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by 라이미
#0. Prologue 비가 내린다. 촉촉한 가을비가 말라붙은 대지에 스며들며 온 세상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언제나 아련한 향수와도 같이 그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아직도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을 정의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연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만용과도 같은 우월적 자만심이었을지도. 혹은,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것은 내 생에 최초로 느꼈던 사랑이라는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1. 비가 온다. 나는 비가 오는 것을 싫어한다.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하늘에서 쓸데 없는 물방울이 자꾸 떨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나무는, 아니, 어쩌면 꽃도 비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춥기 때문이다. 나는 치마를 내려다 보았다. 이미 젖을 대로 젖어버린 치마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다리는 파랗게 얼어 있었다. 나는 물을 머금어 축축해진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올리며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입술을 한 번 꼭 깨물고는 벤치 옆에 있는 풀들을 바라보았다. 풀들도 비를 맞아 추운지 몸을 떨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안타까웠다. 나는 비오는 것도 정말 싫고 추운 것도 정말 싫지만, 그래도 계속 앉아 있는 수 밖에 없다. 그가 항상 이 길로 지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들어 미친 듯이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는 하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하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얼굴로 따가운 빗줄기를 쏟아 부었다.
민준은 낭패스러운 얼굴로 빗줄기를 쏟아 붓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새로 산지 얼마되지 않은 서류가방과 주름하나 잡히지 않은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양복과 눈이 부실정도로 번쩍번쩍 광을 낸 자신의 구두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그의 단정한 얼굴 가득 당혹감이 피어 올랐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만 해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기 때문에 방심했던 것이 실수 였다. 민준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오늘 오후 중부지방에 대류성 강우가 쏟아질 것이라던 뉴스 리포터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민준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 지하철 역에서부터 집까지 아무리 빨리 뛰어도 15분. 흠뻑 젖어 버릴게 분명했다. 그가 한 숨을 한 번 푹 내쉬고 서류가방을 머리위로 들어올린 뒤, 막 뛰어갈 채비를 갖추었을 때였다. 그의 눈에 지하철 역 근처 벤치에 앉아 이상한 눈초리로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한 여자가 들어왔다. 세차게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그녀의 머리에서부터 턱으로 흘러내려 목을 타고 이미 흠뻑 젖은 옷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옷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그녀의 앙증맞은 발 근처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 웅덩이에도 빗방울들이 작은 동심원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찬찬히 관찰하고 있던 그의 눈이 문득 그녀의 옆에 얌전히 접혀져 벤치에 기대어져 있는 한 노란색 우산에 가 머물렀다. 민준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민준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기……, 저기요." “……." “저기요." “……." “저기요!!" 민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자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르다니. 민준 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나는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순간 민준은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여자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얼굴. 그러나 그녀의 눈은 달랐다. 민준은 그녀의 눈에서 느껴지는 깊이 감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세상의 끝을 담고 있는 듯한 무한한 깊이의 허무감. 고독. 허탈감. 공허. 그러면서도 그런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더 거대한 감정의 흐름이 있었다. 민준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언젠가 그와 비슷한 것을 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더 이상은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순간, 그는 그가 그 여자를 왜 불렀었는지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오늘은 비가 온다. 나는 비가 오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마땅찮은 눈길로 비가 쏟아지고 있는 바깥을 쳐다보았다. 비는 모든 것을 축축하게 만든다. 벽도, 집도, 가구도, 공기도, 분위기도. 그리고 밥까지! 나는 바깥을 보던 얼굴을 돌려 앞에 놓여있는 밥그릇을 바라보았다. 눅눅해진 밥이 밥그릇 안에 아무렇게나 담겨져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조금 긁적였다. 집에 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장을 보러 나갈 때가 된 것 같다. 거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동욱이 또 시끄러운 소리와 빛이 나는 이상한 상자를 켜 놓은 모양이다. 그런데 항상 저렇게 소리를 크게 해야만 할까? 난 잘 모르겠다. 나는 방문을 빼꼼이 열고 거실을 내다 보았다. 동욱은 그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상자를 뒤에 놓고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동욱도 그 시끄러운 소리를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켜놓고 있는 건지. 언젠가 서부터 동욱은 비 오는 날마다 저렇게 시끄러운 상자를 켜 놓고 벽을 보고 앉아 있는다. 예전에는 명랑하게 나하고도 잘 놀아 주었는데. 언제서부터 였냐면…… 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주 옛날은 아니었는데. 요즘 가끔가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이 잘 생각이 나지 않곤 한다. 별로 나이를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기억이 퇴화하나 보다. 나는 거실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동욱은 미동도 하지 않고 벽을, 아니, 바닥을 혹은 그 중간의 허공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몰래 다가가서 동욱을 놀래 켜 줄 심산이었지만, 그런 동욱의 맥 빠진 모습을 보곤 곧 포기를 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살며시 동욱의 발치로 다가가 그를 부드럽게 밀었다. 그러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계속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문득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그것이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진 좀 시간이 걸렸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 했으나 곧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좀 더 세게 동욱을 밀었다. 동욱이 서서히 고개를 내게 돌렸다. 잠시 동안 그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한 멍한 표정이었지만, 곧 눈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밥이 떨어졌구나. 벌써 그렇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 동욱이 쿡, 하고 낮게 웃었다. “네가 비를 싫어한다는 건 알지만, 혼자 집에 있는 건 더 싫겠지. 같이 나가자."
