눈을
떠라
-반영억신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자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 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쓴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발전의 기회를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눌러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지면서
그 권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지니셨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고은 시인이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통찰한 것처럼 힘이 빠지고 내 것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대가 자기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결국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 생각과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을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너 죽을래!’'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신부-
혜화동에서 명동으로
걸어올 때가 있습니다.
창경궁 옆에는 서울
과학관이 있습니다.
과학관 입구에는
‘전 국민의
과학화’라는 글이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글을 쓴 분은 박
정희 대통령입니다.
광화문 광장에는
충무공 이 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습니다.
동상에도 글이
적혀있습니다.
글을 쓴 분은 역시
박 정희 대통령입니다.
대통령께서는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그 마음을
글에다 담았던 것 같습니다.
북한은 우리보다 더
많이 최고 통치자의 업적을 기리고 싶었나 봅니다.
곳곳에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글들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에도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충성을 드러내는 글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빠른
말이 문틈으로 스쳐가는 것 같다고 합니다.
벼슬은 하룻밤 묵는
여관이요,
명예는 이 사람 저
사람 돌려가며 쓰는 감투와 같다고 합니다.
바위에 새긴 이름도
언젠가는 세월의 파도에 씻겨 내려갈 것입니다.
지나가는 세상을
붙들려고 하는 것은 물 위에 이름을 쓰는 것과 같이 부질없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
우리는 그 보이는
것에 연연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외면하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팔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이제 더위도
우리에게 안녕을 고하고,
내년에 다시 찾아
올 것입니다.
더 머물지 못해서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왔다 갔음을
어디에 적어 놓지도 않습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기억해 주지 않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말없이 하였고,
미련 없이
떠나갑니다.
우주는 너무도 크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원자는 너무나 작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짧은 세상에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가슴아파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상처를 받고,
나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서 괴로워합니다.
예수님은 어느
바위에 글을 적지 않았습니다.
큰 감투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우리는 사랑하고,
그분의 삶과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합니다.
그분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도 영원을 희망하는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따라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利己主義’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되고 ‘利他’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것,
갇힌 이들을
풀어주는 것,
묶인 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
이러한 삶이 우리를
현재의 삶을 살지만 영원한 세계에로 이끌어 주리라 말씀을 하십니다.
가을이 온다고 다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닙니다.
여름에 뜨거운 땀을
흘린 사람들이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을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결실은
하느님을 믿고,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몫일 것입니다.
자유의
여정旅程
-주님과
함께-
-이수철신부-
니코스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생각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자유의
여정입니다.
누구나
추구하는바 자유입니다.
자유로워
행복입니다.
자유로워
인격입니다.
자유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떨립니다.
결국은
인류의 역사도 자유의 확장 과정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참된 자유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점차 자유로워지는 인생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유로워지는 인생입니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오늘
지금 여기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 모두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자유
역시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주님
만남의 은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충만하여 고백합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참
소명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오도송悟道頌같기도
하고 출사표出師表같기도
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아,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복음의
진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 자유로운 삶을 원하십니다.
이
말씀의 깨달음을 통해 참으로 자유로워진 예수님이요
이제
자유를 위한 인류해방의 사명에 투신하게 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가 체험하는 해방감의 자유요,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형제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투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제
저녁기도시 성체강복후 퇴장 성가 68장도 생각납니다.
“기쁨과
평화 넘치는 하느님 계신 곳, 언제나 마음 속에 그리며 살리라.
우리의
모든 소망 이뤄지는 그곳, 영원한 천상 행복 누리게 하소서.“
언젠가
하늘나라에서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할 기쁨과 평화, 자유와 행복입니다.
깨달으면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입니다.
살아갈수록
확장되는 하늘나라요 자유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자유로워진 예수님이기에 고향 사람들의 냉대에도 개의치 않습니다.
불신의
나자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은 호기심의 대상이었을뿐 믿음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방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예로
들면서
장차 온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소명을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자유로운 실존은 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그
누구도 막거나 좌절시킬 수 없는 자유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삶의
목표가 뚜렷하여 소명감으로 충일할 때 비로소 자유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하느님의 길이자 우리의 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자유의 여정을, 하느님의 길을 걸어갈 때 비로소 자유요 행복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자유의 여정을 함께 하십니다.
‘보라,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확약하신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만난 자유인 1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테살로니카 교우들에 대한 말씀이 우리에게도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아,
바로 이것이 죽음에 대한 답입니다.
마지막
무無에로의
환원인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데려가시는 죽음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집으로의 귀가歸家인
죽음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부활하여 파스카의 영원한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이미
생사生死를
넘어 영원한 삶에 진입한 우리들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평화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절망과
슬픔은 믿는 이들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희망과 기쁨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
주님은
희망과 기쁨의 원천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때 샘솟는 희망에, 기쁨입니다.
