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6~7년전의 어버이날에 누나와 함께
영산포에 사시는 큰 누나께서는 나주에 있는 '시립 나주 요양원에 계신다.
설명절이 다가 오니 요양원에 계시는 큰 누나가 생각이 난다.
없는 살림에도 이러한 명절을 다가 오면 제물이다 이거다 저거다 준비하신 다고 하시던
큰 누나 , 이제는 차례 준비도 모든 걸 잊으시고 편안히 요양원에서 주시는 식사나 잘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얼마전에 가 뵈니 휄체어에 타시고 면회장소에 보조하시는 분에 의해 뵈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누나 " 누나가 갖고 있는 돈은 얼마나 되느냐고 ?" 물었더니
양말을 신고 있는 안쪽에서 돈을 내 보인다.
다른 돈은 아들한테 맡기고 꼭 필요한 돈만 양말 안쪽에다 꼬불꼬불 집어 넣고 계신다.
꺼내서 세워보니 70.000원 , 항상 돈이 없다보니 적은 돈도 소중히 하는 큰 누나
작년 까지도 돈 몇 푼을 벌려고 90 이 다 된 연세에 나주장으로 영산포장으로 채소를 조그마한
보자기에 싸가지고 가서 노점에서 팔고 계신 큰 누나
자녀들한테 손을 않 벌리기 위해서란다.
"누나 ! 내가 누나가 가지고 계시는 돈에다 내가 더 보태서 줠께"하면서 차곡차곡 돈을 정리를
해서 다시 양말 안쪽에다 넣어 드렸다.
이제는 시부모, 매형 다 보내시고 자녀들도 다 들 뿔뿔히 서울에서 광주에서 울산에서 떨어져서
다들 살아가고 있다.
지금 올해 90 이시다
정신은 지금도 총총 하시다.
그렇게 어려운 가정에서 시부모,남편,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한 평생 하셨던 큰누나 , 가난이
무슨죄인지? 평생을 가난과 씨름을 하고 지내오신 큰 누나...........
친정 아버지를 그렇게 원망 하셨다가 , 젊었을때 장애자가 된 남편한테 원망도 해 보셨지만
정작 어떤 도움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어쩌다가 나하고 막네 누나가 용돈을 주시고 큰 누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큰 누나 왈
" 어쩌다가 우리 두 동생을 잘 두어서 내가 어머니 대신 호강을 한다고" "내가 복이 많다고" 하시던
큰누나, 나는 큰 누나에게 내 삶의 최선을 다해서 누나에게 대해 주었다.
원망이 많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했을까? 아니면 큰누나의 애틋한 정과 사랑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솟구쳐서 그랬을까? 유일하게 동생이 있어서 친정이 있다고 하는 큰누나의 말씀에 보답을 하는
마음에서 였을까?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내가 대신 가져서 그랬을까...?
의정부에 있을때도 추운 겨울에 2년동안 집에서 같이 나란히 우리집에서 생활을 같이 하면서
겨울철 추위를 함께 보냈다. 우리집은 아파트라 겨울철에 춥지가 않기 때문이다.
어떤때는 누나랑 같이 인근 병원을 모시고 가면 주위사람들이 물어 보는데 "어머니냐고?"
나 나 누나나 우리 동생이고 큰누나 라고 하면, 물어보는 사람왈 " 참 보기가 좋다고, 엄마
같다고"
지나온 과거의 한 편의 일이지만 나도 그때가 행복함을 느꼈다.
가끔 건강이 않 좋으시다 싶으면 닝겔주사를 맞혀드리기도.......................
서울에 올라와서 어머니를 병원에 한번 모시고 가지를 못 한체 저 세상으로 보내게 되는 불효
막심한 자식으로 평생 낙인이 찍혀서 큰 누나한테라도 어머니에게 못한 불효를 만회하기
위해서 ...............
나는 45세의 늦둥이로 태어나서 어머니하고는 23년동안을 같이 살았고, 아내하고는 35년간
지냈으며,큰 누나하고는 나어렷을때 부터 큰누나네 집을 다녔다고 보면 거의 70 여성상을
큰 누나하고 부딪치면서 같이 지내왔고 어머니같은 큰 누나이며, 애기때는 큰누나의 젖도
먹고 자랐다고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전해 주셨다. 나를 낳고 어머니가 아프셨기 때문에
나는 공직에 몸 담은지 중년이 될 때부터 지금까지 큰 누나에게 내 번돈의 일부를 작지만
큰 누나에게 드리곤 하였다.
