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거궤
출 25:10-22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12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17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 25:10-22 / [계약궤] 아카시아나무로 궤를 만들어라. 길이는 113센티미터, 나비는 68센티미터, 높이도 68센티미터가 되게 하여라. 11) 순금으로 궤 안팎을 감싸고 둘레에 금테를 둘러라. 12) 부어 만든 금고리 네 개를 각각 네 귀퉁이 밑에 붙어 있는 발에 각각 달되 이쪽에 두 개, 저 쪽에 두 개를 달아야 한다. 13) 궤를 들어 올릴 때 잡을 채를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어 이것도 역시 금으로 입혀라. 14) 이 궤를 궤 양쪽에 붙어 있는 고리에 끼워 궤를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하여라. 15) 그런데 그 궤는 궤에 붙어 있는 고리 안에 꿴 궤로 두고 거기서 빼내지 말아라. 16) 그리고 내가 너에게 줄 그 증거판을 이 궤 안에 넣어 두어라. 17) [속죄판] 순금으로 속죄판을 만들어라. 길이는 113센티미터, 나비는 68센티미터가 되게 하여라. 18) 또 그룹 둘을 금으로 만들어라. 그래서 속죄판을 망치로 두드려 펴서 늘이고 그 속죄판 양쪽 끝에 그룹 둘이 자리잡게 하여라. 19) 곧 그룹 하나는 이쪽에, 또 하나는 그 맞은편에 자리잡게 하여라. 두 그룹은 이 속죄판 양쪽에 자리잡게 하되 속죄판과 떨어지지 않도록 속죄판을 두드려 펴서 그룹과 이어 붙이도록 하여라. 20) 속죄판 양쪽 끝에 이어 놓은 그룹의 날개를 위로 펴서 그 날개가 속죄판을 감싸듯이 덮게 하고 양쪽에서 두 그룹이 얼굴을 서로 맞대고 보면서 속죄판을 바라보게 하여라. 21) 이 속죄판은 궤 위에 얹어 놓고 궤 속에는 내가 너에게 줄 증거판을 넣어 두어라. 22) 거기서 내가 너를 만나고, 속죄판 위 곧 법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야 할 모든 일을 내가 네게 명령하리라.
하나님께서 성막 건립에 필요한 예물들에 대하여 가르쳐주신데 이어서 본문에서는 성막 내부에 가장 중요한 성물인 법궤와 속죄소에 대하여 일러주셨습니다.
법궤의 제작 양식을 일러주심(10-16) 법궤는 조각목으로 길이를 두 규빗 반, 폭이 한 규빗 반, 높이를 한 규빗 반의 크기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조각목은 시내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싯딤나무(shittim wood)로 가시가 많고 제멋대로 자란 내구성이 강한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장 귀한 법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하게 여기는 백향목이나 잣나무 혹은 상수리나무 등을 쓰지 않고, 광야에서 마음대로 자라나는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일 뿐 아니라, 조각목까지도 귀하게 쓰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귀하게 쓰실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법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 그 위에 순금으로 안팎을 감싸고, 금테로 가장자리를 두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직접 만지지 않고 메고 이동할 수 있도록 고리를 만들고 채를 만들어 고리에 꿰어 부착하게 했는데, 원래 법궤는 오직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옮기는 것이 규례였습니다(대상 15:14-15). 반면 진설병 상과 번제단과 분향단을 운반할 때는 고핫 자손이 메고 운반했습니다(민 4:15). 그리고 법궤 안에는 증거판을 넣으라고 했는데, 여기서 증거판은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말합니다.
법궤의 뚜껑 속죄소의 제작 양식을 일러주심(17-22) ‘속죄소’는 본래 ‘덮다’는 뜻으로 법궤를 덮는 뚜껑을 말합니다. 속죄소의 길이는 두 규빗 반, 폭은 한 규빗 반의 크기로 순금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속죄소 위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형태로 날개가 달린 그룹(천사) 둘을 만들도록 했는데 속죄소 양 끝에 이어 붙이라고 했습니다. 속죄소 위판과 두 그룹이 분리될 수 없도록 한 것은 천사들의 사명이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호위하며 밤낮으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화로우심을 찬양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룹의 날개로 속죄소를 덮는 형태를 취하게 한 것은 속죄소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을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법궤 안에는 증거판이 들어가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궤 위에 두 그룹이 날개로 덮고 있는 속죄소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만나시며 그곳에서 모든 일을 일러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말씀이 기록된 증거판이 있는 그곳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적용: 율법이 기록된 증거판이 있는 곳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기록된 말씀(성경)을 가까이 할 때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매일 <샘가>를 통해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脣亡齒寒[순망치한]-춘추좌씨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로써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소통입니다. 소통이 원만하면 서로에게 좋은 인생의 파트너가 됩니다. 좋은 인생 파트너는 삶에 있어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화해의 장소를 의미하는 증거궤의 속죄소는 하나님과의 화해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 속죄의 의식을 행하며 하나님과 화해된 관계로 돌이키게 됩니다. 우리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뜻을 따르며,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화목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교회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집
출 25:8-22 / 김명혁 목사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며 즐겨 듣는 꿈과 사랑의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라는 노래입니다. “나는 대리석 궁전에 살았던 꿈을 꾸었어요. 가신들과 시종들을 내 곁에 두었고 그 대리석 궁내에 모인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내가 그들의 희망이요 자부심이었던 꿈을 꾸었어요. 나는 고상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재물을 가졌던 꿈을요. 그러나 나의 꿈속에서 나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그대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지요. 내 꿈속에서 나를 가장 매혹시킨 것은 그대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지요.”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But I also dreamt, which pleased me most, which charmed me most, That you loved me still the Same”
저는 이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면서 각양 각색의 보석으로 꾸며진 하늘 궁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각양 각색의 보석으로 꾸며진 하늘 궁전의 모습을 꿈으로 환상으로 보면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둘째는 자정이라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계21:2,10,18-21)
사도 요한은 조만간 이렇게 휘황찬란한 보석들로 꾸며진 하늘 궁전에 있게 될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 중에서 그를 가장 기쁘게 하고 그를 가장 매혹시킨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3-4).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사도 요한은 천국에 대한 환상적인 꿈을 꾸다가 그리고 “와서 생수를 마시라”는 성령과 신부의 사랑의 음성을 듣다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오늘 아침 제가 왜 꿈과 사랑의 노래에 대해서 그리고 사도 요한의 꿈과 환상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합니까?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그 모습은 각양 각색이지만, 모두 황금 보석으로 만들어진 천국의 모형이고 천국의 그림자란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들의 눈에는 교회가 비록 천막 집으로 보이고 비록 초가집으로 보이고 비록 콘세트 집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신령한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은 황금 보석으로 만들어진 천국의 모형이기 때문에 이미 보석 집들이란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기 때문에 이미 황금 보석으로 만들어진 보석 집들입니다. 교회의 귀중성을 아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를 자기 집보다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네 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진 보석 집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보석 집니다.
출25:21에 보면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고 했는데 여기 증거판은 십계명의 돌판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성막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재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석입니다. 에스겔 37장에 마른 뼈가 가득한 해골 골짜기의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을 때 마른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큰 군대 곧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교회를 만든 중요한 에너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오순절날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3천 여명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가 찔림을 받아 쪼개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결국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큰 군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자들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기고 살아나는 일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들으면 위로가 생기고 즐거움이 생기고 기쁨이 생기고 노래가 생깁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50).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시119:77).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시119:54).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 인생길을 비추는 등과 빛이 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보석 집입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생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생명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위로가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즐거움과 기쁨과 노래가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인생길을 비추어주는 등과 빛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보석 집입니다.
둘째, 교회는 예수님의 피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보석 집니다.
출25:17에 보면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라”고 했는데 여기 속죄소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양의 피를 뿌려서 제사 드리는 곳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이 속죄소는 예수님께서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달려 속죄의 피를 뿌리며 제사 드리게 될 것을 가리켰습니다. 성막의 중심에는 어린양의 피 뿌림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피가 있습니다. 히9:11,12은 예수님께서 성소에 들어가서 짐승의 피 대신 자기의 피를 뿌려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1-14). 교회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재료는 예수님의 피라는 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흐르고 또 흘러서 이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행20:28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말했습니다.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하셨느니라”(행20:28). 교회는 하나님의 피 또는 예수님의 피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보석 집입니다.
예수님의 피에는 두 가지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사하는 사죄의 능력이 있고 사탄 마귀의 세력을 깨트려 부수는 사탄 파괴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들어오면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지고 사탄 마귀의 세력을 깨트려 부수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주님의 피가 있는 교회에 나아와서 무릎을 꿇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선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눅7:48). 계12:11에 보면 옛 뱀 곧 사탄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서 땅으로 내려왔는데 예수님의 피를 믿는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로써 그 놈들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9,11). 교회는 예수님의 피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보석 집입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피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고 사탄 마귀의 세력을 깨트려 부수는 능력이 있는 예수님의 피가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보석 집입니다.
셋째, 교회는 성령님의 생기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보석 집니다.
출25:18에 보면 “금으로 그룹 둘을 만들라”고 했는데 여기 그룹은 천사들을 가리켰는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을 상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그룹들은 오순절날 성령께서 바람과 같이 교회에 오셔서 생기를 불어넣으실 것을 가리켰다고 생각합니다. 성막의 중심에는 천사들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중심에는 성령의 임재와 생기가 있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중요한 재료는 성령의 생기라는 보석입니다. 에스겔 37장에 마른 뼈가 가득한 해골 골짜기의 장면이 나오는데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생기를 향하여 대언했을 때 했을 때 생기가 마른 뼈들에게 들어가서 큰 군대 곧 교회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으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9,10).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교회를 만든 중요한 에너지는 성령의 생기라는 보석이었습니다. 성령의 생기에 대해서 대언할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2장은 이 세상에 제일 처음으로 생긴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을 묘사하고 있는데,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강림과 임재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성령이 교회에 바람같이 임재했을 때 거기 모였던 사람들에게 생기가 돌았습니다. 교제가 살아났고 기도가 살아났고 찬양이 살아났고 사랑과 봉사가 살아났고 전도가 살아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깨어졌던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기도가 터져 나왔고 찬양이 터져 나왔고 이웃을 향한 사랑과 봉사와 전도의 손길이 펴졌습니다.
