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0501. 묵상글 ( 부활 제4주간 금요일. - 마음이 산란하지 않도록 정신 차리기, 기도 안에 굳건히 매달리기!.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6:48 추가.
----------------------------------------------------
260501. 부활 제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01 05:45
- 마음이 산란하지 않도록 정신 차리기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언젠가 80이 넘은 노인이 스님과 문답하는 것을 방송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나이가 되니 참으로 인생무상함을 느낀다고 하니 그 스님이 당연한 것을
왜 느끼느냐고 하며 그런 감성에 젖을 이유가 없다는 뜻으로 답을 하였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면서 저는 그 스님이 참 무정하다는 맘이 들었습니다.
노인은 자기감정을 얘기하는데 그 스님은 그 감정을 무 자르듯 자르니 말입니다.
누가 모릅니까?
특히 그 나이의 노인이 머리가 나빠서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마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성과 감성과 의지의 유기적인 작용에 따라 마음이 형성되기에
어떤 때는 이성에 마음이 더 이끌리고
어떤 때는 감성에 마음이 더 이끌리며
어떤 때는 의지가 더 강하게 작용하기에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생의 끝은 있기 마련이니 마음 산란할 필요 없다고 이성이 말해도
감성은 여전히 이 세상에 미련이 있고 의지는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정리될 때까지 마음의 산란은 피할 수 없는데
그러기에 마음을 뛰어넘는 정신이 주도하도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물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할 따 그 정신이 육적(세속적)인 정신이 아님은 물론이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과 그 나라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니 우리는 이 정신을 차리면 끝입니다.
그리하면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라고
프란치스코가 권고하는 대로 우리가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신을 지니면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가는 것이 싫거나 두렵기는커녕 얼른 가고 싶어 할 것이고,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 성령을 영접할 때까지 정신 차리기를 계속해야 할 우리입니다.
----------------------------------------------------
260501. 부활 제4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기도 안에 굳건히 매달리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당신께 굳건히 매달리겠습니다."라고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도 안에 굳건히 매달리기!
2026년 4월 30일 목요일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당신께 굳건히 매달리며, 당신께서 저를 끝까지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해리언 터브먼 생애의 단편들(Scenes in the Life of Harriet Tubman)
영적 지도자 테레즈 테일러-스틴슨(Therese Taylor-Stinson)은 해리엇 터브먼을 영적 용기의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흑인 노예였던 해리엇 [터브먼](수많은 흑인 노예들을 탈출시켜 주었던 영웅)은 처음에 자유를 향해 세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매번 두려움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홀로 남을까 두려워졌고, 죽음을 맞을까 두려워했으며, 가족과 공동체를 다시는 볼 수 없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움은 영혼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극복할 때 새로운 자유와 목표를 향한 집중이 주어집니다. 비록 그 길이 첫걸음에 불과할지라도 말입니다.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지적 성취가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도록 허락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깊은 영적·정서적 성취입니다. [1]
테일러-스틴슨(Taylor-Stinson)은 터브먼의 신앙이 위기 속에서 자신이 기도에 의지하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해리엇 터브먼은 약 93년의 삶 동안 끊임없이 하느님께 돌아가 보호와 지혜를 청하며, 가족과 이웃을 자유로 이끌 수 있는 힘을 구했습니다. 수많은 위기와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깊이 숨을 고르며 기도와 노래와 믿음을 통해 하느님 앞에 자신을 봉헌했고, 자유로의 부르심을 확신했습니다. [2]
해리엇 터브먼은 생애 말년에 언제 위험이 가까이 있는지 항상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 멈추어야 할지, 언제 길을 떠나야 할지, 언제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야 할지를 알려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늘 기도 안에서 식별하며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신뢰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당신께서 저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그렇게 하셨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강인함과 싸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고, 그것이 제 평생의 기도였습니다."…
해리엇 터브먼이 불확실한 시대와 필요의 순간에도 타인을 돕고자 했던 모습을 묵상하며, 저는 제 삶의 한 시기를 떠올립니다. 큰 시련의 때, 기도할 수 없었던 때, 타인에 의해 침묵을 강요받아 스스로도 침묵했던 때였습니다. 그때 제가 반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의 이름,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의미를 다 알지 못했지만, 그것만이 제게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는 노래 가사처럼, 저는 제 침묵이 곧 기도임을 깨달았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신뢰하는 제 마음이 기도였고, 제 황폐함이 기도였으며, 저보다 크신 현존을 향한 제 갈망이 기도였습니다. 저는 야곱처럼 말했습니다. "당신이 제게 축복을 주실 때까지 저는 놓지 않겠습니다." 축복이 무엇일지, 어떻게 주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저는 신뢰 안에서 걸었습니다. 제 안에 저보다 크신 분께서 살아 계시며, 끝내 저를 이끌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3]
우리 공동체 이야기
가끔씩 어둠이 찾아올 때 저는 그것과 씨름하고, 견디며, 받아들이려 하지만, 종종 그것이 무엇보다도 ‘스승이자 변혁자’라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보게 됩니다. 마치 어두운 공간에 들어가 눈이 서서히 적응하며 빛을 발견하는 것처럼, 혼란과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제 이러한 사실을 기억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에서도 온전히 함께하시며, 즉각적인 이해 없이도 평화와 사랑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요... 이러한 경계의 시간들은 이제 제게 보물이 되었습니다.