큰 누나는 어디서 돈이라고는 나오는데가 없으니 그렇게 좋아 하신다.
나는 부모님에게 생전에 돈을 못드리고 자식 대접을 못 받고 돌아가셨기에 가난하고 힘들게
생활하시는 큰누나에게 그 일부를 돌려 주었을까?
그안에도 시골의 허름한 농가 비슷한 옛날 주택에 어떠한 일이라도 일어 날까 봐 항상 전화로
아니면 큰 누나 집에 가서 보살펴 드리곤 하였다.
어느해 설 전후해서 이 살고 계시는 허름한 농가 주택에 전기가 끊겨 버려서 앞집에 가서
주무시고 오셨단다. 아이구 이거 큰일이 났다 싶어 가만히 집에 있으면서 '나주시청 상황실'에
연락을 하여 긴급 상황을 보고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나주시청 상황실에서 한국전력 나주지점에 연락하여 현장을 출장하여 전기선을 연결하여
가설을 하여 집안의 난방을 해결한 적이 있었다.
큰 누나는 혼자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고추가루며,참께, 김치 ,참기름등등을 틈틈히 주셨던
큰 누나!
나의 반찬을 만들수 있도록 지도를 해준 요리 사부님!
거의 모든 반찬만드는 방법을 큰누나에게 배웠던 것이 제일 많다. 홀로 일어서서 살아갈수
있도록 힘을 키워주신 선생님
나는 아들이라고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의 공부까지 주경야독으로 공직을 정년까지, 교사까지
마쳤으니 연금이 있어서
이 추운겨울이라도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느나 같은 남매간인 큰 누나는 항상 고생을 하니
이 동생 마음이 항상 아프다.
남아선호사상에 의해 부모님의 교육도 뒤전으로 밀린체 가난을 대물림하여 막네둥이 아들인
이사람은 교육을 어렵지만 시키어서 그런데로 자기앞가름을 하여 살고 있지만 , 그 고마움을
힘의 일부를 큰누나에게 되돌려 주었는지? 생각을 해보지 않을수 없다.
사실 올 겨울이 제일 마음 편하게 보내는 나의 겨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 따뜻한 시설이
좋은 시립요양원에 계시기 때문에 잊어버릴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한 많은 삶의 애환을 무등산에서 발원하고 흥룡강과 지석천이 합류하여 극락강과 더불어
흘러가는 영산강 삼백 오십리에 흘러 보내시면서 삶을 살아오신 큰 누나 ..............
그의 한숨 소리는 서해안으로 흐르고 흘러 너른 바다로 흘러 가고 있을 것이다.
한가정의 경제적으로 이끌고 가는것은 가장(家 長)의 역활인 것 인거늘...................
가난의 대물림과 일찍이 장애가 되어버린 남편,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남편 ,어떤것에 의지를
하여야 할까?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은 누나의 한(恨) 알고 있을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부터 짓눌린 삶, 남편은 일본으로 징용을 가셨고, 평생 "아버지는 나에게
공부도 않 가르쳐 주셨다고 원망하셨던 큰 누나" 오죽 살기가 힘들었으면 " 아버지는 나를 이런
집안에다 시집을 보냈다고 원망을" 그래도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대로 재가(再家)도 가지를
않으시고 꿋꿋하게 한가정을 지켜오신 지조있는 집안의 후손으로 다 하신분
시부모 , 많은 형제들의 여우살이도 다 해드리고 6남매의 어머니의 역할을 다 해 나가 실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셨던 큰 누나,
평생 돈 한번 벌어다 주지 못 하신 큰 매형의 뒷 바라지를 하신 큰 누나 ,큰 누나가 그 많은 식솔들의
식사를 해결하신 큰누나 ..............
이제는 설명절의 차례준비도 잊으신체 , 누구를 원망도 잊은체 , 평상시 거처하시던 허름한 큰누나의
평생의 안식처는 주인을 잃고 휑하니 이추운 겨울 바람이 지나칠 것이고, 세월의 흐름은 어쩔수가
없으나 유난히 큰 누나를 사랑하고 애끼고 형제간의 우애를 가져 왔던 이 동생의 마음은 어디다
가눌수 없는 설명절이 임박하니 더욱 더 허전함을 느낀다.