민준은 그녀에게서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 묘한 분위기에 압도된 그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해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때, 길 저쪽에서 왠 남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왔다. 후줄근한 남방에 평범한 면 바지를 입은 그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찌른 채 우산도 들지 않고 마구 퍼붓고 있는 비 속을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민준은 처음에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던 민준은,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홱 돌리자 심장이 떨어져 내릴 만큼 놀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민준은 방금 전에 그가 놀랐었는지도 잊어버릴 만큼 놀라버렸다. 그녀의 눈에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의 기류가 소용돌이 치던 순식간에 빛이 돌아오며 생기가 어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민준은 의아해서 그녀가 보고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를 발견했다. 민준은 그와 같은 평범한 사나이의 어디가 이 무심한 여자를 벌떡 일어서게 까지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혹시 그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저 조그만 갈색 고양이 때문일까? 그러나 그녀는 고양이 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는 우산을 들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서 우산을 펴고는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는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기에 그 뒤를 따라가는 그녀는 비를 고스란히 다 맞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리고 그도 물론, 개의치 않았다. 민준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비 속을 걸어가는 한 남자와, 그 남자의 뒤를 따라가는 한 여자와, 그 모든 것들을 무심히 지나쳐가는 한 고양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2. 민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커피가 너무 썼다. 민준은 씁쓸한 표정으로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자주 다니던 단골 커피가게가 문을 닫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갑자기 발령 받은 지방 출장을 막 마치고 돌아온 민준은 매우 피로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주 가던 단골가게에서 커피나 한 잔 마시고 들어갈 생각이었던 그는, 단골가게의 닫힌 문 앞에서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민준은 프림을 잔뜩 집어넣고는 스푼으로 커피를 휘저었다. 며칠 전의 만남이 계속해서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에도 그 기억이 머리 속을 맴돌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을 지경이었다. 스푼을 내려놓고 커피 잔을 입술에 가져가던 민준은 그만 입에 있던 커피를 몽땅 뿜어버리고 말았다. 커피가게의 유리너머로보이는 맞은 편 길가의 꽃집에 그녀가 있었다. 그 때와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 여전히 어딘가 공허하지만 뭐라고 한 단어로 딱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흐름을 품고 있는 눈동자는, 꽃집 바깥에 진열되어 있는 꽃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민준은 계산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커피가게에서 허둥지둥 뛰쳐 나왔다. 이번에는 그냥 보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무턱대고 그녀 곁으로 다가간 민준은 자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꽃만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이봐요." “……." “저, 우리 한 번 만난 적 있죠?" “……." “아, 저……." “……." "저기, 말 할 줄 몰라요?" “할 줄 알아." “아, 예……. 예?" 민준은 갑작스레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놀라 그만 얼빠진 물음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꽃들만을 살펴볼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의 말에 대답을 해 주었다는 것에 용기를 얻은 민준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그럼 이름이 뭐에요?" “신소영." “실례지만…… 저, 나이는……" “27." “어, 혼자 사세요?" “응." “음, 꽃을 좋아하시나봐요?" “응." “아, 예……." 민준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영의 단답형 대답에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가 힘들어짐을 느꼈다. 민준은 그를 무시하고 계속 꽃들만을 쳐다보는 소영이가 당혹스러웠다. 