성령의 바람과 생기가 임했을 때 스데반 집사의 입에서는 믿음의 선조들의 위대한 역사를 증거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증거하는 영감의 설교가 터져 나왔고 돌에 맞아서 죽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천국의 영광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위대한 간증이 터져 나왔습니다. 성령은 신자들의 몸과 영혼과 세포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 넣는 생기의 역할을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성령의 은혜를 간절하고 겸손하게 사모하면 누구나 생기로 채워지는 은혜를 받습니다. 교회 안에는 성령의 생기가 넘칩니다. 교회는 성령의 생기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보석 집입니다.
넷째, 교회는 성도들이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져 가는 보석 집니다.
교회는 말씀과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인 성도들이 모여서 만들어져 가는 보석 집입니다. 제가 ‘만들어져 가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세상에 있는 교회는 완성품이 아니고 지어져 가는 미완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엡2:22에서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권속이 된 성도들이 하나님의 집의 부분부분들로 지어져 가고 있다고 기술했습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을 가리켜 보석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도 부르시고 ‘의인’이라고도 부르시고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라고도 부르시고 ‘쁄라’와 헵시바’ 라고도 부르시고 ‘나의 사랑’ ‘나의 기쁨’이라고도 부르셨습니다. 결국 교회는 성도들이라고 불리는 보배롭고 존귀한 보석들로 만들어져 가는 보석 집니다. 눅18:13에 보면 세리 한 사람이 성전에 들어와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세리를 보고 '의인'이라고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성도들을 가리켜 보석처럼 존귀한 존재들로 보시면서 분에 넘치는 아름다운 사랑의 명칭들을 다 사용하셨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가2:13,14).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가4:12).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사43:1,4).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4).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심벼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사바냐3:17). 다윗은 땅에 있는 성도를 가리켜 존귀한 자라고 불렀고 자기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다고 고백했습니다(시16:3).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가리켜 자기의 기쁨과 면류관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서 서라”(빌4:1).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2:20).
교회는 성도들이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져 가는 보석 집니다. 교회 안에는 보석들이 많이 있습니다. 금은 보석과 화려한 옷으로 장식한 부자들이 많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믿음이 보석처럼 빛나고 사랑이 보석처럼 빛나고 봉사가 보석처럼 빛나고 온유와 겸손의 인격이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스데반과 빌립과 바나바와 도르가와 루디아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오네시보로는 모두 보석처럼 빛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우리 강변교회에도 보석처럼 빛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피와 성령님을 참으로 믿고 의지하면서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은 모두 보석처럼 빛나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라는 보석들로 만들어져 가는 보석 집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예수님의 피가 있는 성령님의 생기가 있고 땅에 존재하는 가장 존귀한 성도들이 있는 보석 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이 세상의 어느 집보다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는 일이라면 시간과 물질은 물론 생명까지도 기쁨으로 바쳐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기 전에 비판적인 말씀을 한 마디 드립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모두 보석 집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인간화할 수도 있고 기업화할 수도 있고 정치화할 수도 있고 자본주의화할 수도 있습니다. 어제 그제 이틀 동한 손봉호 박사님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손봉호 박사는 오늘의 많은 대형교회들이 자본주의화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예배와 교육과 목회와 행정과 조직에 전문인들을 많이 고용한다고 했습니다. 찬양 프로그램 율동 프로그램 교육 프로그램 상담 프로그램 목회 프로그램 등에 사례를 많이 주고 전문인들을 많이 고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몰려오고 헌금을 더 많이 하고 그러면 대형 마트처럼 크게 부흥 발전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교회 자본주의' 현상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도 이 지적에 공감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대신 인간의 멋진 말들이 지배하는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 대신 정치 경제 유행 지식의 힘이 지배하는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생기 대신 인간의 감정적 흥분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석처럼 순수한 성도들 대신 세상의 관점에서 보석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교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세에는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많이 상실하게 된다고 주님께서 경고를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야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7-19).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 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건물이 화려하고 숫자가 많은 교회가 반드시 교회다운 교회는 아닙니다. 오늘 아침 필리핀에서 아이타 원주민 사역을 하고 있는 양남일 선교사의 사모가 방명록에 글을 올렸는데 너무 감동적인 글이었습니다. 그 글을 여기 그대로 인용합니다. “또 뵙고 싶은 목사님께. 목사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양남일 선교사 아내 배난영 사모예요. 여기 앙겔레스 선교사님들 사이엔 목사님을 모두 할아버지 목사님이라 부른 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목사님께서 저희들에게 들려주신 신앙의 선배들의 귀한 간증과 말씀들이 은혜로 가슴에 새겨져 있어요. 저는 육체적으로 참 힘들고 어려운 ‘아이타’ 선교를 한지 만5년 6개월이 되었는데 언제나 내 가슴에 처음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고 제 자신과 힘든 싸움을 할 때가 많이 있어요. 처음 저들을 바라보며 흘렸던 눈물들.... 오지에 교회를 세우고 우물을 파면서 주님이 주셨던 감격과 은혜의 시간들... 참으로 많은 오해와 갈등을 받으며 죽으면 죽으리라 여기며 산지를 쫓아 다녔던 일들… 지금 그 시간들을 되돌아 보면서 하나님께 무척 감사드리고, 또 위로를 받곤 해요. 하지만, 제가 섬기는 ‘아이타’ 영혼들이 동물원의 원숭이 취급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오늘도 선교의 열정이 꺼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죠. 작년 연말 사역지 마을에 사는 생후 11개월 된 언청이 아이를(호흡기 곤란으로 생명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 저희 목사님께서 사방팔방으로 노력하여 한국 열린 의사회의 도움을 얻어 제가 애기와 엄마랑 함께 한국을 방문하여 다일병원에서 무사히 수술을 하고 돌아오게 되어 너무나 기뻤어요. 그럴 때는 정말 선교사가 되어 주의 귀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뿌듯했는지 모른답니다. 목사님! 우리 파스터 중에 ‘롤단’ 이라는 ‘아이타’ 목회자가 있어요. 자기네들이 살고 있던 마을이 어느 날 한국 사람이 골프장을 만든다고 해서 다른 지역으로 마을 전체가 이주를 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주를 하는 과정에 필리핀 사람들이 자기들을 ‘보보(바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롤단 파스터는 보상을 받지 않아도 괜찮으니 필리핀 사람들이 자기 ‘아이타’들을 ‘바보’ 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마음이 상해 ‘아이타’ 를 대표해 열심히 싸우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여요. ‘아이타’들은 필리핀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고 거저 괄호 밖의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죠. 이런 저들의 삶을 바라볼 때 무척 마음이 아프고 무엇인가 뚜렷이 도와 줄 수 없는 것이 무척 미안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냥 뒤편에서 잠잠히 기도하며 지켜 볼 뿐이죠. 처음에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아이타(필리핀) 선교에 보내주셨는 줄 생각 했어요.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님을 느끼게 되었어요. 하나님은 ‘아이타’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저희 부부를 그저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고 또 그 도구로 부족함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허락 하시는 시간까지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한국인 아낙네 사역자로 열심히 정성껏 사역하고 싶어요. 비록 말이 잘 통하지 않지만 마음과 마음으로 눈 빛과 눈 빛으로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목사님! 사랑해요. 그리고 사모님도 너무 사랑해요. 비록 짧은 몇 일 이였지만 많은 부분을 느끼며 더 잘 섬기지 못한 마음이 못내 아쉽습니다. 제 생애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멋모르고 목회자의 아내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지만 믿음의 귀한 스승을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주심을 너무나 고맙고 감사드려요. 늘 잊지 않고 목사님과 사모님을 위해 기도할께요. 부족하지만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필리핀 오지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살아가는 ‘아이타’ 영혼을 섬기는 배난영 선교사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눈물로 읽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홍양순 사모가 방명록에 솔직하고 예쁜 글을 올렸습니다. “지금도 아름다운신 목사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목사님 필리핀에서 마지막 날 칼국수 먹을 때 꼭 기억해 주세요 라고 말한 홍양순 사모입니다. 가신 후 일주일은 목사님 모습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설교도 설교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목사님의 주름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람으로 비춰줘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세배 돈을 주듯 우리에게 돈을 주셨을 때 꼭 세벳 돈 받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이곳 필리핀에서 저는 목사님의 팬이 되었네요. 사모님도 연세에 비해서 너무 예쁘게 나이드셨구요. 나도 저렇게 곱게 나이 먹어 가야지 했습니다. 목사님 주님안에서 사랑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오래 이 땅에서 목사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주세요. 그리고 스티커 어디든 가지고 다니시면서 붙여 주세요. 목사님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 거든요. 목사님 파이팅. 그리고 필리핀 이뻐해 주세요. 저는 세레요한 처럼 살지 못하고 예수님처럼 살지 못해서 늘 주님께 미안해요 하며 사는 사모입니다. 필리핀은 밴질이만 있는 곳은 아니랍니다 순결하게 살려고 하는 선교사도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 주세요. 그러나 난 지금도 목사님 솔직함이 너무 맘에 들어요. 더욱 빛날 수 있는 것은 목사님 순수함과 솔직함이 아닐까요.”
