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HD역사 스페셜 이전에 유인촌 아저씨가 진행했던 역사스페셜을 책으로 출판한게 있는데 그중 7권에 나온 것을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요새는 하도 유명해진 조선시대 토방온실 우리민족 고유의 온돌을 사용하여 만든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겁니다(아 물론 온돌은 고대 로마에도 있지만)
온실에 대한 내용은 실록 사이트에 쳐서 찾아보면 우리가 아는 농작물 재배용 온실보다 다른 용도의 온실이 나오는데 제가 찾은 것은
세종 102권, 25년( 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12월 14일 갑오 3번째기사
흙집을 쌓아, 구걸하는 자가 얼고 굶주리지 않게 하다
평안·황해·함길·강원도 관찰사(觀察使)에게 이르기를,
“지금 들으니, 도내의 기민(飢民)을 진제(賑濟)하는 장소에 온실(溫室)이 없기 때문에, 기민들이 모두 오려고 하지 않고 여염(閭閻)으로 구걸하면서 우숙(寓宿)3666) 하기를 청한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토우(土宇) 쌓아 되도록 따뜻하게 하여 떠돌면서 구걸하는 자에게 얼고 굶주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선조 71권, 29년( 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30일 정유 3번째기사
남부 주부 신충일이 변방 오랑캐의 실정에 대하여 서계를 올리다
중략---그러나 신의 생각에 ‘만약 여기에 머물면 모든 오랑캐의 실정을 탐문할 길이 없을 것이다.’고 여겨져서 핑계하여 말하기를 ‘몸에 질병이 많아 온실(溫室)에서 조리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더니 신을 외성 안 동친자합(童親自哈)의 집에 숙소를 정해 주었습니다----중략
즉 말그대로 따뜻한 집이나 지금의 찜질방(백성들을 위한 의료기관인 동서활인원에도 한증서를 설치했습니다)같은 기능을 하는게 나오고 오히려 토우(土宇)라고 쳐야 제대로 나오더군요
명종 13권, 7년( 1552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1월 12일 을미 3번째기사
검토관 왕희걸이 제때 피지 않은 꽃은 관람할 가치가 없다고 아뢰다
상이 야대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왕희걸이 아뢰었다.
“신이 일찍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건대, 성종조(成宗朝) 때 장원서(掌苑署)에서 영산홍(暎山紅)【꽃 이름.】을 바치자 이를 물리쳤다고 하였으니, 그 의도가 참으로 훌륭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장원서가 꽃을 잘 기르지 못하였다 하여 관리를 추문하였습니다. 또 겨울철에 꽃을 기르는 것은 폐단이 매우 큽니다. 토우(土宇)와 시목(柴木)의 역사(役事)에 백성들이 많이 시달리고 있는데, 초목의 꽃과 열매는 천지의 기운을 받는 것으로 각각 그 시기가 있습니다. 제때에 핀 것이 아닌 꽃은 희완(戲玩)에 가까운 것이니 무슨 관람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정파(停罷)하소서.”
연산 58권, 11년( 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7월 20일 계묘 4번째기사
장원서·사포서 등으로 하여금 겨울에도 흙집을 쌓고 채소를 기르게 하다
전교하기를,
“시금치[辛甘菜] 따위 여러 가지 채소를 장원서(掌苑署)·사포서(司圃署)로 하여금 흙집을 쌓고 겨울내 기르게 하라.”
하였다.