뭐라 더 말할 것이 없나 싶어 머뭇거리던 민준에게 소영이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넌 너무 시끄러워." “예?" “너무 시끄럽다고. 너 때문에 꽃이 말하는 게 잘 들리지 않잖아." 민준은 할 말을 잃었다. 순간 그는 '저 때문에 꽃이 말하는 게 들리시지 않다니, 이런, 죄송합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 건가 고민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야 그는 소영이 말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임을 간신히 깨달았다. “저……, 꽃이 말을 한다 구요?" “응." “어, 꽃은 말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어. 내가 말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준은 약간 바보 같은 기분을 느끼며 질문 했다. “꽃이 뭐라고 하는데요?" “슬퍼하고 있어." “슬퍼한다 구요?" “이봐, 너 같으면 허리가 잘린 채 이런 냄새 나는 곳에 몇 시간씩이나있게 된다면 슬퍼하지 않겠어? 꽃들은 무섭고, 외롭고, 춥고, 슬픈 거야." 민준은 그녀가 그토록 이나 긴 문장을 말했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슬픈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가 마치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잔뜩 물기를 품었다. 그는 얼른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당신이 꽃들과 얘기를 나누지 않습니까. 무섭긴 해도 외롭진 않을 거에요."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처음으로 그녀의 눈이 정면으로 민준을 향했다. 민준은 그 눈동자에 담겨있는 아릿한 슬픔과 약간은 다급한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민준은 거의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로 대답했다. “그럼요. 봐요. 꽃들이 고마워하고 있잖아요."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음, 그래. 맞아. 고마워하고 있어." 민준은 마치 소녀처럼 웃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며 무의식적으로 말을 꺼냈다. “저, 우리, 친구하지 않을래요?" “친구?" 소영의 눈동자가 커졌다. “예, 친구. 당신과 꽃들처럼, 저와 당신도 아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에요." 소영의 눈에 망설이는 빛이 감돌았다. 그녀의 작은 손이 노란색 달리아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좋아. 친구하자." 민준은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소영은 단지 지금 우연히 두 번째로 만났을 뿐이었고, 꽃이 말을 한다고 주장하는 조금은 이상한 여자였다. 하지만 민준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은가!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꽃들도 말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그게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 민준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모를 아련한 감정을 담고 자신을 올려다보았던 물기를 가득 품은 커다란 눈망울이었다.
#3. 동욱의 하루는 언제나 규칙적이다. 해 뜰 때쯤 일어나 나에게 밥을 주곤 앉아서 아파트 베란다를 통해 보이는 바깥의 풍경을 바라본다. 그렇게 한 참을 앉아 있다가 내가 동욱에게 다가가 치근덕 거리면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밥을 한 번 더 준다. 그리고 동욱도 아침을 먹는다. 그 후엔 거실에 가만히 누워 있는다. 어쩔 때는(특히 비오는 날엔) 이상한 소리가 나는 그 상자를 틀어 놓기도 한다. 밥이 떨어지면 장을 보러 가고, 그렇지 않은 날엔 태양이 슬슬 서쪽으로 치우칠 때까지 계속 그렇게 누워있거나 앉아 있는다. 그리고 내가 또다시 칭얼거리면 밥을 주고 동욱은 세탁기를 돌린다. 동욱은 청소라곤 하는 법이 없지만 빨래는 항상 한다. 그리고 동욱도 밥을 한 술 먹은 뒤에 낮잠을 잔다. 나는 주로 그 시간을 다른 고양이들과의 사교활동에 쓰곤 한다. 그리고 해가 질 때쯤 되면 나에게 다시 밥을 주고 해가 짐과 동시에 동욱을 잠자리에 들곤 한다. 지금, 동욱은 아침을 먹고 나서 앉아있었다. 사실, 동욱은 거의 언제나 누워있지 않으면 앉아 있곤 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나는 동욱의 발치에 게으르게 누워서 가끔씩 동욱을 올려 다 보았다. 나는 심심했다. 하지만 동욱은 나와 놀아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나는 그게 가장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나와 잘 놀아주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곤, 동욱은 정말 좋은 주인이었다. 밥도 제 때에 챙겨주고, 가끔 늦게 들어와도 뭐라 잔소리하지도 않고, 어디에 가든 항상 나와 같이 다닌다. 그리고 나를 귀찮게 하는 인간들도 만나지 않는다. 나는 마지막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 종종 동욱을 쫓아다니는 좀 이상한 여자가 한 명 있기는 하다. 정말 웃기는 여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동욱은 그 여자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다. 물론 나도 신경 쓰지 않는다. 정말 인간들은 가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곤 한다. 나는 앞발을 핥고는 하품을 했다. 놀 거리가 없으니 무척 심심하다. 골목에라도 나가 볼까. 