—Jo-Ellen D.
References
[1] Therese Taylor-Stinson, Walking the Way of Harriet Tubman: Public Mystic & Freedom Fighter (Broadleaf Books, 2023), 99–100.
[2] Taylor-Stinson, Walking, 27.
[3] Taylor-Stinson, Walking, 117, 11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o Dayag,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씨앗이 땅에서 돋아나 빛을 향해 펼쳐지듯, 우리도 날마다 주님의 빛 안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보호와 생명의 근원이심을 알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안심하며 자라납니다.
++++++++++++++++
숨영성 묵상글
노동자 성 요셉과 노동자 예수님을 함께 기리며....
성 요셉은 나자렛의 목수로서, 가족을 부양하며 자신의 직업을 성실히 수행한 모범적인 노동자였습니다. 교회는 그를 통해 우리에게 땀 흘려 양식을 얻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길이며, 모든 사람은 정당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마태 13,55)이라고 칭하지만, 마르코 복음은 단순히 "목수"(마르 6,3)라 부릅니다. 마르코는 다른 복음서들처럼 이야기를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예수님이 목수이셨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목수의 아들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서른 해 동안 무엇을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노동자 요셉 성인뿐 아니라 노동자 예수님도 함께 기려야 합니다.
과거에는 육체노동을 "노예의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이런 일을 금했습니다. 회계사는 주일에도 계산할 수 있었지만, 농부나 목수는 손을 놓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노예의 일"이라는 표현은 복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목수요 다양한 것을 고쳐 주는 수리공 혹은 건축가(τέκτων)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노예의 일"이라는 표현은 계급의식이 강한 사회에서 육체노동을 천시하며 노동자들에게 태도까지 "종처럼" 요구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 스며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독일의 도미니칸 신비주의자 중 한 사람인 요한 타울러(1300–1361)는 어느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누구보다 깊이 사랑한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을 농부로 살며 40년 동안 쟁기를 끌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가 어느 날 주님께 '일을 멈추고 성당에 앉아 있어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주님은 '아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땀 흘려 빵을 얻는 일을 계속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 요셉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노동을 묵상과 성화의 길로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 요셉은 평생 노동으로 살았고, 예수님께서도 그분 생애의 90%를 장인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노동이 다른 일보다 덜 고귀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마태 13,56)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잘 아는 듯했지만, 그분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우리도 교회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같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을 깊이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오늘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묵상과 기도 안에서는 물론이고 우리 일상의 작은 일들(노동) 안에서도 그분을 깊이 만나고 더 깊이 알아가라."고요.
우리가 그분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의 마음(성심) 안에 깊이 들어가 침잠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시간은 조용히 앉아서 묵상을 할 때도 가질 수 있지만, 우리가 자그만 일을 하는 순간에도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마음(mindfulness)으로 그분을 만나고자 한다면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의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진정한 마음의 전환 혹은 회심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우리의 그분에 대한 사랑도 점차로 깊어질 것입니다. 아직도 '나'에게 예수님이 데면데면한 어떤 한 존재라면, 우리가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성 안에 들어서지 못하였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참된 인격적 관계요 친밀함이지 당신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성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우리도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성 안에 머물 때 그분의 지혜를 배우고 그분 사랑의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260501.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과 ‘세 번 부인하게 될 베드로에 대한 예고’ 다음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함께 밝혀줍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본 바를 말하니’, 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아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잠시 동안만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7,33)고 말씀하셨건만, 이를 알아듣지 못한 토마스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발언이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진리”(áληθεια)라 함은 그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곧 진리를 발견하고, 성부를 만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생명’이심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알게 됩니다. ‘앎’은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서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으며, ‘참된 앎’은 그것을 실행할 때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으면서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써 진리의 빛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260501.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월의 첫날입니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5월은 ‘성모 성월’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5월에 성모님께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본당에도 5월에는 행사가 많습니다. 5월 2일은 성모의 밤, 5월 3일은 생활 성가 대회, 5월 10일은 Mather’s day, 5월 16일은 다문화 미사, 5월 17일은 청소년 음악회, 5월 23일은 꾸르실료 재교육, 5월 24일은 견진성사가 있습니다. 시편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바라 얻고자 하는 것 한평생 주님의 집에 모여 사는 것” 이런 말도 있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농부가 여름에 땀을 흘리는 것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는 것도 물 때가 맞아야 합니다. 물 때가 맞지 않으면 그물을 던져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물 때가 맞으면 힘이 들어도 힘차게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멋진 글이 있습니다. 제목은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입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대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요즘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들은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어라.”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죽음도, 권세도, 칼도, 박해도, 굶주림도, 천신도, 악신도’ 사도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 진리, 생명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산에 오를 때 먼저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작은 표시는 큰 힘이 됩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은 먼저 간 사람들의 땀과 노력입니다. 