1독서
마지막 말씀이 우리의 복된 운명을 예언합니다.
아니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함께 시작된 복된 삶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저도
주님의 격려를 나누고자 매일 강론을 쓰고 나눕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희망 충만, 기쁨 충만의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시편34,9참조).
아멘.
예수님의
사명과 나의 소명
-기경호신부-
이성의 시대에
사람들은 참으로 수많은 정보를 손쉽게 접하면서 똑똑한 사람인양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없이 많은 업적을 남기고 지식과 명예와
부를 쌓아간다 한들 정작 가장 중요한 몫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오늘의 말씀들은 신앙인으로서 나의 현주소와 내 안의
소명의식을 돌아보도록 초대한다.
오늘 복음의 대목은
예수님의 사명과 더불어 이스라엘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사실, 그리고 초대교회가 유다인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
이교인들에게로 향하게 된 교회의 운명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사야서 말씀은 여러 수도회들이 설립 모토로 삼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밝히신다. 주어진 사명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 것”(4,18-19)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다른 이들을 위하여 파견되셨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회중을 향하여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하고 말씀하셨다. 곧 구원에 관한 이사야서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의 오심과 현존으로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성취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어서
예수님께서 기원전 9세기에 엘리야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만 돌보고(1열왕 17,7-16), 그 제자 엘리사가
많은 나병 환자들 가운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준 사실(2열왕5,1-14)을 말씀하시자 바리사이들을 잔뜩 화가 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을 나의 소명으로 의식하고, 그분의 운명을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 삶의 주된 관심사와 초점은 무엇인가?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압과 아픔이 있는 이들의 해방을 위해 투신하며 주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닌 다른 데 한눈을 팔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과 해방이 지금 바로 여기서 성취되었음에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배척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렇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선을 위해 박해와 핍박을 받고 때로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우리의 섭리적 운명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수도 축성을 받고 살면서도 이런 가장 기본적인 소명의식을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가! 또 고난의 길을 통해 행복으로 나아가야 하는 제자로서의 섭리적
운명을 회피하며 사는 순간은 얼마나 많은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의식을 잊고 힘겹지만 복된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삶이 가져오는
결과는 말초적인 안정감이나 거짓 행복일 뿐이리라!
하느님께
받은 심부름
-고진석신부-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터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심부름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심부름을
마치면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자신이 맡은
심부름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가뿐하게 그 일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세상 삶이 소풍마냥
즐겁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심부름을 유식하게 사명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뒤집어 놓고 보면 당시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이 절망에 빠져 있고, 무죄한 이들이 잡혀 있으며, 언론이 막혀 있어 백성들은 눈이 멀었고,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억압을 당하고 있는 그때의
상황은 우리 시대에도 별반 달라진 게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분의 사명이 언젠가 우리가 가운데에서 꼭 이루어지리라 확신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 일,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받은 심부름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4,21) -오상선신부-
어떤 신부님의 강론
말씀을 들으면 참
좋습니다. 어떤 스님의 법문도
참 멋집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도 참
재미있습니다.
이런 좋은 말씀을
늘 듣고 살면 참
좋습니다. 그렇게 머물러 있고
싶습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아무리 좋은
말씀도 그것이 내 안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다
헛것입니다.
그 말씀이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말씀이구나 느끼고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에게는 그저
좋은 말로만 남고 다른 누군가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여긴 적은
없는지요? 그렇다면 말씀을
잘못 알아들은 겁니다. 나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면 그 말씀은 아무런
생명력이 없는 죽은 말씀에
불과합니다.
말씀이 참으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이
되느냐 안되느냐는 바로 나에게
달렸습니다.
오늘 내가 들은
말씀은 바로 나를 위한
말씀인가요?
-한상우신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인간은
결국 혼자입니다.
인간적인
기대감을 내려놓게
됩니다.
가장
친근하고 가장
가까운 자기
고향에서도 예언자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편견을
벗어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편견을 허물
때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편견이
얼마나 상대에게
잔혹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주님의 힘을
믿고 주님께
의지합니다.
모든
만남은 주님께로부터 오기때문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편견에 단단히
묶여있는 우리를
풀어주십니다.
깨어나는
삶이란 편견에서
벗어나는 삶입니다.
편견에서
벗어나면 매일 새로운
삶이 우릴 기다리고
있습니다.
편견을 정화시키는
건 우리의
나눔입니다.
나눌 수만
있다면 함께할 수
있습니다.
나누시기위해 함께사시기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운데
오셨음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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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