※ 이 글은 지난 겨을철 설명절이 다가 오는 시점에 큰 누나가 요양원에 계셔서 불현듯
그리워서 큰누나의 삶을 한번 뒤돌아 보는 심정으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첫댓글 큰누나에 대한 글을 여러차례 접한적이
있습ㄴ다. 어머니같은 큰 누나 90년세에
얼마나 살겠습니까? 진짜로 어머니처럼
생각 해주셔야 겠네요.
누구보다 충효사상 에 밝은 만장봉님
행복을 빕니다.
낭주님! 감사합니다
어머니같은 누나입니다 부족한 삶에 격려를 해주시니 .........
너무나 농촌에서 어려운삶을 살으시니 동생이라도 미력하나마 마음을 갖지않는다면
살아가는 맛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른누나들은 다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는데, 유독 큰누나가 힘들게 지내시니 항상 마음이 걸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만장봉님,엄마같으신
누님과의 정이 애틋하십니다.
저는 영산포 홍어골목에서
엄마랑 홍어정식도 먹어보고
근처 구진포에서 장어도
먹어봤답니다.
글을 읽으며 저는 막내
남동생에게 무얼 얼마나
잘했는지 뒤돌아봅니다.
만장봉님,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오월 되십시요.
영산포의 홍어의거리 젓갈냄새가 물신나는 영산포의 포구가 그립습니다
옛날에는 목포에서 수많은 배들이 들랑날랑 하였건만 이제는 외로운 등대만이 옛 모습을 말없이 지키고 있을뿐이며
구진포의 포구에는 장어의 별미도 이제는 자연산이 아닌 장어집들이 있지만 ............
나는 영산강변의 '영모정'의 아름다운 정자와 500여년된 노홰나무들의 말없이 지키고 서 있으며 옛선현들의 시구(詩 句)들이 들리는듯
저도 이글을 정리하면서 어떤 나의 자랑이라고 이글을 쓴것이 아니고 나의 삶이 어떻게 살아아야 할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남은 나의 삶을 조명도 해보는 마음도 갖는답니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
나를 뒤돌아보게하는..
좋은글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소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글을 쓰면서 진솔한 나의 삶의 이야기를 정리하여보았으며, 만용이나 자랑은 하나도 없으며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것인가? 또한 지나온 삶을 반추해보면서 이글을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같은 누이
참으로 모진삶을 사신것을
많이 사랑해주시고 보살펴 드리세요
가슴이 찡 하네요
감사합니다
한많은 누나의 삶이 너무 애잔해서 ...........
글로나마 그마음을 전해보고져 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나를 낳아주시고 기르시고 학교를 보내주셨지만
그세월은 24살정도입니다. 같이 살아온세월이며 아내하고는 35년
큰누나는 거의 60년이상을 이승에서 호흡을 같이 하면서 세월을 보내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지적 성숙님' 감사합니다
일제강점기때 어려운 한국의 농촌의 아낙네의 어려운 삶, 큰매형은 일본징용 갔다오시고
40도 채안되어 장애인이 되시고 , 한글도 못배운 세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작자로 전락을하고 인권과 재물의 수탈의 혹독하게 살아온 우리들의 선대 세대가 되지요
그 가운데 큰누나가 한가운데 계시니, 일제 잔제의 한 부분으로 봐도 과히 틀리지는 않을것 입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찡합니다 저도 큰언니가 때론 엄마 같다는
생각을 많이하고 살아갑니다
건안하시고 행복하세요^^
일제 강점기때는 거의 우리날의 농촌이 그러한 형편입니다.
그 가운데 저의 누나가 계신것입니다
그런데 더욱더 큰매형이 40도 채못되어서 장애인이 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신이 총총하시니
참 다행입니다.
누님을 챙겨주시니
제 마음까지 좋아요.
두 분 오래 건강하시길요.^^
머리가 굉장히 좋으십니다
식사만 제대로 하시면 더 오래 사실것입니다
큰누나가 불쌍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진것 뿐이니다
결코 자랑은 결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