동욱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몰래 숨어 사는 도둑 고양이 녀석이 괜찮은 생선이라도 하나 구했을지 모른다. 나는 몸을 빙글 뒤집어 배를 위로 향하고 누웠다가 동욱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똑바로 몸을 뒤집었다. 쳇, 무시하는 군. 동욱은 밥 먹을 때만 나를 신경 쓴다. 그 외는 아주 가끔씩만 나에게 아는 체를 할 뿐이다. 나는 이따금 동욱이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곤 한다. 동욱도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예전에는 그 여자랑 같이 나와 자주 놀아주기도…… 잠깐! 그 여자라니? 그 여자가 누구지? 나는 멍한 눈으로 동욱을 응시했다. 그 여자…… 그래, 맞아. 그 여자가 있었어. 이름은 기억 나지 않지만, 분명 어떤 여자가 있었다. 나는 신중하게 턱을 들어 앞발 위에 올려놓고는 꼬리를 휘젓기 시작했다. 그래, 맞다. 어떤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는 나를 동물가게에서 사다가 동욱에게 선물했었다. 어떻게 이걸 잊을 수가 있지? 그런대로 예쁘장하게 생겼던 여자였다. 그 여자가 있었을 때 동욱은 행복해 보였었다. 자주 웃었고, 나랑도 자주 놀아 줬었다. 그리고 동욱의 주변에는 나를 귀찮게 하는 인간들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요즘에는 그 여자가 오지 않는 걸까? 나는 수염을 곤두세우고는 코를 찡긋거렸다. 재채기가 나올 듯 말 듯 하며 나를 괴롭히는 것 같다. 그 여자에 대한 기억도 그렇다. 생각이 날 것 같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슨뀉 싸움이 있었던 것 같은데뀉. 지금생각나는 것은 아스라한 여자의 잔상과 동욱의 높은 고함 소리 같은 것 뿐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은 정말 약한 동물인 것 같다. 어쩌면 동욱은 그 여자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여자도뀉. 하지만 어떤 이유로 둘이 싸우고 난 뒤에 여자는 더 이상 동욱은 만나지 않게 되었고, 동욱은 이렇게 혼자서 살게 된 것이다. 다른 인간들도 만나지 않으면서. 쳇, 재미없군.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번 했다. 우리 고양이들은 저렇지 않은데.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암컷인데 도대체 동욱은 왜 그 여자에게 집착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동욱을 쫓아다니는 그 이상한 여자 쪽이 더 낫지 않을까. 괜찮은 암컷이었는데. 나는 입맛을 다시며 새삼스럽게 다시 동욱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아까 와 똑같이 앉아있었다. 나는 문득 동욱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 없는 곳에 집착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는 단지 여린 심성의 소유자 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리 좋은 덕목이라고 말해주기는 힘들었지만, 현대는 어차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이니까. 나는 동욱에게 다가가 그의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동욱이의 눈동자가 조금 나에게 향하는 것이 보인다. “냐아아옹-" 동욱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어렸다. 그의 손이 천천히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런 동욱을 쳐다보며 나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냐아옹- 냐아아옹-" 동욱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4. 나는 우산을 든채 길거리에 서 있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는 우산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비를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상한 천 같은 것을 머리 위로 둘러 일부러 비를 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비한테 너무 미안해지니까. 나는 비록 비를 좋아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하늘에서 쏟아져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은 비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대충 생각을 접으며 나의 앞에 펼쳐진 길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무심하게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그 과정에서 물방울도 조금 튀기며) 지나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사람보다도 더 무심한 차들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굉음을 내며 지나간 트럭이 한 가득 물을 튀겨 나의 푸른색 치마를 적셨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그 모든 것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사방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아직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 한 것 같다. 나는 약간의 망설임을 느끼며 다시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있는 도로를 바라보았다. 도로의 중앙, 노란색 선이 있는 근처에, 아스팔트의 깨진 틈을 비집고 민들레 한 송이가 힘겹게 피어나 있었다.
