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84] 저주
길바닥에 구르는 사랑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 나와
사람 사람의 귀를 흔들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처녀의 가슴에서 피를 뽑는 아귀야
눈먼 이의 손길에서 부서져
착한 여인들의 한을 지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내가 미덥지 않은 미덥지 않은 너를
어떤 날은 만나지라고 기도하고
어떤 날은 만나지지 말라고 염불한다
속이고 또 속이는 단순한 거짓말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서
눈먼 이의 손길에 부서지는 것아
내 마음에서 사라져라
오오 ‘사랑’이란 거짓말아!
-김명순(1896~1951)
사랑을 꿈꾸는 이 땅의 소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이 백여 년 전에 이런 시를 썼다. 이렇게 사랑을 저주하는 시를 쓴 뒤에도 그이는 사랑을 했을 것이다.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었기에 ‘사랑’이란 거짓말에 속고 또 속을 수밖에. 착한 여자일수록 사랑에 약하다. 모질지 못하기에 “미덥지 않은 너를”(9행) 매몰차게 끊지 못한다. “어떤 날은 만나지지 말라고 염불한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주린 이의 입’ ‘눈먼 이의 손길’ 등 대구도 뛰어나다.]
일본 유학 중 열아홉 살에 고향 선배에게 데이트 강간을 당한 후 남성 문인들에게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조롱과 따돌림을 당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소설 25편, 시 111편, 수필 20편 등 방대한 작품을 남긴 김명순의 에너지, 유머 감각과 한이 엿보이는 시.
#최영미의 어떤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