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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소·부곡 (鄕·所·部曲)이란?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지방의 특수한 하급 행정구획. 1)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정복전쟁으로 생긴 투항자나 귀순자들의 집단지, 반역죄인의 집단적 유배지, 기타 특수한 생산노비의 집단 거주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일반 양민과는 달리 그 신분이 노비나 천민에 가까운 특수한 계급이었다.
부곡·향·소
부곡
2)원래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장군이나 지방 호족들이 사사로이 둔 사병을 말하던 것으로, 처음에는 군대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3)위(魏)·진(晉)·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관사(官私)의 병사를 뜻하였으며 그 뒤 당(唐)나라 때는 천민의 칭호로 변하였다가 4)명(明)나라에 이르러 완전히 소멸되었다. 5)한국에서는 이러한 신분적 의미와 함께 행정구획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였는데, 6) 신라시대에 가장 번성하였고 고려시대에도 전국적으로 분포하였으며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 부곡은 가부장적 대가족에서 단혼가족으로의 분화, 7)천인의 반란, 대외전쟁, 조선 건국초의 행정구획 재편 등이 원인이 되어 붕괴되었다.
향
8)부곡과 비슷한 행정구획으로 짐작되며 부곡과 같이 농업생산에 치중하였다. 부곡·향 주민들은 노비보다는 그 지위가 높았으나 이들 역시 천적(賤籍)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지방의 호장(戶長)이 주·군·현의 행정기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들의 천적을 장악하고 있었다.
소
향·부곡보다 뒤에 발생하였는데, 9)중앙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을 생산·공급하는 공장(工匠)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10)종류로는 철소(鐵所)·금소(金所)·은소(銀所)·동소(銅所)·자기소·사소(絲所)·지소(紙所)·주소(紬所)·와소(瓦所)·탄소(炭所)·염소(鹽所)·묵소(墨所) 등이 있었다. 향·부곡이 호장 등 토착관리에 의해 통제되던 것과는 달리 국왕의 권한 아래에서 소속 주·군·현의 기관을 통해 직접 주민들의 천적이 장악되었다. 11)소는 국가의 수요가 소의 생산능력을 초과하게 되면서부터 그 부담에 고생하던 주민들의 저항운동과 사회적·정치적 변동으로 내부로부터 붕괴되기 시작하여 15세기 후반 완전 소멸되었다.
성격
이같은 향·소·부곡과 일반 군·현의 행정구획과의 구별 기준은 호구(戶口) 수와는 관계가 없었으므로 12)부곡 중에는 현보다 많은 호구를 갖는 경우도 있었고 반란 등이 있었던 군·현은 부곡으로 강등되거나 반대로 공로가 있는 부곡은 현으로 승격되는 경우도 있었다. 13)향·소·부곡의 주민들은 양민에 비해 여러 가지 신분적 차별을 받았다. 예를 들면 국학(國學) 입학이나 과거(科擧) 응시를 할 수 없었으며 죄를 지었을 경우 노비와 동등한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14)양민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자식은 그대로 부곡에 남아야 하였으며 승려가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와 같이 노비와 거의 같은 대우를 받았지만 노비처럼 매매·양도·증여는 되지 않았다. 이러한 향·소·부곡이 15)조선 초기에 소멸되어간 것은 조선의 사회·제도가 전대(前代)보다 진보하였음을 말하는 것으로 전체 국민의 사회 지위가 향상되었음을 뜻한다.
<출처: 야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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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소.부곡이 생긴이유는 국가의 흥망에 따라 발생한 적국의 병사, 정치범, 또는 귀항이나 투항자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예) 거제도 포로수용소', 정도 될 까요? 그러므로, 특정 국가에 있는 별도의 행정구역임에도 불구하여, 해당인물은 모두 적국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라시대 대륙을 '향.소.부곡'의 위치로 비정하였을 때, 이 당시 향소부곡의 주요 인물들은 '백제의 유민', '당나라유민', '고구려유민'등이 해당하는 것입니다.