앙겔레스에서 사역하고 있는 한인 선교사들이 아이타 족들에게 지어준 15개의 교회는 대문도 없고 창문도 없습니다. 분반 공부할 방들도 없습니다. 피아노도 올간도 없습니다. 교육 전도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눈물과 사랑이 있고 주님을 향한 아직은 어색하지만 사랑과 고마움이 있습니다.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벌거벗은 아이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보잘 것 없는 아이타 산족 교회들을 보석 집으로 보실 것입니다. 바로 어제 광야교회와 홈리스 복지 센터의 준공과 입당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손봉호 박사가 축사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부담 없이 쉽게 들어오실 수 있는 교회가 바로 광야 교회와 같은 교회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크고 으리으리한 교회는 멸시와 싫어 버림을 받으신 주님께서 들어가시기가 부담이 되실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가 신자 되도록 최선을 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굳게 붙잡고 의지하며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을 굳게 붙잡고 의지하며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만을 굳게 붙잡고 따르며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을 모두 귀중히 여기고 기뻐하며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찬송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반석 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379).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182).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만 충만하게 합소서"(177).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525).
지성소 안의 언약퀘
출 25:10-22 / 피영민 목사
서 론
몇 편에 걸쳐 시리즈로 개봉된 유명한 영화 가운데 ‘인디애나 존스’가 있습니다. 1981년에 1편이 개봉되었는데, 그 제목이 ‘레이더스’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원제목은 ‘Raiders of the Lost Ark’(잃어버린 언약궤의 수색자)였습니다.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아 나서는 고고학자에 대한 이야기로 흥미로운 주제답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이 있습니다.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이 이끄는 군대를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무적의 군대로 만들기 위해 언약궤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히틀러가 언약궤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 동기가 되어 영화 ‘레이더스’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언약궤를 찾을 수만 있다면 엄청난 부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언약궤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민수기 10장 35~36절에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 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언약궤가 나아가면 원수들이 물러가고, 궤가 정지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시도록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기도한대로 언약궤가 행진할 때 원수를 물리쳐 주셨고, 정지할 때는 백성들에게 평안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언약궤를 만들라고 하신 이유는 언약궤 자체에 뭔가 특별한 마술적인 힘이나 신비로운 능력을 넣기 위함이 아니셨습니다. 언약궤는 마술 상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 속에는 이 언약궤를 마술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려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었을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를 ‘아벡 전투’라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대패하게 됩니다. 군사 4,000명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의 불량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당시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에 언약궤가 있으면 반드시 블레셋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참하게도 이스라엘의 군사 30,000명이 죽고, 언약궤는 빼앗겼으며 홉니와 비느하스 역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아주 불량한 자들이었는데, 백성들이 와서 제사를 드린 후 고기를 삶으면 갈고리를 만들어 제물을 삶는 솥에 넣어 아무거나 걸려 나오면 그것들을 차지해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자들과 동침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매우 탐욕스럽고 정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그들에게 언약궤가 있은들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전쟁도 패배하고 언약궤도 빼앗겼는데, 엘리 제사장이 패전 소식을 듣더니 의자에서 넘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또 비느하스의 아내였던 엘리의 며느리는 아들을 낳다가 죽었는데, 죽기 전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고 죽었습니다. ‘이가봇’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터로 나갔는데도 대패했을 뿐만 아니라 빼앗긴 적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언약궤 자체에 신령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할 때 언약궤가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언약궤의 구조, 역사 속에서 감당했던 역할, 그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언약궤는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언약궤’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200번 이상 사용되었고, 그 명칭도 22가지나 됩니다. 궤(출 25:14), 여호와의 궤(삼상 4:6), 하나님의 궤(삼상 4:18), 언약궤(수 3:6), 증거궤(출 25:22), 법궤(출 39:35)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언약궤’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여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10장 3절에 “내가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언약궤를 만든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모세가 손수 만든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37장 1절에 보면 ‘브살렐’이라는 기술자가 나오는데, 그를 고용하여 자신의 감독 아래 하나님이 주신 계시 그대로 언약궤를 만들도록 한 것입니다. 브살렐은 성령의 감동으로 언약궤를 제작하였습니다.
언약궤를 만든 시기는 출애굽 연대가 B.C. 1446년이기 때문에 이와 비슷하게 B.C. 1446~1447년경으로 추정합니다. 언약궤의 재료는 ‘조각목’인데, 이 나무는 ‘싯딤나무’라고 불렸고 우리 말로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이 아카시아 나무는 하얀 꽃이 피고 향기가 대단히 좋은 나무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아카시아 꽃을 따 먹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공해가 있어서 먹기 힘들지만 대단히 향기로운 꽃입니다. 특히 아카시아 나무는 내구성이 강하고 벌레가 침투하지 못하는 나무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 싯딤나무는 언약궤를 만드는데 쓰였고 떡상이나 분향단, 성막의 기둥과 널판 등에 널리 사용된 재료였습니다.
언약궤는 직사각형으로 생겼고, 크기는 가로 2.5규빗, 세로 1.5규빗, 높이 1.5규빗의 작은 나무상자입니다. 여기서 ‘1규빗’은 ‘팔꿈치에서 중지 끝’을 가리키는데 민족들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의 경우 50cm라고도 했는데, 일반적으로 45cm에 해당하는 길이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래서 2.5규빗은 116cm가 되고, 1.5규빗은 76cm가 됩니다. 그러니까 언약궤는 높이가 76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무상자입니다.
또 언약궤는 안팎을 모두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아랫부분에는 네 개의 도금한 고리를 만들었고, 두 개씩 채를 꿰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채 또한 싯딤나무로 만들어 금으로 입혔습니다. 그리고 채는 항상 끼워 놓은 상태로 지성소에 놓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언약궤를 다룰 때 사과상자를 다루듯이 아무렇게나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민수기 4장에 언약궤를 운반할 때는 반드시 고핫 자손이 담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만지거나 뚜껑을 열어 보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 절대로 만지거나 열어 보지 말고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핫이 누구입니까?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셋째 아들이 레위입니다. 그리고 레위에게는 게르손, 고핫, 므라리라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아들이 바로 고핫입니다. 레위의 차남이었던 고핫에게는 아므람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고모였던 요게벳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아론과 모세가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핫을 특별히 사랑하셨고, 그래서 그 자손들로 언약궤를 메고 운반하도록 하셨습니다.
레위 지파 중에서도 고핫의 자손들이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고핫의 손자였던 모세와 아론에게 지도력을 주셔서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었고, 아론은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을 삼으시고, 나머지 레위 지파 족속들은 일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을 멈추면 진 한 가운데 성막을 세웠고, 행진을 시작하면 다시 성막을 해체하였는데, 언약궤를 운반할 때는 함부로 만질 수 없었기에 지성소와 성막 사이에 있는 휘장으로 덮고,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은 뒤, 마지막으로 청색 앙장을 덮어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고핫 자손들만 메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경우에는 일반 제사장이 운반하기도 하였습니다.
여호수아 3장 4절에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앞서 메고 가면 백성들은 2,000규빗의 거리를 두고 뒤쫓아 오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작은 나무상자처럼 보이는 언약궤라 할지라도 극도의 주의와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지성소에 두었고, 위판을 ‘속죄소’라고 불렀습니다. 금판으로 만들어진 뚜껑 ‘속죄소’는 대제사장이 피를 뿌리는 곳이었고,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곳이라 하여 ‘시은소’(Mercy seat)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판에 두 그룹천사가 있었는데, 날개를 편 채 언약궤를 덮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은 천사라 할지라도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쳐다볼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언약궤 속에 들어 있던 것은 십계명, 즉 두 개의 증거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증거궤’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후에 두 가지가 추가되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4절에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과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모두 인간의 죄를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십계명은 인간이 십계명의 계명들을 어긴 죄를 상징하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도전한 고라, 다단, 아비람, 족장 250명의 반역죄를 상징하고,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먹고 살았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박한 식물이라며 항상 불평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나는 하얀 과자처럼 생겨서 먹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걸릴 일도 없는 최고의 건강식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것을 40년 간 무료로 먹었으면서도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언약궤 속에 있는 것들은 모두 인간의 죄를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그 위에 피를 뿌리는 것은 희생제물의 피가 인간의 모든 죄를 덮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Ⅱ.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언약궤는 어떤 역할을 했나?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Shekinah)이 임재해 계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절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도 본 자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친구처럼 이야기하던 자라고 했던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약궤 위 속죄소에 임재해 계실 때는 구름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을 ‘쉐키나’라고 하는데, 성경에 언급된 단어는 아니지만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실제로 임재하시는 장소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브살렐을 통해 만든 언약궤는 고핫 자손이 메고 진행시에는 이스라엘의 진영 선두에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 길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또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요단강이 가로막혀 있었는데,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강에 첫 발을 내딛자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끊어지고 요단강 바닥을 마른 땅처럼 건너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이 어떻게 갈라질 수 있느냐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하지만, 저는 믿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강 하나 갈라지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강을 못 가르시겠습니까?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합니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큽니다. 우주에 있는 이 지구 하나는 지극히 작은 한 행성에 불과합니다.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강 하나를 못 가르시겠습니까? 바닷물을 증발시켜 버릴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 전투로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 성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수 6:3~5).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도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들 앞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곱째 되던 날 여리고 성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언약궤는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후 언약궤는 엘리 제사장시대까지 실로에 있었습니다. 언약궤가 처음부터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4장 6~7절에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었던 불량자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벡 전투에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다가 블레셋 군사들에게 언약궤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약 7개월 동안 블레셋의 여러 도시들로 가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먼저 아스돗의 다곤 신전의 다곤 신상 옆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다곤 신상이 신전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연의 일로 생각한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상을 다시 잘 세워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에는 고꾸라져 있을 뿐만 아니라 목과 손목이 다 잘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하루를 더 놔두었으면 발목까지 잘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다른 도시로 옮겨 놓았는데 독종이 생기고 환란이 생겨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이스라엘로 돌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수레에 실린 언약궤는 블레셋에서 가장 가까운 이스라엘 도시였던 벧세메스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벧세메스 주민들이 언약궤가 돌아왔다고 그 뚜껑을 열어 보았다가 70명이 즉사하게 됩니다. 