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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3,1독립운동 영웅이신 아버지!
3,1절을 맞아 100년의 애국심의 바람은 조국의 번영과 평화의 물결되게 하소서
나의 영원한 영웅이신 100년 전의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모습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40분 경,
목이 터저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며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만 한다는
불꽃같은 투지와 신념으로 종로ㅡ 대한문ㅡ 남대문ㅡ 적선동ㅡ 통인동 일대를 학생대열 선봉에서
"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며
독립신문과 독립선언문을가가호호 투입하시면서 편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식음도 걸르시면서 중앙학교 및 경성 송현동 천도교
기숙사 등에 피신하시며 기미년 3,1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악랄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시어
1919년 5 월 3일 경성제판소에서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경성재판소에서 징역 1년 선고를 받으시고
그 해 7 월 5 일 서대문 형무소에 입감되시어 온갖 고초를 격으시며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둡고 차디찬 감방에서 옥고를 치루셨을 때 사진 입니다.
이 사진을 자세히 확대하여 보니
목이 많이 부어있고 왼쪽 눈이 약간 이그려져있고 입술도 부어있고 입 주변에 멍자국이 보이고
앉으신 모습 뒤로 보이는 고문 형틀같은 딱딱한 나무의자를 보니 고문당하신 현장으로 추측되어
이 참담한 모습을 뵈오니 가슴이 찢어지 듯한 비분과 안타까운 슬픔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자꾸만 씻어냅니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굿굿하고 한 점 흩으러짐 없으신 의연하고 올곧은 자세를 보면서
엮시 대한 남아의 씩씩하신 정신을 읽습니다
같은 시기에 함께 3.1독립운동을 하시던 당시 입감자들의 사진을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
기록물에서 보면 대부분
고문에 시달리신 듯 피로하신 모습들로
아버지처럼 이렇게 굿굿한 기개를 엿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재판기록을 살펴 보면 징역언도를 받기 전
"왜 독립만세를 외치며 미친 듯 종로 대한문 남대문 일대를 소요하며
압수된 증거물
독립신문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다녔는가?"
라는 질문에 아버지께서는
" 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독립만세운동을 한 것은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당시 굿굿하신 어버지의 음성과 의지가 참으로 당당하게 보이는 듯 들리는 듯 합니다
오즉하면 2번의 상고가 기각되어 언도를 내렸을까요?
이 때 아버지의 나이가 피가 끓는 나이 19세! 중앙학교 (현. 중앙고등학교) 학생이었습니다
.
요즘 세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당당한 대한남아의 굿건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존경심과 자부심을,
슬픔에 젖기 보다는 뜨겁게 벅차오르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아낌없는 뜨거운 박수를 드리면서
오늘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밑거름이 되신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리며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숭고한 아버지의 애국심을 대대손손 끊임없이 이어
큰 뜻을 영원히 기리고저 합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광복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던 어려웠던 그 시절
1950년대 모든 가산 다 바쳐
부모 잃고 갈 곳없어 거리를 구걸로 떠돌던 불쌍하고 가엾은 전쟁고아들 모아
헌신적으로 보육하시느라 우리 자식들에겐 참기아내기 힘든 가난을 물려주셔서
참으로 원망에 원망을 수 없이 많이 했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자식들 보다 이웃을 더욱 사랑하신 아버지의 큰 뜻을 참답게 이해하게됩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시절 고아들과 함께 초라한 식탁이지만 음식상 앞에서 감사한 기도드리고
꽁보리밥에 짜디짠 멸치젓갈에 멀건 국 반찬으로 한 자리에서 식사할 때,
철없이 투정을 부리던 나를 고아들과 차별없이 대하며
혼내시던 아버지의 근엄하시던 모습이 생각할수록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아, 아버지!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어제는 국립현충원 충혼당 애국지사님들 함께 영혼을 모신 제례당에서
함께 합장으로 모신 부모님 영혼 앞에서 앉아 오랜시간 지난
추억들 떠 올리며 드리고 싶었던 많은 이야기들 드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뵙고 왔습니다.
