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은 하나
무아경(無我境)이라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관념이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지 본체자리는 아니다.
이 본체(本體)의 실재(實在)는 있기는 있지만 생각이 일어날 수 없는 사량부도지처(思量不到之處)고
시간 공간을 초월한 무극 이전(無極以前), 태극 이전(太極以前)이며 원자 전자가 성립되기 이전
우주의 생성이전(生成以前)이며 유무(有無)를 초월하여 선악시비(善惡是非)가 일어나기 전이다.
깨치는 방법이 있는 것은 부득이해서 의지할지언정
그것이 어떤 존재라고 인식한 게 있으면 벌써 착각이 붙은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지도를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하는 생각이 붙을 수 없으며
맨 처음부터 중생 때부터 지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자리다.
그래서 예불(禮佛)할 때도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하고 오분향례(五分香禮)를 하는데,
부처님께 예경(禮敬) 함에 있어 음식이나 떡을 올리는 헛된 예경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참된 예경을 올린다는 뜻이다.
먼저 계를 지켜서 닦는 마음의 향으로 예경하고 또 참선하여 정(定)을 닦는 마음의 향으로
예경하고 지혜의 향, 해탈의 향으로 예경을 올린다는 뜻이니,
해탈했다고 해서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도 소승(小乘)이 되어 반쪽 해탈뿐이므로
그것까지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탈지견향의 예경을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유무 주객을 초월하여 생사에도 주(住) 하지 않고 열반에도 주(住) 하지 말라는 것이니,
도인이 밭 갈고 농사도 하고 장사도 하고 좀 더 내라, 덜 받아라, 그런 소리를 해도
조금도 업이 되도록 이익을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니 탐진치 삼독으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육체를 나라고 하여 자기본위로만 살다가 이제 견성(見性)을 하고 보니
정말로 자기라는 것은 누가 해롭게 할 수도 없고 보태서 이롭게 해 줄 수도 없는 존재이므로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그저 항상 불변하는 존재이니 정말 자기를 위해서 할 일이 하나도 없다.
이제까지 이 몸뚱이 때문에 천사만려(千思萬慮)를 일으키고 온갖 망상을 다 일으켜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죄업을 저지른 것은
육체가 나인 줄 알고 저질렀던 짓이었는데 그것도 이제는 필요 없게 됐다.
오직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만이 일이라면 일이다.
그렇지만 이야기해도 이야기하려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깨우치는 것 일러 주는 것도 아무것도 내가 바랄 게 없다.
마음자리를 깨닫고 보니 돈도 소용없고 옷도 밥도 소용없고 차차 도가 높아 가면
육신이 실제로 그렇게 자유자재하게 되어서 불에 앉아도 아무렇지도 않고 물에 들어앉아도 괜찮다.
신라 때에도 그렇고 중국에도 그런 일이 많이 있다.
밤에 우물 속에 물이 한 댓 길 되는데 그 물속에 가만히 들어가 밤새고 앉아 있다가
날이 새면 나와서 밥 얻어먹고 돌아다니며 절도 하고 중생제도도 하고 그랬다.
마음이 점점 무심해지면 망상이 없어져서 이 육체가 본래 환(幻)이라는 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이 몸뚱이도 본래 망상 때문에 호흡이 필요해지는 것인데
망상이 죽 끓듯 하는 큰일이 생기면 호흡이 급하게 된다.
모든 망상이 뚝 떨어지면 호흡의 필요가 없어져서 줄어진다.
처음에는 차츰차츰 호흡이 1분간에 1 호흡하다가 나중에 2분간에 하다가 한 시간 하다가
극도에 다다르면 자연 호흡이 끊어져서 모공(毛孔) 호흡만 가지고 만족하게 되는데
더욱 깊어지면 모공 호흡도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면 그것이 환신(幻身)인데 그래서 시방제불(十方諸佛)이 증득제환(證得諸幻)이라 한 것이다.
범부(凡夫) 중생한테 처음에는 할 수 없어서 육신은 물질로 된 색신(色身)이니까 무상(無常)한 거고
부처님도 몸이 돌아가셔서 화장(火葬)해서 사리(舍利)가 나오고 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리하여 소승(小乘)에게는 아무리 성불해도 색신(色身)은 죽어 없어진다고 말해 주지만
이것은 아직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를 모르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승(大乘)에 올라오면 차차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법신(法身)인 걸 설명해 준다.