만지지 말라하셨고, 열어보지도 말라 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후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20년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렇게 오래 언약궤를 모셨는데도 아비나답이 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주 이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오래 섬겼어도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다윗은 B.C. 1010년, 30세가 되던 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통치하고,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겨 33년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난 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 진실한 사람이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다윗은 언약궤를 운반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언약궤를 모셔오기 위해 30,000명의 군사를 모으고, 언약궤를 옮길 좋은 수레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운반하는데 무슨 군사가 필요합니까? 그저 고핫 자손과 제사장을 모시고 가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이었던 웃사와 아효는 수레를 몰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근처에 와서 소들이 뛰는 바람에 떨어지려던 언약궤를 웃사가 붙잡고 말았습니다. 절대로 만지지 말아야 할 언약궤를 만졌던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곳을 “하나님이 웃사와 충돌하셨다”는 의미의 ‘베레스웃사’라고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언약궤는 다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3개월 간 오벧에돔이 언약궤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벧에돔은 아비나답과 다르게 3개월 동안 엄청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드는 블레셋의 도시 아닙니까? 즉, 오벧에돔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언약궤를 모시겠다고 하고 전심으로 언약궤를 모셨더니 어마어마한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다윗이 알게 되었고, 그제야 언약궤를 운반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오벧에돔에 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게 된 것입니다.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우 기분이 좋았던 다윗은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아내 미갈에게 업신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삼하 6:20). 미갈이 자기 남편 다윗을 업신여기자 다윗이 그 후로 다시는 미갈과 동침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갈은 일평생 다윗에게 아내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드디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게 되었고, 40년간 통치하다가 B.C. 970년 아들 솔로몬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된지 4년 만에 성전건축을 시작해서 7년 만에 완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완공된 솔로몬 성전 안 지성소에 모셔두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을 하나님께 올려 드릴 때, 열왕기상 8장의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강한 임재와 능력으로 인해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으로 인해 제사장들이 감히 서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쓰러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 큰 영광을 올려 드리고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과 언약을 어기고 죄를 짓고 우상숭배에 빠져 B.C. 58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난 후 언약궤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70년의 기한이 마치고 바사의 고레스 칙령으로 말미암아 고향 땅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지었는데, 외경에 따르면 이 스룹바벨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 날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자기 나라 안에 언약궤가 있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에티오피아 종교계의 최고지도자도 본 적이 없다는 언약궤가 그곳에 있을 리는 만무해 보입니다. 지금 언약궤를 발견한다면 고고학적인 가치가 있을지는 몰라도 영적인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재가 되어 모두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Ⅲ. 언약궤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시는 곳’(Place of Revelation)입니다. 출애굽기 25장 22절에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궤의 속죄소에 영광의 구름으로 임재하시고, 그 곳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장소’(Place of Answering Prayers)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후 아이 성으로 침공을 시도했다가 패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7장 6절에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 앞에서 “하나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우리가 어찌하여 아이 성 전투에 패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아간이라는 자가 범죄했기 때문에 나의 영광이 너희와 함께 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간을 붙잡아 돌로 쳐 죽이고 아골 골짜기에 묻고 난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다니엘 역시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던 것입니다.
셋째, 언약궤는 당신의 백성들을 ‘용서하시는 곳’(Place of Mercy)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곳입니다. 레위기 16장에 보면 대제사장 아론은 제사장 의복을 입고 대속죄일(7월 10일)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딱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와 자기 가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수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속죄소에 일곱 번 뿌렸고, 다시 나와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또 피를 뿌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말 ‘화목제사’라고 번역된 영어 ‘Propitiation’입니다. ‘화목제사’라는 우리말이 적절한 번역은 아니지만 설명할 수 있는 그 밖의 단어가 없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범죄하는 죄인을 향해 하나님은 진노하는 분이십니다. 우상숭배하고 굿하고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됩니다. 오벧에돔처럼 3개월만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화목제사’(Propitiation)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Propitiation’을 적절하게 대치할 단어가 없지만, 이를 설명할 대표적인 이야기로 ‘심청전’이 있습니다. 심청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자신의 몸을 인당수에 던졌습니다. 용왕의 진노를 풀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이 ‘Propitiation’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십자가를 모진 고난을 담당하시며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것은 결국 자기 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향한 모든 진노를 없애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를 덮으시는 것입니다. 속죄소 금판은 죄를 덮는 판입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두 덮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그 피의 공로로 죄가 덮어져서 천국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예수님의 보혈로 덮인바 되지 않고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해 계신 곳’(Place of God’s glory)입니다. 영광의 구름이 속죄소 위에 임재하시면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도 무너지는 엄청난 역사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리면 언약궤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B.C. 587년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동문으로 나와 예루살렘 동편 산에 머물렀다가 바벨론으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언약궤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 론
하나님은 참으로 겸손한 분이십니다. 이 작은 나무상자 위에 임하신 하나님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모실 수 없는 광대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작은 언약궤 위에 임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매우 겸손한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겸손한 인품을 가져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마귀의 종입니다. 마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그래서 마귀 숭배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성품이 매우 교만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사과상자 다루듯이 취급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지고 열어봤다가는 다 죽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택한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언약궤를 볼 때에 십계명을 어긴 죄, 하나님께 반항한 죄,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며 살았던 모든 죄를 떠올리며 “나는 예수님을 믿고 그 피로 덮인바 되었다”고 고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덮여진 그리스도의 피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람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그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가림 바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그런 성도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성소의 언약궤
출 25:10-16 / 손상률 목사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성소를 짓고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예배 행위는 그 백성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비록 기약 없는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도 성소를 지었고, 그 안에 예배를 위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성소의 기구들 중 가장 중요한 언약궤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의 돌비를 담을 언약궤를 만들어 지성소에 안치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신령한 축복과 특권의 상징으로 주신 언약궤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성소는 훗날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입니다. 또한 이 성전은 신약시대의 곧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은 성도의 집단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엡 1:23).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는 성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기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1) 그리스도의 인성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0절에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는다고 하였습니다. 조각목은 히브리 원어에 쉬팀이라고 하는데 영어에는 아카시아(Acacia)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행을 하던 시내광야 지역은 물이 없는 사막이거나 나무와 숲을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였습니다. 그런 메마른 지역에서 서식하는 유일한 나무가 쉬팀이라고 하는데 예레미야 17:6에 보면 「사막의 떨기나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처음 호렙산의 불꽃을 보았을 때 이를 「떨기나무 불꽃」이라고 하였습니다(출 3:2). 이를 스데반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이라고 하였습니다(행 7:30). 지성소에 안치될 언약궤가 이처럼 볼품없는 조각목으로 만들어 지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는 세상에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면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사 53:2). 사막의 메마른 땅에서 자라난 쉬팀 나무처럼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겸손하신 인간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신성을 뜻합니다.
본문 말씀 11절에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라고 하였습니다. 곧 조각목 널판으로 만들어진 궤는 안과 밖 그리고 모서리까지 모두 정금으로 완전히 싸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궤는 화려한 정금의 모습으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두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 1:14).
(3)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돌비와 함께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담아 두었습니다(히 9:4). 여기 보관된 내장 물들은 모두 다 생명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물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새겨 주신 십계명의 돌비는 말씀의 본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하고 예수님이 말씀(λογος)의 본체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었던 하늘의 양식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6:48). 또한 죽은 나무막대기에 싹이 나고 꽃이 피게 된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민 17:10). 예수님 자신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1:25).
Ⅱ. 구속 받은 성도들의 모형입니다.
언약궤 안에 담긴 내장 물들이 하나 같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언약궤야말로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범죄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쉬팀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아카시아와는 달리 가시가 앙상하며 나무의 결이 세고 뒤틀어져 목수가 다루기에 매우 불편한 나무라고 합니다. 이처럼 재목으로써 가치가 없는 나무를 가지고 언약궤를 만들게 하신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옛날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는 잣나무를 재료로 쓰게 하였고(창 6:14),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는 질 좋은 백향목으로 건축하게 하였으나(왕상 6:9-10), 성전의 심장부에 안치할 언약궤는 가장 볼품없는 조각목으로 만들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궤의 재료가 되는 조각목을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그 본성이 조각목처럼 뒤틀리고 결이 세고 부드럽지 못하여 어디에도 쓰임 받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시켜 천사가 부러워할 만큼 존귀한 신분으로 높여주었습니다. 참으로 미련한 자를 세워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세워서 강한 자를 능가하게 하신 것입니다(고전 1:27-29).
(2)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습입니다.
11절에 정금으로 안팎을 싸고 모서리에는 테를 두른다고 하였습니다. 궤 아래로 네 귀퉁이에다 금으로 만든 고리를 달고 거기에 조각목의 긴 채를 꿰어서 이동할 때 메고 다니게 하였습니다. 여기 길게 만든 채도 금으로 싸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궤를 만든 판자의 안과 밖을 금으로 싼 것뿐만 아니라 고리와 채까지 모두 완전한 금을 입혀 누가 봐도 거창한 황금 궤짝이 되게 하였습니다. 속을 들여다보면 분명 가치 없는 조각목인데 겉으로는 찬란한 정금으로 단장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정금을 가장 존귀한 보배로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하기 때문입니다(마 13:44).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금 곧 정금”이라고 하였습니다(시 19:10). 베드로는 모든 시험을 이기고 승리한 믿음을 정금으로 표현하였습니다(벧전 1:7). 그 외에도 정금은 성령의 은사 또는 존귀한 직분으로도 비유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5:17). 본래는 육신의 사람으로 음행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술 취함과 방탕함으로 온갖 더러움에 가득한 우리들인데(갈 5:19-21),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어 예수님으로 옷 입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3) 거룩한 신분을 지닌 것입니다.