2) 이 행정구역의 역사는 '후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전통적인 제도로 설명이 됩니다. 또한, 이들의 집단을 '군사적 목적'이 강한 '사병'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특정 귀순유민들중 무예가 출중한 인물들을 가려뽑아 특수 집단을 만들어 비공식적인 군사목적으로 이용하였던 역사가 이어져왔나 봅니다. "예) 화교들을 이용한 '북파공작원'의 양성"등이 대표적이네요..
3)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도 사병의 성격이 바뀌지 않았다는 기록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관사라면 '공기관' 아닐까요? 공기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임의적으로 사병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는 내용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만...
4) 이들 대륙의 '부곡'은 대명(조선)의 성립과 함께, 오래된 역사의 기록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아래글에서는 현대의 개념으로 국민의 지위향상으로 표현을 하였습니다. 어찌하였든, 해당위치가 '향소부곡'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곳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5) 이 '부곡'이 신분적으로도 다르고 행정구역적으로도 다르다는 표현을 합니다. 행정구역이라는 것은 영역을 나타냅니다. 즉, 다른 행정구역이라는 것은 이들의 집단이 특정 지역을 포괄하는 상당히 광범위한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6) 신라시대에 발생한 이 행정구역이 고려시대에 가장 번성하여 전국적으로 이르고, 특히 이들을 주목해 보아야할 대목은 '농업'에 종사하였다는 기록입니다. 고려는 산악국가로 농사지을 땅이 만만치 않아 주로 개성상인을 바탕으로 하는 상업에 치중을 하였지만, 이들 '곡민'들은 농업을 하였다는 기록을 보여줍니다. 그만큼 서로의 위치가 지리적으로 달랐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들이 있었던 지역은 대규모 농업이 가능한 현재의 대륙이 해당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거란으로부터 동유럽평원을 빼앗긴 고려는 곡식을 충분히 조달하기 위하여 현재의 대륙에 대규모 수용시설을 갖추어 '곡식'을 충당하기 위하여 '향소부곡'의 제도를 널리 이용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7) 그런데, 이 '부곡'의 행정구역을 설명하면서, 천인의 반란, 대외전쟁, 조선건국이 원인이 되어서 없어졌다는 표현을 합니다. 유명한 '망이-망소'의 난, 고려와 몽고의 일본정벌시도, 해당위치의 조선의 건국을 설명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고려의 문제는 바로 이들 집단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8) '향'이라는 또 다른 특수 행정구역을 설명하면서 이들도 역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역시 부곡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겠습니다. 그만큼 '부곡+향'민들에 의존한 농업의 활성화가 고려로서는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곡+향'민들의 자신들의 손으로 지은 농사의 결과물은 모두 중앙정부가 가져가고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사유재산은 없었기 때문에, 해당집단의 반감은 그만큼 강해질 수 밖에 없었겠지요.... 이 때 부터 서로다른 나라의 태동이 시작될 수 밖에 없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9)+10) 이 들 두가지 행정구역에 비하여 '소'라는 행정구역은 중앙정부에서 필요한 특정 물품들을 대규모로 만드는 공장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로, 원료물질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제철소'의 느낌이 드네요... 또는, '중화학공업단지'로 비유하면 될까요?... 그 만큼 이들은 전문적 기술을 가지고 있던 '전문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생산량도 엄청났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역시 이들도 해당기술과 제품을 가지고 본인들의 이득을 위하여 사사로이 이용할 수 없은 태생의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1) 이 소는 특이하게 조선초기까지 유지되다가, 15세기 후반, 중앙정부의 과도한 요구가 있어, '주민들의 저항운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초기 그런 기록이 있나요?... 조선초기 하이튼, 일반백성들이 엄청나게 '역'에 종사해야 했고, 고단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즉, 내부붕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조선의 개국이후 일본이 가지고 있었던 불만의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으며, 이후, 16세기 임진왜란 으로 이어지는 '폭동'을 연장선에서 그려볼 수 있습니다. 즉, 15세기 이후, 조선의 상당한 '기술자 집단' 을 포함하고 있던 '공단'들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고, 해당인물들이 대거 일본, 또는 왜로 이주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12) 전체적으로 이들 '향소부곡'의 행정구역은 상당히 가변적인 것으로 인구수가 늘어나기도 하고, 쉽게 줄어들기도 하는 불안정한 조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정구역간의 싸움이 심하여 반란자들의 집단을 잡아내는 행정구역은 승격이 되기 때문에, 과도한 싸움과 경쟁으로 상당히 '살벌한 분위기'를 나타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3) 이들은 양민이 아니어서, 국가의 공직에 절대 등요이 될 수 없었고, 거의 노비의 수준으로 대우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국가에 행하는 업무에 비하여, 사회적 차별은 상당하였다는 것이 나타나는 셈입니다.
