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소설이 보여주는 상상력의 세계
이지용(문화평론가)
SF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
SF가 과연 무엇일까? SF는 용어가 등장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은 형태의 정의가 있었고, 또 변화하고 있다. 1851년에 용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정의는 “과학으로 인해 드러난 진리들이 본래 시적이고 진실한, 즐거운 이야기와 얽히고설킨 것”(윌리엄 윌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20년대 SF라는 장르적 개념을 정립했을 때는 “과학적 사실과 예언적 비전이 뒤섞인 멋진 로맨스”(휴고 건스백)이라는 정의가 부여됐다. 이후 상상력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는 신화를 창조하기 위해 과학을 서사적으로 사용하는 것(폴 앨콘), 실재에 대한 창의적인 과학 지식과 과학적 방법을 일치시키려는 유일한 현대 문학(조애나 러스), 기술적으로 포화한 사회의 문학(로저 럭허스트)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나타난 근대 과학을 통해 이전까지 세상을 인식하고 이야기하던 방식의 변화를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매김해 왔다.
하지만 근대 과학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SF에서의 근대 과학이라는 요소가 더 이상 새로움을 전달하는 장치로 머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 시기부터 과학기술의 발달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기 시작했고, 과학기술은 세계의 거대한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정보에서 나의 주변과 일상, 그리고 우리들의 삶을 구성하는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기술적으로 포화한 사회라는 로저 럭허스트의 언급은 1980년대 기술이 ‘일상’의 영역으로 포섭되기 시작했음을 파악하고 논의되기 시작한 이른바 사이버펑크 담론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듯 20세기 중엽을 지나면서부터 SF는 근대 과학 기술에 관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를 인식하고 이야기하기 위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변화의 중심에 여전히 근대 이후 나타난 과학이라는 매개체가 명확하게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다.
현대 사회의 새로움에 대한 충격을 헤쳐 나가게 도와주는 역할(엘빈 토플러), 문화적인 변형들에 상상을 통해 대응하기 위한 변혁(앤디 소여, 피터 라이트), 사실주의 문학 양식에서는 재현해 낼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사실인 어떤 것을 포착하기 위한 이야기 형식(셰릴 빈트)이라는 SF에 대한 정의들은 이러한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종합해 볼 때 SF는 근대 이후 세계의 변화에 대한 지점들을 인식하고 이를 이야기로 담아내려고 하는 욕망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이지만 가변적이고, 본질도 없고 하나의 통일된 특성이 없기 때문에 1940년대의 ‘Science Fiction’과 2014년의 ‘Science Fiction’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존 리이더의 정의는 이 시대의 SF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현대의 SF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로봇과 외계인, 우주 공간이 펼쳐지면서 특별한 과학기술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특정한 방식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를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떠올리고 있는 <스타워즈>나 <스타트렉> 등의 스페이스오페라 들에서의 풍경은 SF를 설명하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21세기에 접어든 지도 20여 년이 넘은 지금에는 그 변화가 훨씬 더 다채롭게 진행된 상태이다. 이처럼 SF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그 안에서의 상상력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 수 있다.
SF 소설과 상상력의 세계들
SF의 상상력은 그 시대의 과학기술 발달 혹은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SF의 효시라고 불리는 『프랑켄슈타인』(1818)의 경우도 1780년에 등장했던 갈바니의 실험에서 상상력이 시작되었고, 천문학의 발달과 관측 기술의 발달은 환상의 세계로만 그렸던 우주와 달에 대한 상상력들을 구체화하였다.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우주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와 같은 작품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1969년 달에 인간이 첫발을 내디딘 이후 우주 공간은 더 이상 미지나 환상의 공간에 머물지 않고, SF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우주에 나가는 것이 반복되고, 우주정거장을 건설하는 시대가 되고 난 후부터 우주는 더 이상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현실 공간이 되어버렸다. 영화 <그래비티>(2013)에 대해서 SF가 아니라 재난물로 분류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라고 할 수 있다.
