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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말하다] 안심하고 즐겁게 공부하시오 소설가 이광수가 아내 허영숙에게
소설가 이광수가 아내 허영숙에게 3월 17일 밤 이렇게 혼자 건너방에 앉아서 당신께 편지를 쓰는 것이 나의 유일한 행복이외다. 오늘, 11일에 부친 편지를 받으니 이레 만에 왔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여 병원에 못 간다니 심히 염려되며, 내가 첫 편지를 5일에 부쳤는데 의학교로 그것이 11일까지 아니 갔다 하면 필시 중간에 무슨 잡간(검열?)이 있는 모양이외다. 8호까지 누락 없이 다 받았노라고 자세히 회답하시오. 건강이 근심이 되어서 곧 전보를 놓으려 하였으나 놀란다고 어머님이 말리셔서 못 놓았소. 이곳은 다 잘 지내니 안심하고 즐겁게 공부하시오.
오늘 140원 부친 것 받았을 줄 믿소. 그리고 기뻐하셨기를 바라오. 그걸로 양복 지어 입고 40원으로는 3월 학비 하시오. 나는 학교에서 참고서를 많이 사주어서 그것만으로도 몇 달 공부거리는 되겠소. 또 모레부터는 아주 집을 들고 역사*를 시작할 터이니 약 40일간은 공부할 기회도 없겠소. 그러니 내 책 걱정은 조금도 말고, 애도 쓰지 말고 아주 맘 턱 놓고 지내시오. 5월부터 매달 학비는 60원 보내리다. 그리고 여름 양복값 보낼 터이니 얼마나 들지 회답하시오. 공부하는 중이니 저금 아니해도 좋소. 학비가 곧 저금이오. 여름옷에는 렌코트** 같은 것이 있어야 하겠으니 모두 값을 적어 보내시오. 내 매달 수입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학교에서 80원 내지 100원, 《개벽》에서 30원 내지 50원, 《신생활》에서 40원, 만일 《동명》이 나오면(확실히 나온다오) 거기서 80원 내지 100원은 될 터이니 가장 적게 잡더라도 150원가량은 되겠으니 당신의 학비와 내 책값, 담뱃값에 군색치는 아니할 모양인즉 아주 안심하고 공부하시오. 봄에는 금강산에 갈 수 없으니 아마 6월 그믐께나 가게 될까 보오. 당신은 7월에나 돌아올 터이니, 《개벽》 3월호는 부쳤소. 3월호가 재판이 났는데 내 글이 호평이라니 기뻐하시오. 《신생활》은 성태 군이 직접 부친다 하오. 내 글을 떼어 모으는 직분을 게을리 마시오. 바요링*** 책과 모포들은 곧 보내 드리리다.
남편
* 役事, 토목이나 건축 따위의 공사 ** 레인코트 *** 바이올린
한국 최초의 여의사인 허영숙은 춘원 이광수의 반려이자 주치의였다. 동경의 병원에서 치료비가 없어 쫓겨나게 생긴 환자를 의대 실습생으로 도운 것이 그들 만남의 시작이었다. 그를 첫 대면하던 날부터 그가 북한군에 납치당하던 1950년까지, 수십 년간 허영숙은 의사로서 그의 곁을 지켰고, 중태에 빠진 그를 번번이 소생시켰다.
일제강점기 말에 춘원이 스스로의 친일 행위를 참회한다고 사능에서 돌베개를 베던 때가 있었다. 병약한 그는 돌베개의 냉기를 견디지 못해 와사풍(안면신경마비)에 걸린다. 폭격 때문에 기차도 안 다니던 시기였는데, 허 여사는 효자동에서 사능까지, 달구지를 구해 가서 춘원을 모시고 왔단다. 그녀가 없었으면 춘원은 아마 1950년까지 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수양동 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도 춘원은 중환자여서 병감에 들어갔고, 해방 후 친일파로 수감되었을 때도 여전히 중환자였다. 공산군이 납치해 가자 춘원은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허 여사는 평생 춘원의 건강 지킴이였고, 보호자였으며,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춘원은 상하이에서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귀국은 투항”이라며 도산 안창호가 극구 말리는데도 그가 사지(死地)로 귀국한 것은, 허 여사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춘원에게 허 여사가 귀국을 종용한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허락되지 않는다지만, 만약 그때 춘원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적어도 친일파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 문학사는 《흙》도 《사랑》도 가질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 손익계산표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이 편지는 춘원이 허영숙과 재혼한 직후에 쓴 것이다. 결혼한 뒤에도 허 여사는 공부를 더 하겠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춘원은 장모와 둘이 살면서 열심히 일해 아내에게 옷값과 학비를 보내준다. 평균수입이 한 달에 약 150원가량이었는데 이 편지에 나타난 송금액은 140원이다. 가진 것을 거의 다 보낸 셈이다. 그러면서 늘 “공부 열심히 해라” “레인코트를 맞춰 입어라”하고 배려하는 말만 하는 춘원은 어질고 너그러운 남편이다. 이 무렵의 다른 편지를 보면, 편지가 제때 안 온다고 허 여사가 앙탈을 부리는 대목이 나오는데, 춘원은 번번이 어른스럽게 거기에 대응한다. 《사랑》에 나오는 안빈 박사처럼 춘원은 여자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여성숭배자였던 것이다.
허 여사는 그 후에도 아이까지 데리고 다시 한 번 일본에 가 공부를 계속한다. 그런 학구적인 면이 효자동의 ‘허영숙 산원(産院)’을 유명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1930년대에 공부를 하겠다고 남편을 두고 외국으로 두 번이나 유학을 가는 여인이 있었다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고 뒷받침해준 남편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허 여사는 결혼을 잘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춘원도 결혼을 잘했다. 1920~1930년대의 동경유학생들은 나혜석처럼 현실에서 너무 멀리 날아가 디디고 설 땅을 잃고 참담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허 여사처럼 실력을 쌓아서 커리어우먼으로 성공한 여인은 드물었다. 그녀처럼 가정에 충실한 여인도 역시 드물었다. 허 여사는 다른 모던걸과는 달리, 자유연애 사상 같은 것으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지 않는 절제를 알았다. 그녀는 한 남자를 선택하여 결혼을 하고, 그 남자에게 충실하면서, 자신의 자아를 백 퍼센트 살린 희귀종이다. 그건 어쩌면 그녀가 중용의 미덕을 터득하고 현실감각이 있는 서울 여자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혜석이나 김원주 등은 거의 다 지방 출신이다. 서울에서 멀수록 현실과의 거리가 멀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뿐 아니다. 허영숙은 그 무렵 동경 유학생 가운데 유일한 이과 출신이다. 춘원 주변에 있던 다른 여학생들은 거의 다 문학 지망생들인데 허 여사만 여의사다. 문학을 지망한다는 것과 지방 출신이라는 두 가지 여건이 신여성의 일탈도와 함수 관계를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 서울신문. 글·사진_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