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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운동을 할 때에도 상대가 버거우면 진땀이 납니다. 일을 할 때에도 진액이 다 빠지도록 일을 하다보면 힘이 소진되면서 진땀만 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녹초가 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일하고도 그 결과를 제대로 누리는 게 아닙니다. 전도서에 보면 전혀 엉뚱한 놈이 누리게 되니 이것도 헛되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게 고작입니다. 본문 19절은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입니다.
1.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수고’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사실 우리는 “땀”이라는 말을 통해 힘든 노동과 피곤함과 지침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어려움 때문에 땀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 언급된 것처럼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구절의 반복입니다. 이 구절을 핑계삼아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수고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주인이나 입법자로서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로서 징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여기에서 율법이 정해진 것이라면 모든 사람이 농부가 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느 곳도 기계 기술을 사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옷은 물론 생활에 필요한 다른 필수품을 구하기 위해 모두가 다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렇다면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심판대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인간의 생활이 비참해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본래 지음을 받은 평온하고 행복하며 기쁨이 넘친 상태에 적합하지 않은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 스스로 입증했기 때문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만일 어느 사람이 비활동적이고 나태한 사람이 많이 있다고 반박한다고 하더라도 이 저주가 온 인류를 향해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저주가 모든 사람에게 속했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을 정도로 나태하며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어려운 일을 회피하며 더 많은 사람이 이것을 변호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노동이라는 이러한 멍에를 씌우셨습니다. 그러나 이 노동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부과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다 적게 주어졌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온몸에 부과된 공통적인 수고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각 지체에 특별히 주어진 수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죄악으로부터 어느 정도 각 지체에 나누는 것을 기뻐하실 경우에는 예외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겸비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순종을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십자가를 지는 일에 동참한다면 죄를 깨닫고 겸손해져야 함을 배운다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 그러한 희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회개하는데 더 큰 유리함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자극을 받는 것이며 육체의 금욕에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무거운 짐에 눌려 주저앉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저주의 일부를 면제시키시는 때가 많습니다. 이에 대한 다윗의 묘사는 아주 적절합니다. 그는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 인해 타락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더욱 간절히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성적인 관대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최선의 상태에 있다 해도 육체는 종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한 노동과 굶주림으로 기진맥진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비참한 생활에 의해 권고를 받는 우리는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부터 위로를 찾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비통한 슬픔이 경감되고 거기에 향기를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인간이 죄로 인해 빠져든 모든 불리한 점을 나열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생활에 내재되어 있는 죄악이 경험에 의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한 근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공기, 서리, 천둥, 번개, 불규칙적인 비, 가뭄, 회리 바람, 또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밖의 모든 불합리한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질병도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시적인 우화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조상들로부터 전통적으로 전수된 것이라는 사실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호레이스(Horace) 라는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은밀한 손이 하늘의 성전에서, 거룩한 불을 꺼낼 때,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천군이, 이 땅에 지독한 질병을 날려보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멀리 있던 죽음이, 그 먹이를 움켜잡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읊었습니다.
2. 그러나 모세는 자기 습관에 따라 평범한 사람의 역량에 맞게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연의 모든 질서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전복되었다는 사실을 한가지 예를 들어 가르치기 위해서 가장 뚜렷하고 명백한 것을 기록하는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자에게 속하지 않은 고통은 남자에게도 부과되지 않았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우리는 아담의 죄로 인하여 남자와 여자에게 저주가 내려졌다고 가르치기 위해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언급한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바울이 증거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어 있다’(롬5:12) 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심으로써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징벌을 내리기 시작하십니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며’ 라는 구절을 확실히 죄 용서와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화해하신 후에 진노를 나타내셨다는 것은 어딘지 모호한 점이 있다는 의문에 대해 고찰해야 할 것입니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중적인 사면의 특징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잘못에 대한 용서와 형벌의 면제인데 이것은 나중에 만족의 상태에 부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허물로부터 용서해 주시면서 여전히 형벌을 내리시며 엄격하신 공의에 따라 적어도 일시적인 형벌을 내리시리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형벌이 배상으로 규정된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불합리하게 해석하는 위선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을 징벌하심에 있어서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들에게 유용하게 될 것을 고려하십니다. 심판자가 아닌 의원으로서 직무를 수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내리신 사면은 완전한 것이며 부분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미래를 위한 약의 역할을 하는 일종의 징벌로 간주해야 하며 결코 범죄에 대한 징계를 옹호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무분별한지, 얼마나 방탕하고 강퍅한지, 얼마나 변덕스럽고 쉽게 잊어버리는지를 고려한다면 이와 같은 인간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엄위 하심에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권고하시면 그들은 듣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채찍을 들어 책망하시면 효과는 있지만 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경우가 있어도 육체적으로는 그분의 경고를 사악하게도 무시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여 온갖 세력을 동원하며 완고하게 행동하는 것은 음란한 행위보다 더 나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원래는 양순한 성품을 부여받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무를 부인하지 않았지만 일단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손을 피해 달아났다면 곧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강제로라도 이전처럼 끌려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생활에 뒤따르는 고통은 필요한 훈련이라는 일반적인 공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으로써 우리를 회개하도록 부르기로 하시고 때로는 우리가 겸비해지도록 가르치기도 하시며 때로는 미래에 죄의 유혹에 대항해서 싸울 경우 더 조심하도록 경각심을 일깨우십니다.
4.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라는 말씀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비참한 삶의 종국은 죽음이 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은 여러 가지 역경을 계속해서 겪은 후에 최후의 재앙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담의 죽음은 그가 범죄한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저주받은 삶의 죽음의 시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했다면 뱀에 대한 승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 말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죽음에 의해 완전히 파멸되어야 한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이 아담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므로 이전의 약속은 파괴된 것입니다. 또한 구원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아주 희박하며 모호하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갑작스러운 재난에 놀라기는 했어도 아직까지 죄에 대한 지식으로 깊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받은 징벌을 상기시키시며 더 많은 것을 주장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되는 징벌로 그들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하시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주어진 위로가 애매하고 빈약하기는 해도 그들이 고통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충분히 소망을 갖도록 역사 하십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실하게 회개시킬 때까지 그들이 온갖 죄악의 덩어리로 녹초가 되도록 시달리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여기에서 죽음이란 마지막 사건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아담 안에는 오직 죽음만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치유책을 찾으라고 촉구하십니다.
5.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죄악이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을 선언하시므로 죽음이 우발적인 것으로 덧붙여진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네가 정녕 죽으리라’는 구절을 영적인 의미로 이해하면서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몸은 영혼과는 분리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것처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이러한 상처도 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흙에서 취하신 사람을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고 선포하시는가?’ 라는 질문은 대답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영광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자 그의 몸이 흙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거의 잊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지녔던 신적인 우월성이 모두 박탈된 후에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생명을 잃게 되면 흙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상태와 반대되는 분해라는 것은 본래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첫 인간이 올바른 존재로 남아 있었다면 더 나은 삶을 영위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체와 영혼의 분리, 타락, 어떤 종류의 멸망, 한 마디로 말해서 부자연스러운 변화도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죄에 대하여 명확하게 자각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교회 안에 권징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같은 방향입니다. 권징의 방향과 목적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