위에 토우라고 직접 기록된거 말고도 겨울에 채소를 기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아마 토방 온실과 관련된 내용 같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이 토방온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했었는데 전순의라는 사람이 쓴 <산가요록>이 발견되면서 정확히 알 수 있게 됐습니다(이 전순의라는 인물은 현재 세종 22년인 1439년부터 세조대까지 어의를 지낸 인물로 추정됩니다)
참고로 이 사람은 의방유취라는 의서 편찬에도 참여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세종대왕 때도 귤나무를 강화도에 시험적으로 재배하라고 하는 걸 보면 15세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서양에서 공식으로 인정받고 있는 독일에서 1619년에 만든 유리온실에 비해 180년이나 빠르다고 합니다
일단 이 온실의 구조를 살펴보면
1.온실의 크기는 임의로 하되, 세 방향으로 벽을 쌓는다
2.구들장을 만들되 연기가 새지 않게 하고, 구들 위에 흙을 한자 반 정도 쌓는다
온돌 위에 황토나 배양토를 쌓으라는 얘기인데 역사스페셜과 또는 이걸 참고한 인터넷 사이트들은 1자를 30cm로 생각해서 계산 했더군요 물론 영조척으로 했을 경우 맞지만 이 영조척은 대체적으로 목수들이 많이 사용합니다 오히려 주척(1척 또는 1자가 20cm)을 적용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지
3.관을 솥에 연결하고 아침-저녁으로 불을 뗀다. 솥에서 나는 수증기를 안으로 끌어들여 실내를 훈훈하게 한다
위에 관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솥에 끓는 물을 실내로 공급합니다
4.남쪽으로는 살창을 내고 기름종이로 바른다
한지에 피마자유를 발랐다는데 당시 어떤 기름을 발랐을지는 모르겠지만 구하기 쉬운 걸로 했겠죠?
일단 위의 토방 온실의 우수성에 대해 살펴보면 난방뿐 아니라 습도조절,채광이 가능합니다
구들의 역할은 역시 난방인데 열 효율도 우수하고 열기를 오랫동안 보존하는 것도 있지만(만약 전설의 온돌인 아자방[亞字房]이면 ㅡ.ㅡ;;) 더욱 좋은 것은 지중난방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서양 최초의 유리온실과 다른 점인데 서양의 온실은 난로를 설치하여 따뜻하게 한 것이었는데 문제는 이런 방식은 땅 속까지 따뜻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최근에도 유리-비닐 온실은 열풍 방식으로 온도를 유지했는데 문제는 이런 방식은 기계 소음과 진동 때문에 식물들이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온게 파이프로 따뜻한 물을 보급하는 거였고 최근에 나온게 지중난방 방식으로 이 방식을 적용하니 수확량이 40~50%증가했다고 하더군요 즉 조선인들은 21세기 방식을 이미 15세기에 사용하고 있었던 셈이죠
물론 이런 온돌 방식은 방을 건조하게 하기 쉬운데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아궁이에 물을 넣은 가마솥을 데워 나무관을 연결해 수증기를 공급하는데 이로 인해 습기 공급 효과와 방의 공기를 데우는 효과를 동시에 봅니다(또한 온돌을 데우면서 가마솥의 물도 끓이고)
기름종이의 경우 여러 가지 효과가 있는데 생각보다 질겨서 폭우에도 상당히 잘 버팁니다(비닐보다 더 질기다고 하더군요)또한 기름이 섬유와 섬유 사이에 존재하여 물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한 비닐과 유리와 달리 이슬이 맺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기름종이가 액체상태의 물은 통과시키지 않지만 기체 상태의 물은 밖으로 내보냅니다 이슬이 맺히지 않게 하는게 중요한 이유는 이 이슬이라는 것이 맺히면 햇빛 투과율을 떨어뜨려 식물 광합성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거기다 이슬 자체적으로도 유해물질이 있어서 식물에게 다으면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고 찬 이슬 때문에 성장을 저해할 수도 있습니다
빛의 투과율의 경우 일반적인 창호지보다 뛰어나 일반적인 종이가 2만 룩스인데 비해 기름종이는 3만7천 룩스입니다
또한 보온성의 경우 유리와 비닐보다 약간 더 우수하다는 실험결과로 나옵니다(물론 한지 종류에 따라 또는 쓰는 기름에 따라 달라질 것 같지만)
이런 토우의 기능은 주로 궁중에 바칠 꽃과 야채와 과일나무를 재배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당시 역사스페셜 실험에서는 얼갈이 배추는 3주 만에 수확할 만큼 자랐고 이외 다른 꽃과 야채들도 빠른 시간에 자랐다고 합니다
민간의 경우는 이런 온실로 농경을 한 것은 아직 확인이 되지 않는 것 같고 치료용으로 간단히 만들어 사용한 것은 가끔 확인이됩니다
첫댓글 흥미롭네요. 조상님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필요한 물건의 발상은 비슷한가봐요. 토우라..
헤에~ 처음 알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기름 종이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네요. 가시광선 통과, 적외선 차단이 중요할텐데...
이 내용 나올때 참 재밌게 봤는데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