민준은 왼쪽 턱과 어깨로 우산을 힘겹게 받친 뒤, 지갑을 열어 동전을 꺼냈다. 버스 정류장 근처의 신문 가판대에서 새로 나온 신문을 사고 있는 것이다. 버스 한 대가 물을 튀기며 달려와서는 승객들을 한 아름 토해놓고는 다시 달려간다. 민준은 우르르 몰려나온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게 조심하며 새로 산 신문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 때, 민준은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다들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서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저 여자 왜 저래?" “미쳤나 봐. 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어떻게 좀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저대로 놔두면……" “뭐야, 저 여자 자살하려는 거야?" 마지막 말에 민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살이라고? 누군가가 또다시 자살을 하려 든단 말이야? 정신없이 두리번 거리는 그의 눈에 하얀색 블라우스와 푸른색 치마를 입은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한 가운데에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노란색 우산 아래로 언 듯,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민준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소영씨! 소영씨!" 민준은 정신없이 소영의 이름을 외쳐대며 무작정 도로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의 놀란 외침소리가 커졌다. 달려오던 차들이 급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운전자들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한 소란의 한 가운데서 민준은 아무것에도신경 쓰지 않고 오직 소영을 향해서 달려갔다. “소영씨!" 거리가 지척일 만큼 가까워 지자 민준은 다시 한 번 소영의 이름을 불렀다. 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민준에게로 돌렸다. 민준은 소영이 그의 부름에 반응을 보이자마자 다짜고짜 소영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지금 뭐하고 계시는 거에요, 소영씨! 이렇게 위험한 데서. 어서 이리로 와요." 소영은 조금 머뭇거리는 것 같았으나 민준은 아랑곳하지않고 소영을 끌고 얼른 도로를 벗어났다. 민준의 마음 속에는 빨리 소영을 말려서 이 자리를 빠져나가게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민준에게 끌려가면서도 소영의 눈은 아스팔트 위의 한 곳을 계속 응시했다.
나는 그 꽃이 안타까웠다. 하필이면 이 많은 땅들 가운데 그런 축복 받지 못한 척박한 땅에 떨어져 가끔 내리는 폭우에 혹시나 떠내려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다가 마침내 피어야 할 시기가 훨씬 지난 다음에야 겨우 꽃을 피워낸 민들레가 안쓰러웠다. 피어난 뒤에도 험하게 달리는 자동차들의 바퀴에 짓눌리지나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조그만 바람에도 몸을 떨어야 하는 꽃이 불쌍했다. 어쩌면 그 민들레는 나와 닮은 꼴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이미 그 꽃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자동차들이 마구 달려대는 그런 신호등도 없는 도로에 뛰어드는 것은 미친 짓 임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꽃을 보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조심조심 길을 건넜고, 치마가 몽땅 젖어버리긴 했지만 마침내 그 꽃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 꽃은 더욱 안쓰러웠다. 거센 빗방울에 몸을 내맡긴 채 떨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나는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꽃 위로 우산을 씌워주었다. 내가 그 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 뿐이었다.
민준은 소영을 데리고 정신없이 걸었다. 그저 빨리 그 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민준은 비가 그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민준에게 손을 내맡긴 채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소영이가 민준의 손을 뿌리치고 제자리에 멈춰 섰을 때야 비로소 민준은 그들이 사람이 별로 지나다니지 않는 어느 한적한 골목길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소영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민준이 잠시 뒤로 주춤 물러나는 사이 소영은 그를 지나쳐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멍하게 그런 소영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민준은 소영이 저 만큼 앞서나가자 얼른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계속 골목으로 들어가던 소영은 어느 낡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민준은 당황했지만, 소영이 자신 있게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도 쭈뼛쭈뼛 소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소영은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끝에는 문이 달려 있었다. 소영이 약간 녹이 슬어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자 곳곳에 널려 있는 물웅덩이 위로 햇살이 쏟아지는 옥상이 나타났다. 소영은 아무 말 없이 옥상으로 나아갔다.옥상의 난간 근처 바닥에 아무렇게나털썩 주저 앉은 소영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민준은 당혹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소영의 옆 자리에 마찬가지로 털썩 주저 앉으려다 바닥에 고여있는 물을 보고는 기겁하여 다시 일어났다. 잠시 머뭇거리던 민준은 아까 샀던 신문을 잘 펴 놓은 뒤, 그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소영은 민준의 그 모든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구름이 겉이고 있는 하늘을 올려 다 볼 뿐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민준이 입을 열었다. “이곳을 알고 계셨나 봐요, 소영씨." 소영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진다. 소영이의 작은 입술이 열렸다. “이곳에서 보는 하늘이 가장 아름다워. 비가 그친 뒤나 저녁 무렵에 종종 이곳에 와." 민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고, 소영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건물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으나, 주변에 시야를 방해하는 높은 건물이 없었기에, 민준은 별 무리 없이 황혼이 내려 않고 있는 도시의 모습과 빛을 받아 붉게 타오르는 듯한 구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지런한 별들 중 몇몇은 벌써 하늘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침묵으로 긍정을 표시하던 민준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아깐…… 왜 그러셨어요?" 소영의 무심한 눈길이 그를 향한다. 민준은 입술을 한 번 축인 뒤, 거의 애원하는 눈길로 소영을 바라보았다. “그러…… 그러시면 안돼요. 왜…… 그렇게 위험한 곳에……. 설마……" 민준이 애타는 눈길로 소영을 바라본다. “자살…… 하려던 건, 아니었……죠?" 소영은 아무 말 없이 민준의 눈을 쳐다볼 뿐이다.