역사는 혼자 달리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역사는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앞선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고, 후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남겨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류가 만들어 온 문명이며 문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 사랑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군중들의 모욕이 있었고, 제자들의 배신이 있었고, 뼈를 깎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부활의 길이었고, 희망의 길이었고, 영원한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공식을 알면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 수 있었습니다. 원리와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지도와 나침판을 가지고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교에서는 삼강오륜을 이야기합니다.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이런 가치와 척도로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유가 없는 진리는 때로 독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광신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독점하고 억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작됩니다. 알은 깨어지는 아픔을 거쳐야만 비로소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는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끊어야만 비로소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순교하였지만, 교회는 온 세상으로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명예, 성공을 추구하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어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참된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과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신앙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 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 항해하는 배를 안내하는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만 밝은 빛으로 안내할 뿐입니다. 밤길을 안내하는 등대도 배가 가까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등대는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등대가 밝히는 빛을 따라서 암초를 피하고,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평생 3가지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대에게 가장 값진 시간은 언제인가?"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톨스토이'는 정답까지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은 지금 마주한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마주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누구도 앞으로 어떤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세상에 온 유일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때그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선행을 다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런 삶이 모여서 영원한 생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260501.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충실히 살아온 삶의 흔적!
거룩한 수녀님들 연피정을 동반해드리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마침까지 대침묵 속에 피정이 진행되니, 시간이 정말 느리게 가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선물처럼 주어진 여유로움에 감사하며, 정말 오랜만에 제 발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비롯해서 몸 전체는 매일 뽀득뽀득 씻고 관리를 하는 편이지만, 잘 보이지도 않고, 늘 가려져 있는 발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오늘 자세히 보니, 정말이지 발에게 미안했습니다. 보기가 흉할 정도였습니다.
매일 바쁘게 오르락내리락, 달리다시피 살아오다 보니 발바닥은 굳은살이 깊이 박히고, 뭐 한번 제대로 발라준 적이 없다 보니 부르트고 갈라져서 참 보기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결코 부끄럽지는 않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아온 흔적이로구나. 백방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닌 흔적이로구나, 하는 마음에 기뻤습니다.
한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였습니다. 신자들 대부분이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들과 농사짓는 농부들이셨는데, 영성체 때 펼친 손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고된 일에 손이 너무나 거칠고 투박했습니다.
사고를 당했던지 손가락 한두 개가 없는 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끄러워하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살아오신 흔적이요, 박수받으셔야 마땅한 훈장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노동절인 동시에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입니다.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지만 노동에도 영성이 있습니다. ‘노동의 영성’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노동의 영성’, 그 핵심은 아주 쉽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심히 노동하셨던 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출가하시기 전까지 양부 요셉을 따라 장인(匠人)으로서 매일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사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을 계승합니다. 따라서 오늘 노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 부여입니다. 그 어떤 일에 종사하든 자신의 일에 중요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자긍심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노동자 성 요셉의 전구에 힘입어 은총 충만한 하루, 새로운 에너지를 충만히 부여받는 행복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들, 세상을 위해,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십시오. 어려운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매일 되풀이하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되며, 내가 하느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지니시면 좋겠습니다.
----------------------------------------------------
260501. 부활 제4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4,1–6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그리고 이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불안한 마음을 향한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 존재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말씀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단지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바로 그 길이심을 깊이 강조합니다.
사람은 길을 묻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은 지도만 주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만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시라는 것은
우리가 헤맬 때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진리이시라는 것은
혼란과 거짓 속에서도
끝내 붙들어야 할 중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생명이시라는 것은
지쳐 있고 메말라 있을 때에도
우리 존재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근원이
주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참된 안식을 얻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는 말씀은
그저 마음을 다독이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돌아가야 할 참자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흩어지는 것은
길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길이신 분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랑/기쁨 주간 안에서
이 말씀은 더욱 깊이 들립니다.
