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태양이 한낮의 운동장과 철봉을 뜨겁게 달구던 그 해
초여름에 전학을 왔다. 전라북도 산골짝에서 전학을 온 그 애는
이상하게도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촌스런
옷태, 꾸불텅한 사투리를 구사하리라 예감했던 아이들에게 그
아이는 고르게 배열된 하얀 이빨의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 아이는 학교 생활에 잘 적응했다. 그런 그 애가 얄미운 건
당연했다. 몇몇의 짓궂은 아이들이 그 아이의 약점을 골라 툭툭
건드렸지만 그때마다 그 아이는 그들의 공격을 시원스럽게 잘
받아쳐 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방학을 맞았고 나는 방학내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외로움을 느끼며 거의 매일 뚝방을 거닐곤 했다.
우연히 그 아이를 뚝방에서 만난건 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어스름 저녁때였다.
"너 이 동네 사니?"
"어, 저 뚝방 끝에 살아"
"너 죽은 다음 어떻게 될 지 생각해 봤어?"
"...난 사는 거 생각하는 것도 힘들어"
그날 나는 그 아이가 사는 뚝방 끝의 판자촌에 갔다. 레이션 박스와
판자로 얼기설기 지어진 집들 사이로 삶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애는 4남매의 첫째였다. 아버지가 3년전 몹쓸 병에 걸려 돌아
가시고 난 후 서울로 돌아온 어머니가 장안동의 가발 공장에서
일하시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방학동안 그 아이는
동생들과 함께 봉투도 접고 인형 눈알도 많이 붙였다고 했다.
인형 눈알을 얼마나 많이 붙였는지 머리가 빙빙 돌 것 같았다며
손가락을 동그랐게 말아 눈에다 대고 빙빙 돌렸다.
그렇게 여름 방학이 끝났다.
맹렬하게 타올랐던 여름이 사그러들고 가을이 사뿐히 내려앉은 후
나는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럭저럭 4학년짜리 여자
아이가 가을에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평범하게 치뤄 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늘 밝은 미소를 띄고 다니던 그 아이가 점심
시간마다 없어지는 것이었다. 촐랑촐랑 잘 돌아다니는, 친구가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 아이 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했고
판자촌에서 삶의 궁색함을 목도한 나만 안절부절 못했다. 며칠 동안
점심 시간에 그 아이를 보지 못한 나는 학교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다 그 수돗가에서 그 아이를 발견했다.
"집에 무슨 일 있니?"
"어머니가 아프셔"
난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과연 뭘 도와줄 수 있을까? 죽음보다도 삶이 이렇게 어렵구나...'.
<하늘이 두쪽이 나고 폭우가 쏟아져도 요번 가을 소풍은 갑니다>
선생님의 말이 씨가 됐는지 하늘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얼마간의 망설임 끝에 그 아이의 도시락을 함께 쌌다. 이걸 어떻게
건네줄까. 뭐라 말하며 건네줘야 자존심이 안상할까?
점심시간이 되자 배낭에서 도시락을 끄르지도 못한 채 나는 종내 그
아이의 눈치만 살폈다. 그 때 그 아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김밥 같이 먹자. 나도 오늘 밥 싸왔어"
한편으로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다. 그 아이는 잔디밭에
신문지를 깔고 씩씩하게 양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소풍 도시락에 당연히 들어 있어야 할 김밥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기른 상추다!"
그 아이는 파란 상추에 보리밥을 얹고 그 위에 고추장을 바른 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입에 꽉찬 상추쌈을 우물우물 씹으며 그 아이가 말을 했다.
"한 개 싸 줄테니 너도 김밥 하나 줘"
"그래"
그 아이가 싸준 상추쌈은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다.
"엄마 병이 좀 나았어. 나도 내년 봄소풍에는 김밥을 싸올 수 있을꺼야"
"상추쌈이 더 맛있어. 내년에도 싸 와"
"그런데 우린 내년에도 같은 반이 될 수 있을까?"
그 아이는 겨울 방학이 되기 전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머니가 병고
끝에 돌아 가셔서 동생들과 함께 고향의 작은 아버지 집으로 내려간 것이다.
나는 초록색을 좋아한다. 하지만 상추의 초록색은 나에게 슬픈 소품이다.
나는 오랫동안 상추를 입에 대지 못했다. 사실 그 아이 이름은 내 기억속에
또렷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김밥을 500개도 넘게 사먹을 수 있는
튼튼한 청년으로 자라 있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작가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