「성도」의 이름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의 의미는 구별된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거룩은 원래 하나님께 해당되는 용어인데 이 말이 하나님과 관련되는 모든 것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2).
언약궤는 그 자체가 정금으로 덮여 있어서 다른 어떤 기구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성소에서도 구별된 장소인 지성소에 안치하게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대제사장만 일 년 일차씩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히 9:7).
구별된 장소인 지성소, 거기 안치되어 있는 언약궤, 이는 세상과 구별된 성도의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요 빛들로 나타나야 될 사명이 있는 자들입니다)빌 2:15).
Ⅲ. 그리스도인이 받는 축복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여호와의 이름 자체가 엄청난 축복입니다. 옛날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는 지나온 광야 길을 회고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고 하였습니다(신 33:27).
(1) 임마누엘의 삶을 의미합니다.
민수기 10:33-34에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행진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을 할 때 언약궤와 함께 움직이고 그들이 진을 칠 때는 언약궤를 중심으로 장막을 세웠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임재의 상징일 뿐 아니라 축복의 도구이기도 하였습니다. 언약궤가 진중에 건재할 때 백성은 안정되고 나라는 튼튼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약궤가 그들에게서 멀어지면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언약궤가 그들에게서 떠나가는 그 순간을 곧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는 「이가봇」현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삼상 4:11).
(2) 형통케 되는 비결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싸인을 주시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민 9:15-17). 그 때는 언제나 언약궤를 멘 제사장이 행진의 선두에 서서 백성들의 걸음을 인도하였습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언약궤를 멘 제사장의 발길이 물에 닿을 때 흐르던 강물이 멈추어 섰고(수 3:15-16),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도 역시 나팔을 든 제사장과 함께 언약궤가 백성들 앞에서 길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이는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수종드는 하나님의 종들이 선두에 서고 백성들은 일사불란하게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예배적 삶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임마누엘의 축복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는 삶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언약궤는 그 속에 하나님의 계명인 십계명의 돌비를 간직하고 있지만 또 한편 거기서 그 백성에게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22절에 보면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신약적인 의미에서 생각할 때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가 다 지성소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계시를 받아 신령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6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Ⅳ.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조각목과 정금으로 만든 언약궤는 그것을 명하신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쓰임을 받게 됩니다. 곧 세상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의 사명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1) 말씀을 파수하는 일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겨 놓은 돌비가 있습니다(16절). 이를 하나님의 율법이라고도 하고 또 언약의 말씀이라고 하여 그 궤를 “법궤” 또는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언약궤는 그 자체의 상징성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보관하고 있는 내용물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정금으로 단장을 한 것이라도 그 안에 보관된 십계명의 돌비 곧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이 없으면 언약궤로서의 의미를 상실합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진리의 말씀을 파수해야 되는 사명이 있습니다. 어느 때나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일수록 이를 노리며 빼앗으려는 세력이 많은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도 소중하기 때문에 이를 빼앗거나 훼손하려는 무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온갖 이단과 거짓 선생들이 성경의 진리를 훼손하려고 시도했으며 자유주의 신신학과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건전한 성도들은 목숨을 걸고 바른 신앙과 진리를 파수하여야 됩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언약궤를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취급하다가 화를 당한 경우가 있습니다. 언약궤가 블레셋 땅에서 돌아왔을 때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를 들여다 본고로 하나님이 그들을 치셔서 오만 칠십 명이 죽었다고 했고(삼상 6:19), 또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오던 웃사가 궤에 손을 대므로 하나님이 치셔서 즉사한 일이 있습니다(삼 6:7). 이는 언약궤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의 존엄성과 권위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신명을 걸어야 됩니다. 볼품없는 쉬팀 나무에 값비싼 정금을 입혀 찬란한 모습으로 빛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 받을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성결케 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부여하신 것은,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려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요 3:30).
(3) 헌신자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언약궤의 종말에 대하여 예언을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16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치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는 장차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기구입니다. 영고성쇠(榮枯盛衰)하는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그들 속에 어렴풋이나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각인 시켜주고 저는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역할과 사명이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뿐 아니라 성전과 거기 있는 모든 기구들은 다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저희의 모습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것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
출 25:10-22 / 박덕기 목사
오늘도 성막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소는 외소와 내소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깥들인 외소에는 맨 먼저 번제단이 있었지요? 희생제물을 드리는 번제단에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죄사함을 받고 나면,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된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어야 했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도 영혼의 거울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회개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외소에서 내소인 성소로 들어서면 좌측 중앙에 금촛대가 있었다고 했지요? 창문 하나 없는 성소는 이 금촛대에서 비취는 빛으로 말미암아 금빛이 찬란하다고 했습니다. 이 촛대는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천국 시민된 그리스도인의 사명으로서 우리는 어둔 죄악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금촛대의 반대편에는 진설병을 항상 진설해 놓은 떡상이 있었다고 했지요? 이 떡상의 진설병은 곧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생존경쟁을 하고, 죽지 않으려고 하루 세끼 꼬박 꼬박 밥을 챙겨 먹지만 그러나 그 밥을 먹고 영원히 산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산 떡이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소 안에 있는 세 번째 성구는 분향단이었습니다. 분향단은 제사장들이 향을 사르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저절로 풍기는 소합향 같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기도의 갈급함에서 우러나온 기도이어야 하고, 조개껍질을 부수어서 만든 나감향 같이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수어진 기도라야 하고, 소독제로 쓰였던 풍자향처럼 영혼의 독소를 제거하는 회개의 기도라야 하며, 유향처럼 우리에게 닥친 재난과 불행을 제거해달라는 얍복강가의 야곱과 같은 간청의 기도라야 하며, 이 모든 기도에 언약의 상징이었던 소금처럼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향같은 기도라야 하늘 보좌에까지 올라가는 응답받는 기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기도하는 성도들 곧 진실하게 기도하는 성도를 가까이 하시고, 그리스도인의 신랑 되신 예수님 역시 기도의 향이 있는 신부를 더욱 사랑하시므로 기도의 향이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성막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지성소였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 곧 칠월 십일 대속죄일에 들어가던 곳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고, 성전의 중심은 지성소이고,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이다.” 지성소가 그토록 중요한 것도 다름 아닌 법궤 가 그곳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법궤에 담긴 진리를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법궤의 이름
구약 성경에 보면 법궤에 대한 이름이 아주 다양하게 나옵니다. 곧 1)법궤 2)궤 3)증거궤 4)하나님의 궤 5)여호와의 궤 6)거룩한 궤 7)권능의 궤 8)이스라엘 신의 궤 9)여호와의 언약 궤 10)나무 궤 등으로 그 이름이 다양합니다.
2. 법궤의 귀중성
몸이 10냥이면 눈은 8냥이라고 말합니다. 성막이 10냥이라면 법궤가 8냥이라고 할 정도로 법궤는 중요합니다. 법궤는 몇 가지 면에서 귀중합니다.
1)금이 가장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귀중합니다.
법궤위에는 두 천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금덩어리여야 합니다. 조그만 아이만한 금덩어리가 둘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2)하나님께서 계신 자리이기에 귀중합니다.
민 9:15-16에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며,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모양이 있었는데”라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리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법궤에 임재 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언제나 법궤 위에 떠올랐습니다.
3)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기에 귀중합니다.
출 25:21-22에 “속죄소는 궤 위에 얹고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법궤 “거기서 너와 만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가장 귀중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역사상 가장 귀중품은 법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실 때에는 반드시 법궤 거기서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4)하나님의 말씀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귀중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내가 네게 줄 증거 판을 궤 속에 넣으라.”고 했는데, 이는 곧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법궤에 넣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법궤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이 새겨진 돌비가 들어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한 성물이었습니다.