사랑은
길을 잃은 이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길로 이끄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저 길로 가라” 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이 길이 되어
우리 곁에 서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기쁨은
그 길 안에서
더 이상 혼자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에서 자랍니다.
기쁨은
모든 문제가 즉시 사라져서 오는 감정이 아니라
길이신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깊은 신뢰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또한 오늘 성 레오 대교황을 기억하며
이 복음은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참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최종 목적이 되시고,
참사람이시기에
우리의 발걸음을 실제로 이해하시며 함께 걸으실 수 있습니다.
길이신 분이 우리 바깥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의 길을 친히 걸으셨다는 사실,
바로 여기에 큰 위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묻습니다.
내 마음은 지금 어디에서 산란해지고 있는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인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인가,
통제하려는 조급함인가,
아니면 길을 잃은 피로함인가?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 말씀은
문제를 즉시 없애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문제 한가운데서도
길이신 당신 자신을 놓치지 말라는 초대입니다.
주님,
제 마음이 흩어질 때
당신께 다시 돌아오게 하소서.
당신이 길이시니 헤매지 않게 하시고,
당신이 진리이시니 속지 않게 하시며,
당신이 생명이시니
지친 제 영혼을 다시 일으켜 주소서.
아멘.
----------------------------------------------------
==========================================================
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
260501.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00 추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시며 ‘목수’이셨다는
것은(마르 6,3),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과 인간들을 고치려고, 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오신 ‘하느님의 목수’이십니다.
그래서 목수라는 직업은 예수님의 사명에 직결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그 당시 목수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쪽에 있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메시아’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직업이 농부라는 뜻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농부들이 하는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하느님은 생명체들을 만드신 분이고,
그 생명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불우이웃 돕기 성금’에 관해서 말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2코린 9,10).”
하느님은 우리에게 씨앗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고,
그 씨앗이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분이고, 그 열매를 풍성하게 늘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께서 주신 씨앗을 잘 심고
가꾸고 돌보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6-9).”
신앙인은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협력자입니다.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3)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은 그 자체로
‘선’이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선’과 ‘사랑’의 반대쪽으로 갈 때가 많습니다.
‘아담’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드신 다음에 그곳을 관리하는 일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 대한 전권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오염시키거나 파괴할 권한은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일으키는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의 반대쪽에 있는 ‘악한 일’이고,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쟁을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파괴가 아니라 구원을 향해서, 또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4) 복음서에는 ‘농부’이신 하느님과 ‘목수’이신 예수님에 이어서, 사도들이 ‘어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사람 낚는 어부’ 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 라는 뜻입니다.
<‘물’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생명’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사람 낚는(구원하는) 어부’로 변화되었는데,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부르심에 응답할 때 자신들의 직업을 버리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천막을 만드는 일이 직업이었습니다(사도 18,3).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사도가 된 후에도 직업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선교활동을 위한 활동비를 벌기 위해서 그 일을 했습니다.
사도들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원래 직업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
또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입니다.
----------------------------------------------------
260501. 부활 제4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9:50 추가.
요한 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처음 가보는 산에 오를 때 먼저 그 산을 오른 사람들이 나무가지에 묶어놓은 이정표가 큰 힘이 됩니다. 그 이정표를 잘 따라가면 길을 헤매지 않고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정표는 먼저 간 사람들이 다음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길’입니다. 그 길에는 그것을 개척해나간 이들의 땀과 노력이, 다음 사람은 자기처럼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진심과 호의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그런 길을 내셨습니다. 군중들의 변심이 있었고, 제자들의 배신이 있었으며, 죽을 만큼 괴로운 고통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걸으신 그 길은 우리에게 희망의 길이자 영원한 생명의 길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길’은 앞날을 알 수 없는 모호함,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힘듦과 괴로움을 표상합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까지 무려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이리 저리 헤매야만 했지요. 그 과정에서 목마름과 배고픔, 앞날에 대한 걱정, 자기들이 마주해야 할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약해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려 그분을 배신하고 헛된 우상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진노를 사서 큰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을 걷고 싶은 마음보다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한 ‘길’이 되어주겠다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엉뚱한 곳을 헤매며 고생하지 않고,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괴로워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까지 무사히 다다르도록 함께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유일하고도 가장 빠른 길이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 아버지의 참 모습을,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을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우리 구원을 위한 ‘진리’가 되시는 겁니다. 또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영적 성장과 구원을 위한 양식으로 내어주시며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참 ‘생명’이 되어주시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리고 구원에 대한 지식은 그저 머리로 안다고 해서 완성되는게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름으로써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참된 앎은 하느님과 그분 뜻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라는 존재를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하는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상 것들에 대한 걱정과 집착으로 마음이 산란해지게 만들지 말고,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라야겠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