SF 작품에서 처음 조어되어 이제는 일반명사가 되어버린 ‘로봇(Robot)’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R.U.R』(1920)에서부터 상상하고 있던 로봇은 말 그대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도구였다. 이후로 로봇은 『아이, 로봇』(1950),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1968)에서와 같이 인간과 얼마나 다르거나 닮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간 중심적 경향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로봇과 컴퓨터 기술, 결정적으로 AI 기술의 발달로 인해 로봇에 관한 이야기들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2010)와 같은 작품들을 보면 결국 인간 중심주의적이고 이분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그들이 얼마나 개별적이고 독립된 존재로서의 가능성들을 지니고 있는지를 사고실험하고, 우리 사회가 그들과 함께 모색해야 하는 삶의 방식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대두되고 있는 기후 위기에 대해서도 시대적 변화와 과학기술의 발달 양상을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해 왔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 환경보호 담론은 프랭크 허버트의 『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명하다. 작가가 오리건주의 사막화에 대해 취재하다가 행성 아라키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 집필 배경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SF의 세계관을 상상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SF에서는 환경문제에 대한 사고실험을 꾸준히 시도했었고, 그 결과 ‘에코토피아’, ‘기후소설’와 같은 하위장르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1990년대 에코토피아 담론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킴 스탠리 로빈슨의 ‘화성 3부작’의 등장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기술의 발달에만 상상력이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발달이 인간사회의 정치와 사회 구조들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상상했던 것 역시 SF에서 상상해 온 세계의 큰 부분이었다. H.G 웰스의 『우주전쟁』(1898)도 본래 영국의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을 위해 창작되었던 것이고, 자본주의의 확장이 불러온 폐해들을 비판하기 위해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돌아보며』(1888)가 창작된 것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산주의 혁명의 물결이 전 세계를 뒤덮던 시기에 예브게니 자마찐의 『우리들』(1924)이 발표되고, 과학기술 발달에 대한 낙관론이 지배적이었을 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가 창작된 것을 보면서 SF에서 상상하던 세계는 사회적 변화의 흐름에 맞춰 반응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SF 소설의 상상력과 그 이후
이와같이 SF에서의 상상력은 단순히 과학기술과 관련된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에 관한 이야기들이 두드러지는 것은 근대 이후에 시대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거대한 요인 중에 예외 없이 과학이라는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혹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은 이미 우리의 삶 전체의 거대한 흐름부터 일상의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관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SF에서 보여주는 상상력은 단순히 특별한 요소에 대한 접근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현대 사회의 삶의 모습 그 자체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옮기기 위한 당연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 양상은 최근 한국 SF 소설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SF 소설의 독자들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독자들이 늘어난 패턴들을 살펴보면, 기존 장르들의 소비 양상이라고 생각했던 팬덤의 확장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오히려 독자들은 한국 SF 소설이 그리고 있는 세계에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실제 한국의 SF 소설가들이 그리고 있는 세계에서는 우주와 로봇, 외계인과 기후 위기 등으로 멸망하는 세상과 같은 지극히 SF적인 요소들을 통해 현대 한국에서 문제시되는 다양한 이슈들에 과감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으로는 2016년 이후에 등장했던 페미니즘 서사가 있고,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노동권에 관한 이야기, 소수자에 대한 과감한 접근이나 기후 위기를 비롯한 인류세 담론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AI와 관련된 담론들과 이를 바탕으로 포스트휴머니즘에서 출발하는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평평한 존재론적 인식들 역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았을 때 한국 SF 소설에서의 상상력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먼 미래에 대한 공상이나 현실에서 유리된 세계를 그린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그것을 세계로 만드는 과감한 방식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과학기술이라는 SF 장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특성은 오히려 현대 사회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데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과 그 해결 방안의 영역에 과학기술이 긴밀하게 관여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 지난 세기에 진행되었던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던 테크노필리아도, 세기말에 불어닥쳤던 테크노포비아도 결국 우리에게 과학기술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부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확인시킬 뿐이었다. 또한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기술에 대한 민감도나 일상에서 기술을 활용하고 도입하는 데 적극적인 국가에 속하고 있다. 산업 등에서 로봇의 활용도 역시 굉장히 빠르게 확장되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다분히 SF적 통찰과 상상력을 통해 재현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을 보더라도 이러한 경향의 지속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 지구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기후 위기나, AI의 고도화로 인해 특이점을 넘어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의 공생이 예상되는 세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거대 변화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혐오와 차별의 문제들, 그리고 동물이나 생물들에 대한 성원의 문제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들이 직면해 있는 문제들의 대부분은 과학적인 정보와 그에 대한 인식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시대의 과학은 특정한 학문이나 전문인의 영역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의 일상, 혹은 삶의 영역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 SF 소설과 거기에서 발생하고 있는 상상력은 우리 삶의 문제들을 마주하고, 그에 대한 능동적인 사고실험을 수행하는 대중적인 방법론으로써 그 의미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장르의 취향과 무관하게, 앞으로의 SF가 계속해서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