왜냐하면 현상이 본래 환(幻)이기 때문이다.
제불(諸佛)이 증득적멸심(證得寂滅心)이라고 하는 게 곧 증득제환(證得諸幻),
모든 일(것)이 환임을 증득(證得)한 것이므로
그때는 육신과 내 마음자리가 다르지 않고 둘이 아닌 하나의 도리로 설명한다.
그런데 우리 중생 경계로 보면 말하는 마음자리와 육체는 둘이다.
꿈속에서 온갖 활동을 하다가 꿈을 깰 때는 꿈에 있던 몸뚱이는 없어지고
또 현실의 딴 몸뚱이를 뒤집어쓰고 나와서 온종일 활동을 한다.
만일 몸뚱이와 마음이 하나라면 마음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이 몸뚱이도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
최면술에 걸린 아이가 이야기 몇 마디 하는 순간에 동경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그게 모두 다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이고 참이라면 둘 다 참이고 그런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육신 말고 마음이 따로 있어서 꼬집어 보면 육신이 아픈데
사실은 육신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이지만
육신이, 육신이 아픈 걸로 우리 마음이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일 뿐,
실제로는 이것은 본래 육신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다 되어 환화공신(幻化空身)의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이 둘이 아닌 경계가 된 거나,
지금 우리가 미(迷) 하여 몸뚱이 이것만을 나라고 생각하므로 해서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 육체가 아프지도 않고 안 아프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닐 텐데
불에 닿으면 뜨겁고 손 등을 꼬집으면 손등이 아프고 배를 꼬집으면 배가 아프고
다른 데는 아프지 않은 것이 다 마음과 몸이 한 덩어리가 된 때문이다.
마치 육신과 법신이 다르지 않은 하나가 되어 버려서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부처와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몸뚱이가 환(幻)이고 현실이 꿈인 줄을 모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부처님을 여래(如來)라 하는데, 여(如)는 진리인 법신의 본체자리를 말하며
이 여(如)로부터 여여(如如)하게 중생의 세계로 오셨다는 뜻으로 한 존칭이라 하고
래(來)는 오는 것 없는 거로 오신 것이고, 여(如)는 변동을 안 하는 것인데 어디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가.
진공처럼 변동할 수 없는 자리이고 움직일 수 없는 자리인데
부처님이 육체적으로나 법신(法身)으로나 근원적으로는 부처와 같은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보기에는 몸뚱이와 마음의 두 덩어리가 있는 것 같고
실달다 태자라는 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견성성불(見性成佛)했고
또 천당의 도솔천(도率天)에 계시다가 이 세상에 내려오시니
부처님을 따라 배우고 모시던 하늘의 대중들도 부처님을 옹호(擁護)하느라고 전부 따라 내려와서
49년 동안 부처님 불사(佛事)하는 것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돕게 되었는데,
그러니 부처님도 보살의 몸으로 계시던 도솔천 내원궁(內院宮) 때의 몸뚱이는 없어지고
또 보살의 몸이 지하로 내려가신 것으로 중생은 본다.
그러나 부처님 경지에서는 도솔천 내원궁이 곧 마야부인의 태중(胎中)이고
마야부인의 뱃속이 곧 내원궁이어서 오고 가고 할 거리가 없는 것이니
가비라 국이 그대로 내원궁에 앉아 있는 것이고 인도의 정반왕국(淨飯王國)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는 작다고 할 때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 속에 도솔천도 있고
정반왕궁도 있고 오고 가고 할 게 없는 자리다.
현재도 우리가 마음 쓰는 이대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절대 자유로운 것인데
우리가 미(迷) 한 중생이 되어 망상으로 보고 쓸데없이 부자유(不自由)한 짓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망상이 자꾸 났다는 것뿐이지 열반(涅槃)이니 생사(生死)니, 정법(正法)이니 사법(邪法)이니
이런 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 생각 없는 실상(實相) 자리에 눈 깜짝해 보면 합치될 수 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 듣고 앉았다가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오늘이라도 육조 스님처럼 깨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청담 스님- <금강경 강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