3. 법궤의 재료
법궤의 재료로서는 조각목을 사용했습니다. 원문에는 ‘쉬띰’나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자라나는 가시나무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광야지대에 흔히 있는 나무로서 천하게 사용되는 재료였다고 합니다. 영어에는 종종 이 나무가 아카시아로 번역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히 쓰는 목재로는 백향목과 상수리나무와 잣나무들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백향목으로 지어졌고, 노아의 방주는 잣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이런 점을 놓고도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 존귀한 법궤 한 개를 만드는데 백향목이나 잣나무로 만들도록 하시지 않고, 그렇게 흔하고도 천한 쉬띰 나무를 사용하도록 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도저히 백향목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었을까요? 꼭 그렇게만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이사야 선자자의 예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 53:2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오는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이 법궤 자체도 궁극적으로는 구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사막의 마른 땅에서 고운 모양도 없고 아무런 풍채도 없이 자라난 천한 쉬띰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예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쉬띰’이라는 가시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험악한 고난을 예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 가시나무에는 많은 진액이 흘러 그것은 아라비아인들의 약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역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구속을 예표 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나무의 특징은 썩지 않는데 있다고 합니다. 70인역 성경에는 썩지 않는 나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때의 그 필자들은 이 나무의 썩지 않는 특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특성도 그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면, 그것은 장차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영원성을 예표 함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쉬띰 나무의 안과 밖을 정금으로 쌌다고 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라한 인성과 영화로운 신성을 동시에 표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법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법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 교제하셨듯이, 오늘날 하나님은 오직 법궤가 예표 하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와 교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문이요 통로가 되십니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분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 중심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마음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엽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들어오시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눔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4. 법궤가 주는 교훈
1)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귀합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증거 판을 넣어 둘 법궤를 만들 때 먼저 조각목으로 만든 다음 그 안팎을 정금으로 싸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만들 때 그 안팎을 금으로 싸서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증거판을 넣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금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금이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노래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금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영혼의 생명을 살리는 법이요, 구원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금은 이 세상이 지나가기까지 잠시 동안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요, 아무리 많은 금으로도 죽은 생명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영혼을 살리고 구원을 얻게 하는 주의 말씀의 가치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깨닫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황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사상이 팽배해져 있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금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재물보다 더 소중히 여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재물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쉽게 넘어지곤 합니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부자 청년도 그런 갈등 속에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녕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깨달음으로 자신의 모든 금은을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얻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2)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12-15절을 보면 금고리 넷을 만들어 법궤의 네 발에 달고 또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그 고리에 꿰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법궤에 고리와 채를 만든 것은 물론 법궤 운반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법궤를 만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사람이 그 법궤를 만지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해할 때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를 불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그들의 신당에 두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크게 징계하신 사실과, 다윗이 기럇여아림에 있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길 당시 웃사가 하나님의 법궤를 손으로 만짐으로 즉시 죽게 된 사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리와 채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법궤를 손으로 만지지 않고도 운반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고리에 한번 맨 채에 대해서는 지성소에 안치할 때에라도 다시 빼지 못하게 하셨는데, 이 역시 사람들이 혹시 법궤의 고리라도 만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늘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거룩하심을 침해하는 때에는 지체하지 않고 진노하심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고의적으로 혹은 부주의하여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해하지 않도록 늘 주의하며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늘 깨어 경건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항상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방심해도 우리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고 거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경건의 연습을 쉬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인 경건의 연습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5. 법궤 속의 내용물
법궤 속에 담긴 내용물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구들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히브리서 9:4절에는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라고 했는데, 왕상 8:9에는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성구의 차이는 법궤가 광야에 있을 때와, 법궤가 가나안에 입성한 후 솔로몬의 성전에 안치되었을 때와의 차이 때문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법궤를 모시게 되었을 때는 오직 두 돌비의 계명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만나가 아무리 귀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가치뿐이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아무리 신비스러워도 그 역시 영원한 것이 될 수 없음을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만나가 얼마나 신비한 양식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전혀 농사를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날마다 내려주시는 하늘 양식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인 길갈에 도착하자 만나가 그치고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소산물을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만나를 “너희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금항아리에 담아서 법궤 안에 보관하였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레위인만 제사를 드려야 하며 왜 아론만 대제사장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하면서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족장들에게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오게 하고, 그 위에 각기 이름을 쓰는데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들을 법궤 앞에 두도록 하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게 할 터인데,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원망을 그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법궤 앞에 가져다가 간직하여 패역한 자의 표징이 되게 하여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만나도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매우 신비한 물건들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일에는 이렇듯 신비한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사라지고 법궤 안에는 오직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 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그것은 영원히 남아야 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궤요, 하나님의 말씀뿐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는 곧 “여호와의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말씀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그래서 종교 개혁가들의 모토는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성소의 분향단은 지성소의 법궤와 마주 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도가 중요하지만 기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연결되어야 올바른 기도가 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랑하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의 신앙이 어떠한 신비 체험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건강한 신앙이 되시기를,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법궤를 만들라
출 25:10-22 / 임덕순 목사
새 집을 하나 짓다 보면,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돈이 훨씬 더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짓다 보면 설계를 변경하야 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설계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고 욕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계변경이 전혀 없이 아주 완벽하게 설계되고 완전하게 시공된 건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성막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설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주 세밀하게 설계하여 주셔서, 그 설계대로 건축했기 때문입니다.
성막의 모든 자재와 치수와 모양 들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면서 맨 먼저 그 성막 안에 두어야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법궤에 대한 설계도부터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법궤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첫째, 법궤의 재료는 가시나무와 순금 이라는 두 가지입니다.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법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야 하고, 금으로 완전하게 싸야 하는 장방형의 상자였습니다. 길이는 2.5규빗(120Cm), 넓이와 높이는 1.5규빗(70Cm)입니다.
조각목이라고 하는 나무는 광야에서 자란 아카시아 과의 가시나무인데, 쉬띰나무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이 나무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막에서 자랐기 때문에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 고생고생하면서 자란 마디가 많고 딱딱하고 볼품없는 나무가 쉬띰나무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 나무는 우리 주님께서 취하실 인성을 예고합니다. 그리스도는 처녀에게서 태어나 육체를 가지셨는데 그 육체는 가뭄에 찌들리며 자란 광야의 가시나무처럼, 너무나 심한 고난을 받아 상하게 될 수난용 육체였습니다. 성막을 통해서 그림자로 예언하신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언어로 예언하신 이사야서에 보면, 사53:2.3에 예언하기를, “그는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은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가지신 육체가 아니라, 고난당하기 위해서 가지신 육체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육체가 가시나무처럼 찔리고 찢기고 상하여 너무나도 보잘 것 없이 될 것을 가시나무로 묘사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 대신에 맞고 찔리고 피 흘려 죽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시나무가 보여줍니다.
법궤의 두 번째 자재는 순금입니다.
법궤를 쉬띰나무로 만들되 그것을 안팎으로 순금으로 싸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명하셨을까요? 금은 불변의 속성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가시나무처럼 볼품이 없고 고통 받고 죽게 될 변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지만, 그리스도는 사실상 영원 전부터 살아계시며 영원히 변함없는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이 순금은 영원하신 예수님의 신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육체만 가지신 것이 아니라 존귀하신 신성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만 가진 인간만이 아니라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요10:30에서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하셨고,
요1:14에서 요한은 증언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법궤는 가시나무로 짰지만, 순금에 싸여 있어서 가시나무는 보이지 않고 찬란한 순금궤로만 보였습니다. 나무를 감싼 순금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순금으로 묘사하신 것입니다.
순금은 또한 왕의 신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새벽에 동방에서부터 별을 따라 찾아온 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 경배드리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는데, 황금을 드린 것은 그분을 왕으로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사9:6-7은 예수님의 신성과 그의 왕 되심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가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고대의 제왕들은 금으로 치장하였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왕 중에 왕이시라고 예언되었고, 그것을 드러내는 계시가 바로 법궤를 정금으로 싸라고 하시는 명령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25:11에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 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라고 하셨습니다. 법궤가 왕관을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법궤의 위쪽 가에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게 했는데, 그것은 왕관을 의미했고, 왕관은 주권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사실 왕 중의 왕이시며,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는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는 육체를 가지고 오실 것이지만, 그분의 근본은 영원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시고 왕 중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법궤의 자재와 모양이 계시하고 있습니다.
둘째, 법궤는 언제나 두 개의 채로 꿰어서 메어야만 했습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장의 돌판을 담을 것이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도 담을 것이며,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담을 것입니다. 또한 아주 딱딱한 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싼 궤짝이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마차에 싣도록 했으면 참 쉬웠을 텐데 그렇게 아니하시고 궤짝의 양 옆구리에 두개씩의 고리를 만들고, 금으로 싼 긴 나무막대기를 궤짝의 고리에 꿰어 사람들이 어깨에 메어서 운반하라고 하셨습니다(13,14).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지는 그렇게 하지 않다가 당한 일을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삼하6:에 보면 다윗이 선발된 군사 3만 명을 데리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모셔오는 기록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깨에 메어온 것이 아니라 새 수레를 만들어서 법궤를 수레에 싣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레셋 사람들의 방법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일을 하면서 기뻐서 수많은 악기를 연주하게 하고 행렬을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나곤 이라는 사람의 타작마당을 지나갈 때 수레를 끄는 소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웃사 라는 사람이 법궤가 땅에 굴러 떨어질까 봐서 붙잡았더니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을 본 다윗은 법궤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자기의 도성으로 모셔오지 않고 가드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옮겨다 두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그 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깨에 메고 가라고 했습니다(삼상6:10) 법궤는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가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편리하게 수레에 싣고 갈게 아니라, 힘들게 어깨에 메어 운반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을 힘들게 하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의 구주로 보내실 그리스도는 아무도 질 수 없는 인간의 죄짐, 인간이 저지른 저주의 십자가를 당신의 것이라고 여기셨습니다. 그것이 너무 무겁고 너무 창피하지만 결코 벗어던지지 않고 당연히 짊어질 당신의 짐으로 여기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의 무게를 느끼면서 한걸음, 한걸음 순종의 삶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계시하기도 합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쉽게 살려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너무 무거워서 벗어 던지고 싶은 때도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코 벗어던지지 말고 그 무게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뚜벅뚜벅 말씀 따라 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임을 말씀을 담은 법궤는 꼭 메고만 가라는 명령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요즈음은 위성예배와 사이버교회가 생겼습니다. 위성예배란 대형 교회가 멀리 이사 간 성도들이나 타 지역 사람들을 그 지역의 다른 교회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지역마다 지교회 라는 것을 세우고, 본교회의 목사님이 하는 설교를 위성중계로 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울의 내노라 하는 큰 교회는 거의 이런 위성교회를 세웠답니다. 그리고 기독교 TV가 생겨서 집에 앉아서도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집에 앉아서 TV로 설교를 듣고 온라인으로 헌금을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봉사 없이, 수고 없이, 간섭받지 않고, 쉽게만 믿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제대로 신앙생활이 되며,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십니다. 법궤는 어깨에 메어야만 하고 섬기는 수고가 따라야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법궤를 고리에 꿴 채는 빼지 말고 항상 꿰어두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언제까지나 이 방식을 고수하라는 명령입니다.
셋째, 이 법궤가 언약궤라고 불리게 됩니다.