결국은 아무도 나를, 그리고 그 꽃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 그래도 저 사람은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저 사람은 나와 꽃들의 대화를 이해해주지 않았던가? 아니면, 그것도 그저 거짓말이었을 뿐일까? 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지 마세요." 민준의 목소리가 단호해진다. 민준은 자신이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잘 모른다. 소영이 친구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보기엔, 그의 감정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민준은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단지, 지금 그는, 자살을 하려 하는 소영을 말리고 싶을 뿐이다. “자살이라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짓이에요. 아뀉 죄송해요. 하지만 자살이 멍청한 짓이라는 건 맞아요. 자살은 그저 자신을 포기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죠. 자신의 삶을 그렇게 포기해 버릴 순 없어요. 그래도 어쨌 거나 우리는 살아있잖아요? 살아있는 이상,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계속 살아가야 해요. 그건 생명을 가진 자의 특권이자 권리에요. 그걸, 그걸 그렇게 쉽게 포기해 버리실 건가요?" 소영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앉아서 그 깊고 깊은 심연의 눈동자로 동욱을 바라볼 뿐이었다. 동욱은 애가 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소영이 마치 한 마리의 작은 새처럼 그렇게 날아올라 영원히 자신을 떠나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소영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는 거지?" “예?" “왜 그렇게 다급하게 구는 거지? 왜 그토록 나를 말리는 일에 열심이지? 어째서 자살이라는 것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지?" 민준의 눈에 당황함이 어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자살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요. 저한텐……"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는 한 번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한텐, 자살한 여동생이 하나 있었어요." 소영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단지 동욱에게 향하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좀 더 깊어졌다. 동욱은 약간 얼굴을 찌푸린 채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어요. 모르겠어요. 그 아이가 왜 자살을 했는지.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는지. 아주 행복한 아이였는데. 언제나 밝게 웃던 아이였는데. 하지만 그 아이는 자살을 해 버렸죠. 남게 될 사람에 대해선 신경 쓰지도 않고……"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어쨌든,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저는 자살에 찬성할 수 없었어요. 아무리 기구하고 애달픈 사연이 있더라도,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더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절대로 자살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리 대단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게 자신을 포기하는 이유가 될 순 없으니까요." 민준은 말을 마치고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소영을 바라보았다. 소영은 아까 와 거의 변하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민준은 약간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 소영이의 입이 열렸다. “넌 아무것도 몰라." “예?" “네가 말하는 건 승자의 논리일 뿐이야. 넌 패자를 알지 못해. 그들의 감정과 입장을, 넌 절대 이해하지 못해." 민준은 약간 입을 벌린 채로 소영을 바라보았다. 소영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민준은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흐르고 있는 강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볼 수 있었다. 민준은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마치 빨려 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민준은 자신을 엄습하는 불안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5.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잠시 기다리다가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아파트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역시 응답은 없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문에 한 쪽 귀를 살며시 갖다 대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발로 계단을 비벼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겨보기도 하고 엘리베이터 앞의 조그만 공간을 시계 방향으로 10번, 시계 반대 방향으로 10번을 돌아본 뒤,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냥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문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빼꼼히 열어 젖혔다.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나는 어두 침침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발을 안으로 내밀었다. “냐아아옹!" 나는 깜짝 놀라 거의 뒤로 넘어질 뻔 했다. 나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그만 갈색 고양이 하나가 노란색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나는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저리가. 이 나쁜 고양이. 너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 고양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나는 고양이를 흘겨 보았지만 무심하게 꼬리를 흔들거릴 뿐이다. 그가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유일하게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부분이다. 고양이는 꽃이나 풀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는 법도 모른다. 따라서 나는 고양이가 싫다. 내가 놀랬던 건, 그가 어디를 가나 항상 그의 고양이를 데리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집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양이를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생명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양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동욱을 쫓아다니던그 이상한 여자다. 나는 무슨 도둑처럼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여자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었지만, 그 여자는 내 경고를 알아차린 건지 못 한 건지, 그저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볼 뿐이다. 가뜩이나 오늘 동욱이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어딘 가로 가버려서 속상해 죽겠는데. 일년에 한 번, 동욱은 이렇게 나를 혼자 두고 어디를 다녀오곤 한다. 나는 그때 마다 풀이 죽어 이렇게 혼자 죽치고 누워 있는다. 이상하게도 동욱이 혼자서 어디로 가곤 하는 이 날이 오면 나는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다. 아주 심하게 깨질 듯이 아팠다가 좀 나아졌다가 다시 아픈 것을 반복한다. 특히 비라도 오는 날이면 두통은 더더욱 심해진다. 그래서 나는 이 날이 제일 싫다.