아버지! 내일 3월 1일 아침 10시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식과 오찬 간담회에도 애국지사 후손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오후 7시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문화공연에도 초대 받았습니다.
잘 다녀 오겠습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40분경
서울 종로탑골공원에서 3.1 독립만세운동 시작이후 99년만에 서훈 받으셨습니다.
하마트면 영영 영영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혀질뻔 했던
아버지의 생생한 독립운동 자료들이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자료에서 발견되고 사실확인되어
어버지의 국내, 중국,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의 파노라와 같은 숨찬 활동이 검증되어 아버지께서
1919년 3,1일 이후 99년만인 작년 2018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게 되고 이와 같은 공적을 정부에서
극진하게 예우하여 지난 2018년 12월
극립현충원 충혼당에 어머니와 함께 영혼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근심 다 잊으시고
두분께서 편안하신 마음으로 명에롭고 영광스러운 유택에서
영원하신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곳 충혼당에는
지난날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신 선, 후배 동료 독립운동 영웅들이 많았습니다
심심하실 적엔 마실 다니시며 묵은 이야기도 나누시며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자랑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아버지의 명에로운 건국훈장을 독립기념관 등에 기증할 생각입니다
최고의 시설인 서울 국립현충원 충혼당
아버지 미남이세요 어머니와 함께 게시니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요 ^^
살아 생전 60대때 아버지 모습
아버지의 사진은 다 유실되어 이 사진 한 장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중국 및 러시아 망명중 항일 독립운동 사료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한국사 자료에 기록물
1920년 출옥이후,
전국 학생대표의 일원으로 전국을 돌며 조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강연을 다니시다가
'일제감시대상인물'로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에 기록) 주야 감시로 자유롭지 못하여
해외 중국 러시아로 망명하셔서
그곳에서 치열한 독립운동을 하실적 사진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뵙습니다
가운데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님 왼편 옆 자리 한국광복군사령관이신 이청천 장군
옆자리에 앉으신 분이 아버지로 추정됩니다.
모두 다 맞다고 하지만 현재 신중하게 정확한 증거를 확인 중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출옥 후, 러시아로 망명,
독립운동을 하실 당시,
1920년 1월 21일 부터 2월 2일 까지
모스크바 렌닌그라드 페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코민테른 국제대회로
한국 중국 일본 몽고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국제피압박국의 대표들과 함께 열린 '극동인민민족대회'에
20대 최연소자로 당당하게 참석하여 항일민족해방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를 비롯한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활발한 항일운동 활동하시며 한국대표들과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기록물이 국가편찬위원회 자료집 한국사 러시아편에서발견되었습니다.
당시 한국대표로 참석하신 분들은 23개 단체 대표 52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주요인물로는
홍범도, 이동휘, 박진순, 여운형, 장건상, 임원근, 김단야, 김규식, 나용균, 김시헌, 김원경 ,권애라 등이었으며
한국독립운동사 사료 35권 러시아편에 기록된 사료내용 가운데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극농민족대회 이후,
1922년10월 22일 부터 4일간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대회에서 엮시 최연소자로
한국측 학생대료 일원으로 조봉암 등과
해외에서의 항일민족해방운동과 독립운동 전개 내용에 관해
통합회의를 하는데
이 회의에서 최연소자인 아버지께서는
영성적인 태도로 당당하게 발언하시는
회의록 자료를 읽으면서
아버지에 대한 뜨거운 애국정신에 감동을 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아버지께서는 한국대표의 대의원 심사자격위원에 만장일치로 선출되는 등
눈 부신 활동을 하시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회의 이후 아버지는 러시아에 머무시면서
1925년 조봉암, 조동우, 최명직, 조상호 등과
모스크바공산대학에서 수학하십니다
이 시기에 모스크바공산대학 졸업생 가운데는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을 비롯해
중국을 강국으로 발전시킨 등소평도 있습니다.
