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한문(淸州韓門)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 한준겸(韓浚謙.1557.명종 12∼1627.인조 5) 조선 인조(仁祖)의 장인. 자 익지(益之), 호 유천(柳川), 시호 문익(文翼), 본관 청주(淸州). 판관 효윤(孝胤)의 아들. 생원에 장원으로, 진사에 7등으로 합격, 태릉(泰陵) 참봉이 되었다가 1586년(선조 19) 문과에 급제, 사국(史局)에 뽑혀 검열(檢閱)이 되었다. 선조가 출제하여 유신(儒臣)들에게 글을 짓게 했을 때 수위로 뽑혀 표피(豹皮)를 상으로 받았으며, 금천(衿川) 현감으로 재직 중 정여립(鄭汝立)의 반란이 일어나자 일찍이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했던 관계로 수금되었다. 1592년 예조정랑을 거쳐 원주목사(原州牧使)ㆍ지평(持平) 등을 거쳐 1597년(선조 30) 승지(承旨)에 이르러 왜병이 또 다시 쳐들어오자,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도와 마초와 식량 등의 수집, 저장에 노력하였고, 경기도관찰사ㆍ대사성ㆍ영남안찰사가 되었다. 원래 정인홍(鄭仁弘)을 싫어하여 그 집 앞을 지나면서도 방문하지 않았던 바, 정인홍의 일당인 문홍도(文弘道)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1600년 다시 기용되어 병조참판, 이듬해에 4도체찰사부사(四道體察使副使)를 겸했고, 호남안찰사ㆍ예조참판에 보직되었다. 당시 변경에 호적들의 침범이 잦아 4도도원수(四道都元帥)로 보직되고는 부제학을 겸하였고, 호조판서, 관서(關西)ㆍ영북(嶺北)의 안찰사가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 계축(癸丑)의 옥사(獄事)에 관련되어 수금되었다가 쫓겨났다. 다시 충원(忠原)에서 5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적소에서 지중추부사로의 소명을 받고, 5도도원수를 겸하여 중화(中和)에 부(府)를 두고, 북로(北虜)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인조가 반정(反正)한 후 임금의 장인으로서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ㆍ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이 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와응ㄹ 공주에 모시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세자를 전주(全州)로 모시고, 적이 물러간 후에 서울에 돌아와 죽었다. 선조의 유교칠신(遺敎七臣)의 1인이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중기의 문신. 한성 남부 훈도방(薰陶坊) 에서 출생.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본관은 청주(淸州), 시호 문익(文翼). 인조의 장인. 아버지는 판관 한효윤(韓孝胤), 어머니-예빈시 정 신건(申健)의 딸. 회산부부인(檜山 府夫人) 창원 황씨와의 사이에 2남 6녀를 두었다. 【생애】 6세에 종모(從母) 신씨의 손에서 자랐는데, 이 때 능히 글을 짓고 말을 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3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29세에 태릉참봉에 제수되 었다. 이듬해 별시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이 해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고 이어 홍문관 정자에 재임 중 임금이 글 제목을 내어 홍문관의 관원들에게 제진(製進)토록 했는데 선생이 수석을 하여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요를 하사받았다. 32세에 주서로 옮겼다가 이듬해(1589) 금천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임금이 선생에게 노모 가 계신 것을 알고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는 일) 하였다. 그러나 이 해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한 일로 연좌되어 옥에 갇혔다가 수개월만에 풀려나와 원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다. 36세 되던 선조 25년(1592)에 서용(敍用)되어 예조좌량에 제수되었고, 이어 예조정랑ㆍ강원도사ㆍ시가원 사서를 거쳐 그 해 겨울에 원주목사가 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다. 그 뒤 내직으로 지평ㆍ필선ㆍ정언ㆍ교리 등을 지내고 도체찰사 류성룡(柳成龍)의 종사 관이 되어 황해도와 평안도를 순찰하였다. 이어 부수찬ㆍ경상도관찰사ㆍ교리 겸보덕ㆍ검상ㆍ사인ㆍ부응교ㆍ사간ㆍ집의 등을 두루 거쳤다. 41세(1597)에 전한(典翰)에서 특별히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곧 좌부승지로 승진했는데, 이 때 왜적이 기호지방에 당도하자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도와 마초(馬草)와 변량(兵糧) 보급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곧 우승지를 거쳐 경기감사를 역임하고, 42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첨지중추부사로 있다가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에 재임 중 정인홍(鄭仁弘)의 압력으로 파직당했다. 44세에 병조참판을 지내고, 47세에 예조참판ㆍ부제학을 역임하고 48 세(1604)에 호조판서에 승진된 뒤 대사헌을 거쳐 한성부 판윤ㆍ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특히 함경도관찰사에 재임 중에 『가례』 등의 책을 간행, 보급하여 학문을 진흥시켰다.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儒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57세 때(1613)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류되어 전리방귀(田里放歸)되었고, 61세에 충주에 부처(付 處)되었다. 그 뒤 65세 되던 해(1621)에 여주로 옮겼다. 이 해 오랑캐 침입의 위험이 있자 이에 대비할 책임자로 뽑히어 유배지에서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5도도원사가 되어 국경 수비에 힘썼다. 67세(1623)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딸이 인렬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어 영돈령부사고 서 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공주에 호송 하고 돌아와 겸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로 <광해군일기> 편찬에 참여했다. 71세(1627)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자를 전주에 호종하였고, 이 해 7월 17일에 병을 얻어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죽었다. 【한준겸 묘】 원래 원주 음지촌(陰地村)에 장사했으나, 그 뒤 지관이 이르기를 "이곳은 지세가 불리하여 후손이 영락(零落)하겠으니 옮기라"는 말에 따라 선생의 장남 한회일(韓會一)이 인조 14년(1636) 5월 17일에 안산군 대월리(현 시흥시 거모동 산 62)에 이장하였다. 생은 풍모가 준수(俊秀)하고 기백이 완연하였으며, 사물에 접하면 혼연(渾然)이 온화한 기색이 가득 찼다. 또 선비를 좋아하고 학문에 힘썼는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으 며, 국가의 고사(故事)나 문헌전장(文獻典章) 등에 밝았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흥문화원) 【저서】<유천유고(柳川遺稿)> [출처] 청주한문(淸州韓門)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