“동욱은 어디 갔지?" “냐옹-" “왜 너를 혼자 두고 간 거야?" “냐아옹-" “대답하기 싫은 건 알지만 그래도 좀 말해줬으면 좋겠어. 난 동욱을 만나러 왔다고." “냐아아옹-" “왜 왔냐고? 음, 예전부터 한 번은 꼭 와보고 싶었거든. 오늘 다른 약속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럼 그냥 여기서 기다릴까?" “냐아아아옹-" “알았어. 환영한다고. 고마워." 나는 흰소리를 아무렇게나 주워 섬기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고양이는 약간 경계하는 듯 했으나 그렇게 위협적인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내가 하는 양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달랑 텔레비전 하나 있는 거실을 둘러본 뒤,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든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잘 모르겠다.
그 방은 고양이의 방인 듯 했다. 고양이 밥그릇과 고양이 사료가 가득 있었다. 나는 며칠 전에 그가 장을 보러 나왔음을 기억해냈다. 고양이 침대와 장난감들까지 있었다. 나는 그가 고양이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없는 살림에 돈을 털어 이런 것들까지 사 줄 정도면……. 아니, 잠깐. 참, 그러고 보니 그는 도대체 어떻게 돈을 버는 것일까? 내가 알기로 그는 아무 직업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아파트 돈을 내고(나는 그게 뭔지 잘 모르지만, 이상한 종이가 오면 돈을 내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쌀과 반찬거리들을 사고 고양이 밥과 장난감들을 사는 걸까? 나는 잠시 멍해졌다. 예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 이상한 느낌이 점점 심해진다. 그와 비례해서 나의 머리를 옥죄는 이 두통도 점점 그 강도를 더해 나간다. 확실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예전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젠장, 이 빌어먹을 두통만 아니라면 더 확실하게 기억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괴로운 눈을 들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신기해 하고만 있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방을 나와 옆에 있는 또 다른 방의 문을 열었다. 베란다와 연결이 되어 있는 이 방은 그의 방인 듯 했다. 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평소에 생활하는 공간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의외로 깨끗한 침대 보를 깔고 있는 침대 하나와 커다란 서랍장 하나, 옷장 하나가 놓여있었다. 나는 옷장으로 다가갔다. 옷장에는 몇 벌 되지는 않지만 모두 깨끗하게 세탁된 옷가지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나는 그가 직접 빨래를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옷장 안을 다 보고 나서 나는 서랍장에 눈길을 돌렸다. 많은 서랍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열어 볼 것인지 말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어쩌면 그는 그의 허락 없이 함부로 서랍장을 뒤진 나한테 화를 낼 지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미 내가 그의 집과 방에 들어왔으므로 서랍장을 열어보든, 그렇지 않든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랬다면 애초에 그의 집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대하며 하루종일 앉아있는 것은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다. 나는 마침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집에 들어오고 말았다. 그리고 이왕 들어왔으니, 보고 싶은 것은 다 보고 가자고 생각했다. 나는 서랍을 열었다.
