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한강 등 주요하천에서 위해성 의약품 성분이 다량 검출된 것으로 드러나 약국이나 가정에서 버려지는 의약품이 새로운 환경오염 물질로 떠오르고 있다.
제약사가 약 재고품을 회수하는 선진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의약품 처리에 대한 규정조차 마련돼 있지 않아 수백억원 어치의 약품이 약국에 사장돼 있거나 버려지고 있다.
이에 연합뉴스 기획취재팀은 폐기 의약품의 유해성을 지적하고 효과적인 약품 회수 및 처리 시스템의 필요성을 제안하기 위해 약이 버려지는 실태와 향후 과제를 3회에 걸쳐 점검한다.
최근 3년새 약국서 200억어치 버려져 가정 폐기물량 집계도 안돼..규정 미비 (서울=연합뉴스)
기획취재팀 = 에이실린, 벤자실린(이상 항생제), 뉴론틴(진통제), 미카르디스, 코디오반(이상 고혈압치료제), 리나치올시럽(진해거담제), 파마소브현탁액(지사제)...
서울 강남구에서 4년째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A약사(33.여)가 최근 더 이상 판매할 수 없어 `내다버린' 약은 50종이 넘는다.
시럽 등 물약은 세면대나 싱크대에 쏟아 붓고 알약은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린다고 한다. 가끔 화장실 변기에 몽땅 털어 넣어 물을 내리기도 한다고 A약사는 말했다.
주부 김모(30.여.경기 고양시 일산구)씨도 올해 들어 딸(4)이 먹다 남긴 감기약 봉투 9개를 처리했다. 물약, 가루약, 알약 등을 한데 모은 뒤 변기에 넣어 `손쉽게' 흘려 보냈다.
이렇게 함부로 버려진 의약품이 인체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환경오염 물질로 급부상하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발생한 폐의약품은 200억원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한약사회가 지난해 9월 전국 6천647개 약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개 약국에서 평균 272만원 어치씩, 전국적으로는 516억원 어치(전체 약국 1만9천개로 환산)의 약이 사장(死藏)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약사회는 이에 앞서 2001년 9월 약국당 286만원 어치씩, 전국적으로는 514억원 어치의 약이 사장된 것으로 확인되자 제약회사와의 협상 끝에 197억원 어치의 의약품을 각 제약사에 반품하기도 했다.
하영환 대한약사회 상근이사는 "부도난 제약회사가 생산한 약이나 제약사가 아니라 도매상을 통해 구입한 약 등은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현시점에서 실제로 팔지 못해 약국에서 버려지는 약의 규모는 1천억원대를 상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약사회에 따르면 제주도내 200여개 약국이 올해 7월말 현재 유효기간이 지나거나 의사의 처방이 나오지 않아 버려야 하는 약은 4천76개 품목에 달했다.
이는 건강보험급여에 포함되는 의약품 2만564개 품목(2005년 2월 현재)의 19.8%에 해당하는 규모다.
약국에서 버려지는 의약품의 71.6%(2천920개 품목)는 의사의 처방 없이는 약사가 자유롭게 팔 수 없는 전문의약품인 것으로 드러났다.
수자원 오염의 또 다른 경로인 각 가정의 싱크대를 통해 버려지는 의약품의 규모는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독일에서는 팔린 약의 30%(2003년), 오스트리아에서는 25%(1999년)가 가정에서 버려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약국에서 약이 버려지는데는 `의사-약사간 의사소통 단절'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의약분업이 실시되면서 약사는 의사의 처방전에 의해서만 전문의약품을 팔 수 있게 됐으나, 의사들이 처방의약품 목록을 공개하지 않고 있어 약사로서는 어떤 약이 처방될 지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비록 소규모 약국이라도 이런 이유에서 의사들이 처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약을 구비해야 한다.
현행 약사법 22조2항은 의사들이 처방하려는 의약품의 목록을 해당 시.군.구 의사회분회에 제출토록 규정하고 있으나 아무런 구속력이 없어 유명무실하다.
좌석훈 제주 약사회 부회장은 "의사들이 처방의약품 목록만 제출하더라도 버려지는 약의 규모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약국마다 엄청난 양의 약을 구비할 수 밖에 없으며, 그 규모는 앞으로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의사들이 처방 약품을 자주 바꾸는 것도 약 낭비의 주요 요인이다.
한국의약품법규학회가 2003년 매분기 297개 약국요양기관에서 접수한 처방전 200만장을 분석한 결과, 의사의 처방 약품은 직전 분기에 비해 59.5%가 변경된 것으로 나타났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1개 약국은 의사의 처방에 따라 월 평균 345.6개 품목의 처방약을 판매했으나 이 가운데 101.3개 품목이 다음 분기에는 전혀 판매되지 않았으며, 대신 105개 품목은 새로 판매되고 있었다.
다시말해 지금 잘 팔리는 많은 약들도 3개월이 지나면 더이상 처방전이 발급되지 않아 `수명'(사용기한)을 다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대한약사회는 전문의약품이 사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약사에 반품을 받아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제약사들은 겉포장을 뜯었거나 판매하다 남은 의약품을 반품받기 곤란하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대형 제약사는 약품을 공급할 때 `반품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까지 약국에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의약품 낭비 및 폐기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생산자가 남은 약을 회수해가는 `테이크 백 프로그램' 등 약 관리 시스템의 일대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설효찬 식품의약품안전청 사무관은 "막대한 비용 때문에 제약회사들이 남은 약을 반품받거나 수거하기를 꺼리고 있다"면서 "약 낭비를 막는 차원에서 제약회사에 가급적 소형 포장으로 약품을 만들어 공급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