법궤 안에 넣은 두 돌비에는 인간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절대법인 십계명이 적혀 있는데, 사람이 이 법을 준행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되어있습니다. 아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고, 신28:에는 율법을 주시면서 ‘내가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다’고 하셨으며, 신약에도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킨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인생은 모두가 심판과 사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서, 너는 이 계명을 지키지 않았으니 너는 죄인이고, 죽어야만 한다고 정죄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율법이 바로 그 언약궤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궤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이며, 죄인을 정죄하는 곳이고, 죄인을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축출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누구든지 그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기만 하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웠고, 그들도 죽음을 대비해서 허리에 끈을 매고 옷자락에 종을 매달고서야 들어갔습니다. 죄인을 정죄하는 율법이 들어있는 그 법궤는 사람에게 사망선고를 내리는 궤짝이었고, 사실상 사망의 궤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궤의 뚜껑을 닫아버리고 그 위에 속죄소라는 것을 만들어 얹게 하신 것입니다.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17)
그 덮개는 법궤 안에 있는 물건들이 보이지 않게 하는 덮개 부분과, 양쪽에 두 명의 천사가 법궤 중앙을 향하여 날개를 펴고 마주 앉아 있는 조각부분으로 되어있는데, 이 모든 것은 한 덩이의 금으로 무겁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속죄소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법궤의 뚜껑을 덮고는 그 뚜껑을 속죄소라고 부르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대제사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긴 휘장을 쳐들고 들어와서 속죄소라 부르는 그 법궤의 뚜껑에 피를 일곱 번 뿌려서 백성들의 죄에 대한 사죄를 청하였고,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백성들을 죽이지 아니하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제사장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를 하나님앞에서 뿌리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명백하게 어겨 영원한 사망을 받게 된 인간에게 심판이 내리지 않도록 하신다는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그 속죄소는 바로 속죄자이신 그리스도의 분명한 상징입니다.
속죄소란 히브리어로 카포렛이며, 카포렛의 원형인 카팔은 ‘덮는다.’는 뜻입니다. 속죄소를 다른 말로는 시은소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기 피를 뿌리심으로 진노의 율법을 덮어두셨고 도리어 은혜를 베풀게 되었다는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분인데, 하나님의 시퍼런 법이 그대로 열려 있다면 죄인에게 심판과 멸망은 자명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들어있는 궤를 두꺼운 순금 덮개가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리스도의 피를 뿌렸습니다. 정죄의 율법을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 대신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덮고 있어서 그 법이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정녕 죽으리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선언 하셨으나,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출12:13). 죄의 삯은 여전히 사망이지만, 그리스도가 너희 대신에 피 흘려 죽으셨으니, 이제는 너희 죄 값을 묻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가치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는 그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특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 신기하고 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이제 믿는 사람에게는 율법이 더 이상 사망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정밀한 이치입니까?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이제는 법궤가 “믿는 사람은 구원해 주리라.” 는 언약을 보증하는 언약궤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법궤이지만, 그 피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제 구원의 언약을 담보하는 언약궤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들을 법궤의 모양을 통해서 상세하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놀랍지 않습니까?
넷째, 언약궤 안에는 만나가 들어있는 금 항아리도 있었습니다(출16:33, 34).
법궤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 법궤 안에 만나가 들어있는 금 항아리를 담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을 주신 분이요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계시합니다. 그분에게 나아가지 않고는, 그 누구라도 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요6:48에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지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으로 먹고 죽지 않게 하는 것이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요6:51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하셨고, 요6:55에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바뀌어도, 사람을 진정 사람답게 살게 하고, 영생하게 만드는 구원의 양식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공급받을 수 있다는 예언을 법궤안의 만나 항아리로 정확하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다섯째, 언약궤 안에는 아론의 지팡이도 있습니다.
그 지팡이는 마른 지팡이였는데 싹이 나서 살구가 열린 기적의 지팡이입니다(민17:8). 모세의 형인 아론이 모세를 도와 제사장이 되자,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을 부인하고 모세가 정실로 자기 형을 그 자리에 앉혔다고 불만이 많았습니다. 모세는 속을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각 지파의 두령들이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를 다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성막 안 법궤 곁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의 지팡이를 모아 성막 안에 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가져왔더니, 아론이 사용하던 마른 나무 지팡이에서는 싹이 나고 살구 열매가 맺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택하셨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셔서 백성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이 일을 후손들도 알아야 하기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법궤 안에 보관해 두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질서를 파괴하다가 망하는 사람들을 예방하기 위하여 취하신 조치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장차 하나님이 보내실 인류의 대제사장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기 위한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아론의 지팡이는 마른 막대기였는데도 싹이 나서 꽃 피고 열매가 열린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 대신에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서, 부활이라는 모든 인생이 희망하는 꽃을 피우고, 구원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싹이 나고 열매가 열린 지팡이를 법궤 안에 담아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참으로 신기하지요?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증명서이며, 우리에게 내세 천국을 주신다는 보증서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부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왜 하필 살구나무였을까요? 렘1:11-12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시고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살구나무 가지에 꽃이 핀 모습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여주시고는 설명을 해주시는데,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살구나무는 다른 나무가 잎을 피기 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워서 봄을 알리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살구나무를 ‘깨어 있는 나무’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기 위해서 잠들지 않고 깨어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법궤와 성막과 모든 상징물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약속해 주시면서, “나는 이 약속을 잊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고 있다가, 정확한 그 때에 그리스도를 보내주마”하고 살구나무 지팡이로 계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때가 차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약속대로 우리의 속죄소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른 봄에 살구나무가 가장먼저 깨어나 꽃을 피우듯이, 이 세상 끝 날에 주님이 재림하여 우리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너희에게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 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고 신약성경의 맨 마지막 약속도 남기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된 우리의 구주이신가를 알게 되었지요? 성경은 사람들이 쓴 책이 아니라 신비한 하나님의 약속의 책입니다. 어떤 분이 특별히 착하고 기적을 많이 행하시기에 감동을 받은 몇 사람이, 이분을 우리가 구주로 믿자고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준비하시고 계시하시고 보내신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는 본래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왕 중의 왕이시며, 생명의 떡이고, 오늘은 구체적으로 내 삶을 인도하시고 내일 재림하셔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자녀들은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세월이 변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과, 욕심과 죄악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세상 사람의 삶이 완전히 양분되는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 시대에는 중립이란 게 없습니다. 한없이 악하게 살다가 사단과 함께 지옥에 가든지, 순교를 각오하고 주님 따라서 진리를 행하며 살다가 영생을 얻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날입니다. 이 시대에 어린이를 어떻게 기르려 하십니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돈 많이 버는 사람보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의의 도구로 살다가 천국에 갈 사람으로 길러야 합니다. 아이들을 기르되, 힘들지만 날마다 하나님 바라보고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으로 길러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어린이날 설교는 없다고 생각해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으면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성도가 됩시다.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
출 25:21-22 / 이성희 목사
우리교회가 창립 113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주일입니다. 먼저 좋은 역사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를 세우고 이끄신 믿음의 선조들의 수고와 땀 그리고 우리의 정성이 이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연동교회의 성도가 된 것을 감사하고 성도의 의무를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113’이란 숫자의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뒤져도 특별한 의미가 없는 숫자였습니다. 성경에도 숫자의 큰 의미는 없고, 찾다보니 딱 한 가지를 찾았습니다. 간첩신고는 ‘113’입니다. 그것도 요즘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간첩도 없다고 하고, 신고해도 잡지도 않고 해서 최근에는 ‘113’ 번호가 거는 사람이 없어 놀고 있을 것 같습니다.
간첩신고란 안보를 해치는 적을 신고하여 없이하는 일입니다. 국가의 정체성을 흔드는 원수를 멸하는 일입니다. 간첩을 신고하여 없이하는 일이 국민의 사명입니다. 국가의 근간을 든든히 하는 국민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을 뿌리 채 뽑아 버리는 일입니다. 사탄의 손길을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들을 찾아 제거해야 합니다. 사회악, 부조리, 범죄, 사상과 사조 등 사회를 좀먹게 하는 것들을 뿌리부터 제거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특히 113주년을 교회인 우리교회가 이 일을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수도원의 영성의 핵심은 수도사들이 영성적 훈련을 통하여 수도원의 영성을 교회에 흘려보내는 일을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맑은 물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세상이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때문에 지역이 맑아지고, 서울이 좋아지고, 한국에 희망이 있고, 세계가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성막을 세우실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25장 이하의 말씀은 성막을 세우신 뜻과 율례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기 위한 것이 성막을 세우신 뜻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십니까? 교회에서 만나십니다. 둘째는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한 모든 일을 이르리라”고 하신 것으로 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를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인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교회에 오신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많은 교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시대에 하나님이 만나시고, 시대에 필요한 말씀을 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를 113년 전에 연못골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새기고 교회의 사명을 잘 수행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26절에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부부에 대한 말씀이지만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물과 말씀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물로 씻는다는 말은 한 번의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누구나 한번의 물로 씻음은 필요합니다. 교회에 올 때에 처음부터 말씀에 은혜를 받고 감동이 되어 온 사람은 없습니다.
한 번의 물세례가 필요하지만 계속되는 말씀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한 번 거듭남을 체험하고 나서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시는 정결한 삶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하신 말씀처럼 목욕한 자라도 발을 씻어야 합니다.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됩니다. 두 번의 세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한 번의 세례와 계속적인 성찬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합니다. 한 번의 구원과 계속적인 성결의 삶이 필요합니다. 한 번의 결단과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이 일을 잘 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일상생활에서의 성화를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변화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각성으로 삶의 현상이 달라지게 보여야 합니다.