한국독립운동사의 핵심기간은 1919년에서 1926년 사이가 가장 치열했던 것으로
국가기록원 자료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 후, 1930년대 초 아버지께서는
일본으로 건너가 신익희 백남훈 등 와세다대학에서 유학을 하시면
항일독립운동을 유학생들과 펼치십니다.
살아 생전 60대때 아버지 모습
(1889년 11월 14일 ~ 1966년 3월 30일 )
첫댓글 아버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시는 마음이 애닯습니다.
얼마나 그리우신가요?
늦게라도 애족장 서훈을 받으시고 충혼당에 이르셨다니 반갑고 고마운 소식입니다.
늘 좋은 소식 전해 주시고요, 항상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3.1절 행사 참여 소식도 올려 주셔요.^^~♡
안녕하세요 김명옥 선생님
오늘은 100주년기념 31절 행사 여러곳을 다녀왔습니다
노인이라 그런지 좀 힘들어 쉬고 있습니다
위로와 격려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와 ~ 훌륭하신 아버님을 존경합니다. 늦게나마 애족장 서훈을 받으시고 활동하신 내역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따뜻한 봄 날 광주에 놀러오세요.
오랫만에 박영숙 부원장임을 뵙습니다
늘 경로원 식구들 뒷바라지로 섬기시는 일에 열성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 경로원 실태에 관하여 조사를 한 일이 있는데 광주의 천헤경로원 만큼 시설환경과
관리상태가 좋은 곳이 내 생각으로는 없었습니다
강은수 원장님을 비롯한 모든 임직원들의 사랑과 봉사로 귀착되는 아름다운 지극정성잉 아닌가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린나이에 독립운동을 하신 아버님의 음성이 100주년을 맞이하는 3.1절 이 귀한 날에 들리는듯합니다. 애족장 서훈을 받은 기쁜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을 비롯해서 독립운동하신 많은분들이 계셔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장하고 복 받은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나라를 가진 백성들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일제시대 나라를 잃은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 모두 다 합심하여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항일운동으로 헌신하신 애국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대한민국정부가 존재함으로 생각됩니다
오늘 아침 19세 어린 학생이던 아버지께서는 당시 31운동 계획시기 부터 관계하시던 분으로 원레 낮 12시에 탑골공원에서 천도교, 기독교,불교의 종교단체와 학생들이 모여 31만세운동을 비밀리에 계획했엇는데 민족대표 32인이 종로 태화관에 모여 선언서 낭독하고 일경에 자수를 하는 바람에 우왕좌왕하던 학생들이 오후 2시 40분경 자발적으로 오산학교 졸업생 학생이 선언문 낭독후
노도와 같이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수많은 백성들과 종로 대한문 맘대문 등지로 시위를 하ᅟᅡᆫ 것이 31운동의 최초 시직이엇으며 그 역사의 숨찬 현장에 존재하셧던 아버지이시기에 나에게 최고의 영웅이신게지요
하루 종일 거리를 뛰어다니시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던 그 어린 학생이던 아버지께서는 밥한술 물 한 모금 누가 챙겨주시지도 않은 가운데 지금쯤 피신하신 어둡고 추운 곳에서 얼마나 허기에 지치셨을지를 생각하녀 오늘 나도 굶고있습니다 조금전 하도 시장하여 따뜻한 밥에 좋은 음식 따뜻한 차를 먹고 보니 얼마나 죄송하던지 눈물이 흘럿습니다 어디 나의 아버지뿐이겠습니까? 그 시대 수 많은 나라 잃은 백성들의
다 함께 겪은 울분이며 슬픔이며 항일운동에 목숨 바치고 피흘려 싸운 역사의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희생이 잇엇기에 오늘 우리들은 모두 편안하게 잘 살고 있음에 깊이 감사드려야 할 일로 생각됩니다. 천혜경로원의 모든 분들 편안히 모시는 노인복지사로 사랑과 봉사의 일원으로 수고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너무 길었습니다. 100년전 그날 잠자리마져 힘드셧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가 없네요
기도하며 밤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따뜻하신 주말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오옥희 선생님. 격려와 위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