14) 이들은 양민과의 차별도 엄격하여, 양민과 사이에 생겨난 자식의 경우는 양민이 될 수 없고 '다시 향소부곡'민이 되는 철저한 신분적 차별을 견뎌내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의 접근은 그만큼 이들의 인종적 분포가 고려의 양민이상의 집단과 달랐다는 것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15) 그러나, 조선의 성립은 이들 행정구역을 없애는 주요 계기가 되었으며,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일본인들을 바탕으로 세워졌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되새겨 보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도대체 '왜' 생겨날 수 밖에 없었는 지를 예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조선이후에도 대륙에서 생산된 많은 물품들을 '중국'에 조공하는 전통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고려제국이라는 1원화 시스템에서 '명'+'조선'의 2원화 시스템이 생겨난 셈입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1원론과 2원론이 떠오르게 됩니다만....^^... 근본은 하나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두개가 될 수 밖에 없는 '천부경'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되며, '자연의 법칙'이 되는 것입니다. 이 후 이 두개의 집단은 '태극의 법칙'을 통해서 1800년대 이후, 또한, 영국의 제국주의, 대일본제국의 성립등의 격변기를 통해 '상-하'의 주종관계가 바뀌어 버리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집단은 아무런 노동력을 강요당하지 않으면서, 제국의 중심에 설수 있었지만, 더 많은 또 다른 집단은 엄청난 노동력을 강요당하면서 본인들이 주인이 될 수 없는 역사를 강요당해야 했고, 또 그것이 수백년간 대물림되는 갈등의 구조속에서 '제국의 중심에 섰었던 인물과 그들의 전통'을 동경하면서도, 받아들 일 수 없었던 '그들의 이원화된 심리'를 엳볼 수 있으며, 그들의 독자성을 세우기 위해 '주인을 배신'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역사는 가진자들의 산물로 인식되어, 후일 공산주의의 근본을 이루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으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자, 족보를 가지고 있는자, 역사를 계승하고 있는 자들에 대한 '과도한 혐오'가 극대화 되어 '대한제국'의 주요세력인 고려-조선인들을 '노예'의 계급으로 전락시키는 커다란 '우'를 범하게 됨과 동시에, 본인들 스스로의 몰락을 가속화시키게 되었으며, 그 수십년이후인 현재에도 수천년간 존재했던 제국의 주인인 '한국인'을 '서양인'으로 둔갑시켜,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complex를 원천제거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적당한 complex는 다수의 발전에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만, 과도한 complex는 커다란 '정신질환'을 나타낼 수 있는 직접적 이유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또한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군집'을 이루게 되면, 한 국가의 커다란 근심거리가 될 수 밖에 없음을 모두 다 인식하여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 참고: 요즘은 좋은 약이 많이 나와 약물적 치료로 충분히 '좋은 효과'를 보실 수 있음을 알려드리며. 자세한 내용은 가까운 의사나 약사의 상담을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출처 ; https://cafe.daum.net/chosunsa/POVo/3836?q=%ED%96%A5%20%EC%86%8C%20%EB%B6%80%EA%B3%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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