머리가 아프다.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생각이 날지도 몰라……. 조금만……
서랍 안에는 많은 종이들이 들어있었다.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종이를 집어 들었다. 윗부분에 큼지막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각서. 본인은 이동욱에게 3000만원을 빌리며, 매월 40%의 이자를 지불할 것을 약속합니다. 만일 6개월 이내로 돈을 갚지 못할 시에는 이동욱이 원하는 대로 신장과 간, 콩팥을 대신 지불할 것을 맹세합니다. 서명. 최진철.' 다음 장. '수령증. 본인은 이동욱에게**군 **리의 **땅 1000평을 구입하여, 1평당 1000만원을 지불합니다. 본인은 이동욱에게 땅과 관련하여 어떠한 책임도 물지 않겠으며 이동욱은 이 땅과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확인합니다. 서명. 박진수.' 다음 장. '확인증. 이동욱은 정당한 게임에서 승리하여 본인 외 3명에게서 각각 5000만원의 축의금을 수령합니다. 본인 외 3명은 이에 관련하여 이동욱에게어떠한 책임도 물지 않으며…' 다음 장. 다음 장. '계약서. 본인은 이동욱과 정당한 법에 의거하여 본 계약을 맺으니…' 다음 장. 다음 장. 다음 장. 나는 정신없이 종이들을 읽느라 문이 열리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아, 생각이 났다. 그래, 그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이것과 똑같은 일이. 그 때, 동욱은……
나는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종이의 내용에 빠져들어 정신없이 읽고 있던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섬뜩한 기분이었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동욱이 눈을 빛내며 방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내 손에 든 종이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저, 나는…… 그러니까, 나, 나는……"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 속이 텅 비어버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동욱이 눈에서 빛을 뿜어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민주야…… 네가 다시 왔구나. 민주야……"
맞다. 그녀의 이름은 민주였다. 민주. 그녀는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녀는 궁금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의아심이 들었다. 민주가 누구지? 왠 여자 이름? 동욱의 눈에서 광기라고 부를 만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민주야…… 오빠가 서랍은 열어보면 안 된다고 했잖아. 지난번에도 보더니, 지금 또 보는 거니? 오빠가 그러면 화 낸다고 했을 텐데." 동욱이 서서히 나에게로 걸어왔다. 나는 종이들을 떨어뜨렸다. 무서웠다. 저런 눈빛의 동욱은 처음 보았다. 너무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지, 민주야. 남의 비밀은 함부로 보는 게 아니란다. 오빠 말을 안 들었으니 벌을 주어야 겠구나." 동욱이 나에게 팔을 뻗었다.
나는 벽에 내동댕이쳐졌었다. 나는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나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동욱이 나의 목을 움켜쥐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동욱이 계속 나를 밀어 부쳤다. 나는 등에 딱딱한 것이 부딪치는 것을 느꼈다. 베란다 난간이었다. 나는 간신히 눈을 떠 동욱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나는 순간 힘을 빼 버렸다. 동욱이 나를 밀쳤다. 떨어지면서 나는 동욱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말할 수 없이 따스하고 부드러운 빛이 어려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나쁘지 않아. 이것도, 나쁘진 않아.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 . . .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왔다. 비가 왔지만, 이상하게 동욱은 즐거워보인다. 왠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인간이란, 정말 알 수 없는 동물이다.
#다시0. Epilogue 비가 그쳐 간다. 비는 조금씩 조금 씩 엷어지고 있다. 물방울 맺힌 풀잎과 나무들 사이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난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왜 자살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날 저녁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그 대화 속에 답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사회는, 그런 자들에게 아직도 그리 냉혹한 것일까. 어째서 그녀는 이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했을까. 사회는 어째서 끝내 그녀로 하여금 자살이라는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일까. 나는 이런 의문들을 떨칠 수 없었고, 이것은 결국 나로 하여금 자살 방지 시민단체에 가입하도록 만들었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친다. 아직도 세상은 아름답다. 자살을 해서 나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포기해 버리기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고 가치 있다. 나는 자살을 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단순한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사실, 이건 의문이랄 수도 없지만……. 내가 당혹해 하는 것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나의 여동생과 역시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그녀가 모두 같은 날짜에 죽었다는 사실이다. 정말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처음으로 올리는 글이라 많이 어색하네요. 무거운 분위기의 글은 처음인데.. 귀엽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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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끝, 태초의 시작 |
첫댓글 저리가 이 나쁜 고양이..'-' ~
와아, 잘 봤어요. 시점이 자꾸 달라지니까 다소 두서없는 느낌은 있지만 재미있게 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