인도의 펀잡 지방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 ‘시크’ 교도를 아시지요? 머리에 터번을 쓰고 칼을 차고 다닙니다. 얼마 전에는 비행기를 탈 때도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도록 인도해서 허용했습니다. ‘시크’의 총본부인 암리차르 사원에는 황금사원이란 사원이 있습니다. 영국 BBC 방송은 죽기 전에 꼭 가보아야 할 50곳 가운데 6위로 선정한 곳입니다. 이곳은 완전히 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시크교도들을 ‘펀자비’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사원 안의 물 속에 들어가 줄을 잡고 몸을 담그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자신을 씻는 예식을 하는 것입니다. 사원에는 몸을 씻는 물도 따로 있습니다. 이 거룩한 물 속에서 나와 다시 물로 씻으면 이전에 물에 잠근 것이 무효가 될 것 같은데도 이들은 이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간지스강은 인도인들에게는 거룩한 강입니다. 이들은 이 물을 성수라고 생각합니다. 물에 몸을 잠금으로 자신이 거룩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최근에는 강이 심하게 오염되어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이곳을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이유는 부처님이 목욕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곳에서 무엇을 씻습니까? 인간의 번뇌를 씻습니다. 죄를 씻지 않으면 번뇌가 씻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는 일은 계속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성결의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이런 일을 하기 위하여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물로 씻음을 받았습니까? 구원 감격과 거듭남의 체험이 있습니까?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성화의 체험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를 통하여 죄를 씻음 받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삶을 거룩하게 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성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입니다. 영성적 기능이란 구원의 기능입니다. 예언자적 기능이란 사회정화의 기능입니다. 교회가 사회와 믿지 않는 자를 구원하고 있습니까? 구원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아서 그렇지는 않습니까? 전도의 능력도 상실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의 감격과 체험을 가지고 사회를 구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영적전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7월 미국 뉴욕타임즈은 한국을 IT 강국에서 미신 강국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 무속신앙이 부활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서울과 인근도시에는 무속 사당이 300여개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무당이 80만 명이나 됩니다. 압구정동에 점쟁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 고객이 20대 청년들입니다. 옛날에는 점쟁이를 찾아갈 때 몰래 갔었는데 이제는 버젓이 갑니다. 무속인들이 수입이 일년에 1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30%는 기독교인들이 갖다 주는 돈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가 귀신의 손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조상의 묘를 명당으로 이장하면 선거에 이길 수 있을지 문의하는 정치인들이 무속인들의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용하다는 무속인들은 예약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첨단 IT 사회인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바쁜 일상을 가지고 가장 호황을 누리는 직업이 무속인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이런 일이 미신이 아니라 전통 한국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이게 한국교회의 영적 수준입니다. 이게 한국교회의 현상입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가장 잘 생긴 얼짱, 몸짱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귀신 때문에 죽었습니다. 역대상 10:13-14에는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었더라”고 합니다. 귀신에게 물어보는 사울을 하나님은 죽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귀신에게 물어보면 하나님은 여지없이 죽이십니다.
반면에 다윗을 보세요. 그는 하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일도 일일이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불레셋을 치러 올라갈까요?” “언제 치러갈까요?” “어디로 올라갈까요?” “어떻게 갈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답을 보세요.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느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던데”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귀찮게 할수록 좋아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물어보세요! 틀림없이 답하십니다. 여러분, 알아서 하세요! 틀림없이 죽습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구원하게 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구원받은 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 티나 주름 잡힌 것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27절은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역할은 티나 주름을 없애는 일입니다. 거룩하게 하는 일, 흠이 없게 하는 일은 도덕적 삶을 살게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도덕적 규범과 삶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찬송가 55장 4절을 보세요. “우리들이 거듭나서 흠이 없게 하시고 주의 크신 구원받아 온전하게 합소서”. 흠이 없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램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거듭나야 흠이 없게 되고, 온전하게 됩니다. 구원이란 영적 기능입니다. 흠이 없고 온전하게 하는 것은 도덕적 기능입니다. 영적 기능이 있어야 도덕적 기능이 따라옵니다.
제가 군대 생활할 때에 헌병이어서 다림질을 잘 했습니다. 헌병들이 잘 하는 것이 다림질과 구두 닦는 일입니다. 구두도 얼마나 잘 닦았는지 제게 군화 한번만 닦아달라고 줄을 섰습니다. 다림질도 아주 잘 했습니다. 군복 바지 말에 손을 벤다고 할 정도로 칼날 같이 선 바지를 세웠습니다. 다림질을 보세요. 결국은 물과 열로 날을 세웁니다. 티는 물로 닦고 주름 잡힌 것은 물을 살짝 뿌려서 열로 누르는 것입니다. 물과 불은 티나 주름을 없애는 도구입니다.
다리미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옛날 냄비 같은 다리미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숯불을 냄비 같은 다리미에 넣어서 다렸습니다. 조금 발전한 것이 숯불 다리미입니다. 그 때는 물을 입안에 잔뜩 넣어서 ‘푸우’라고 뿌려서 다리미로 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물이 나오지 않는 다리미가 나왔습니다.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다리미로 다렸습니다. 그 다음에 증기가 나오는 다리미가 나왔습니다.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요즘 다리미 같은 다리미가 있었으면 제가 졸병 시절에 조금은 편했을 것입니다.
티는 물로 닦아야 합니다. 주름은 열로 눌러야 합니다. 티나 주름 잡힌 것을 없이하는 비결은 물과 불입니다. 기독교는 불의 종교이고, 물의 종교입니다. 불로 태우고, 물로 씻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할이며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물과 불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도덕적 규범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두 번째 기능입니다.
기독교의 예언자적 기능이 이런 기능입니다. 기독교의 대 사회적 기능입니다. 사회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경고하고, 개선하고, 지도하는 기능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첫 번째 기능과 더불어 두 번째 기능이 있어야 올바른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티와 주름을 보세요. 사회 전반에 티가 있습니다. 구겨지고 주름잡혀 바른 곳이 없습니다. 어디 하나 제대로 된 데가 없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어느 곳도 온전한 곳이 없습니다. 성한 데가 없습니다. 술집이 아무데나 어디에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규범이나 예의도 없습니다. 수없이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성도덕이 타락하고 있습니다. 웬 사기꾼이 그렇게 많은지 쑤시면 터지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사회가 온통 곪아 터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 가장 좋은 방법은 물과 불로 다림질해야 합니다. 물과 불로 다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서히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정부나 기관에 대한 정책 감사가 아니라 후보에 대한 감사를 국회 각 위원회에서 합니다. 국민들이 볼 때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데 자기네들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정치적 티와 주름은 물로 닦고, 열로 주름을 다려서 구김을 펴야 합니다. 이 일은 교회가 해야 합니다. 영적 능력으로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이번 12월의 대통령선거는 국민을 통합하고, 경제를 회생하고, 국가 정체성을 살리고, 교회와 대학 그리고 언론의 자유와 민주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대통령이 되게 교회가 밀어줘야 합니다. 교회가 정치에 가담할 수밖에 없고, 대학이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고, 언론이 정부와 투쟁하는 이런 일은 민주주의를 퇴보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세계화 시대에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누굴 찍든지 우리 교인들은 빠짐없이 다 선거에 참여해야 합니다.
경제학자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일등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과 사회 자원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은 이미 과잉 상태라고 합니다. 남아도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회 자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회자원이란 신뢰와 협동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회 자본이란 무형 자원인데 이것이 없이는 절대로 경제 대국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 자원을 충족시켜줘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국가발전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사회 자원이란 결국 영적 자원입니다. 신뢰와 협동과 사랑이란 것이 영적 자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회 자원이란 교회만이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남은 것은 교회의 몫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있고, 신뢰가 구축되고, 협동이 이루어져야 영적 자원, 사회 자원이 충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회발전, 국가발전에 앞장서서 기여해야 합니다. 국가와 괴리되고, 동떨어진 교회는 필요 없는 교회입니다. 영적자원은 결국 영적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경적 기초 위에서 기도하고, 말씀 보고, 묵상하는 신앙생활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지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게 샘물교회 청년들이 억류된 사건 이후에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합니다. 저는 분명히 그 때도 말씀드린 것처럼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선교 정책이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지혜롭게 탄력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뱀같이 슬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에 ‘방어적 선교’는 없습니다. 선교는 그 자체가 공격적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공격적으로 했습니까, 아니면 방어적으로 했습니까? 선교는 사탄을 죽이고,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일입니다. 악을 죽이고 선을 심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방어적으로 합니까? 기독교가 방어한다고 하는 것은 진리나 교리를 방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이것을 호교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옹호하고 변호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도덕적 결함이 없어야 하고, 선교가 무례하지 말아야 하고, 무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도 선교를 젊잖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무슬림이 이미 30만이 되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절대로 기독교를 전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들은 엄청난 물량공세로 포교하고 있습니다. 모스크가 이곳저곳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3천명의 한국말 잘 하는 무슬림 총각들이 와서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정책적 포교를 하고 있습니다. 영국에는 이미 120만 명이 무슬림입니다. 뉴욕에만 70만 명의 무슬림이 있습니다. 2020년에는 한국을 이슬람 국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합니다. 2080년에는 전 세계를 이슬람 세계로 만들겠다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얼마 후에는 종로거리에 히잡을 쓴 한국 여인을 쉽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방어적 선교로, 적당한 마음 자세로 살 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 도덕적으로 재무장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선 자신의 티와 주름을 없애고, 교회가 사회의 티와 주름을 없애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결 론
서울에 어느 유명한 캬바레가 있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의 패싸움으로 언론에서도 떠들썩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 캬바레의 사장이 잡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청난 재산을 두고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들도 그 엄청난 재산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족들까지도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어느 증권회사의 여직원이 이것을 알고 사장의 돈 2억원을 가로챘다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사장 명의의 은행 금고에서 열쇠 하나가 나왔습니다. 이 열쇠는 분명히 재산의 비밀을 알려줄 중요한 열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열쇠가 어디 열쇠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엄청난 재산을 주인에게 돌려줄 열쇠이지만 아직도 그 열쇠의 비밀을 풀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천국으로 직행하는 곳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천국으로 가는 열쇠로 사용하십니다. 113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교회가 구원하는 영적 능력과 바르게 하는 예언자적 능력을 갖춘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 열쇠를 가진 교회가 되어 우리 교회의 성도와 모든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