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 16-18
또 여자와 아담에게
1. 본문 16절은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의 위엄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더 이상 긴 논쟁을 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아무리 핑계를 댄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와는 뱀을 앞에 내세우면서 자신은 모면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온갖 핑계를 무시하시고 정죄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의 제재에 직면하게 되면 모든 변명이나 핑계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몹시 진노하고 계신 하나님의 화를 더욱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와에게 내려진 징벌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여자가 아기를 잉태할 때 겪게 되는 모든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자가 본래의 상태에 있었다면 고통이 없이, 아니면 적어도 그와 같이 큰 고통을 겪지 않고서도 아기를 낳았으리라는 것은 믿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 결과 이러한 불편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따라서 “고통과 잉태”라는 말은 환치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견뎌야 하는 고통은 잉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두 번째 징벌은 복종입니다. “너의 소원은 오직 너의 남편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라는 표현방법은 마치 하나님께서 여자는 자유로운 자가 아니며 자기 멋대로 행동해서도 안 되는 존재로 오직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고 뜻에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똑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이것은 ‘너는 이제부터 아무것도 네 마음대로 행할 수 없으며 오직 네 남편이 원하는 것만을 바라는 자가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4:7)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사악하게도 원래의 고유한 한계를 넘으나 다시 제 위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와는 이전에도 남편에게 복종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속된 노예의 신분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2. 본문 17절은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입니다.
1)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인류가 아담과 하와를 통해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징벌이 우리의 첫 조상인 두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후손인 모든 사람에게 전반적으로 확장된 것이라는 사실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들이 일시적인 형벌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때 용서받으리라는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을 벌하는 이유를 제시하심으로써 인간이 투덜거릴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제거하십니다. 하나님보다도 아내의 말에 따랐던 그로서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내를 위해서 하나님을 경멸했으며 사단의 속임수와 간계를 그처럼 확고히 믿었으며 사단의 사자이자 노예였던 아내의 말에 맹종한 결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악하게도 부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간략하지만 단호하게 아담을 다루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좀더 쉽게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의 핑계를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를 간략히 언급하신 후에 땅이 그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너의 일 속에서’ 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사본에 ‘땅이 아담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듯이 땅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은밀하신 권능으로 부여하시는 비옥함인 것처럼 저주도 하나님께서 은총을 거두어 가실 때 나타나는 반대적인 상실을 의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를 통해 징벌이 아무 죄도 없는 땅에 내려졌다는 것은 전혀 모호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최초의 동체가 모든 천체를 회전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파멸이 그를 위해 창조되고 그에게 지배를 받도록 만들어진 피조물 위에도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진노하시거나 은총을 내리시는 것에 따라 이 세상의 상태도 인간의 처지와 같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이 모든 징벌이 땅으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서 인간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땅은 자신을 위해 열매를 소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양식을 제공하기 위해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노가 마치 홍수처럼 온 땅에 넘치게 될 것이며 인간이 볼 수 있는 곳은 어느 곳이든지 그의 죄가 보이게 될 것이라고 공표 하셨습니다. 타락 이전의 이 세상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과 부성적인 너그러움이 가장 충만한 기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온갖 요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긍휼로 가득하지만(시33:5)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떨어져 있다는 증거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표징을 보고도 무감각하다면 우리는 무분별하며 몰지각하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비통과 공포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도처에 자신의 선하심에 대한 표적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이 무죄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처럼 순전하고 명료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뒤에 남은 것을 고려한다면 다윗이 ‘땅은 하나님의 긍휼로 가득 차 있도다’ 라고 말한 것이 적절한 표현인 것입니다.
2) 모세는 이어서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땅에서 생산되는 실과를 먹는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이차본)은 고통이라고 번역되며 이것은 ‘수고’와 ‘피곤’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아담이 전에 누렸던 즐거운 노동과 대조적인 말로서 나타나 있습니다.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담이 전에 놀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담은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활동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경작하고 가꾸어야 할 동산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동에는 달콤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속적인 노동이 그에게 부과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가 광산에서 일하도록 정죄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즐거움이 인간의 노동에 혼합되었기 때문에 그 같은 형벌의 고통도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의해 경감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완전히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그처럼 인간의 일에 기쁨을 부여하셨습니다.
3. 본문 18절은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입니다.
수고와 노동으로 땅의 소산을 취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로써 땅이 이전과는 달리 완전한 실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제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이 본래의 비옥한 상태에서 퇴화하고 가시덤불이나 엉컹퀴 같은 잡초가 자랄 것이라고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에서 아무리 필요 없는 무익한 식물이 자라더라도 그것은 땅의 자연적인 소산이 아니라 죄로 인한 부패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땅이 우리의 목적에 악의를 품고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처럼 우리의 뜻이나 농민의 수고에 부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땅을 질책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땅의 불모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우리의 죄를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끊임없는 생산으로 인해 땅이 황폐해진 것처럼 오랫동안 땅을 경작해왔으므로 황무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한편 인간의 사악함이 증대됨에 따라 하나님이 남겨두신 축복이 점점 감소되며 손상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기근이나 다른 무서운 질병으로 곧 멸망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곧 이어지는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이라는 구절은 내 생각에 너무나 엄격하게 풀이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담이 전에 먹어도 좋다고 허락 받은 실과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전에 지녔던 우아함을 박탈하시고 오직 야수들만을 위해 마련하신 채소를 먹도록 하신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도하지 않으십니다. 맨 처음에 그에게 지정된 생활 방식은 아주 행복하고 기쁨에 넘친 것으로서 나중에 처한 상태보다 훨씬 더 우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채소라는 말을 통해 빈곤한 생활의 일부분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은 마치 왕이 자기와 함께 식사를 하던 사람을 천하고 저속한 식탁으로 내몰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이것은 아버지가 말을 듣지 않는 아들에게 종들이 먹는 맛없는 음식을 먹게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다른 음식을 먹지 못하게 방해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베풀었던 관대함을 최소한 줄이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오직 좋은 열매만을 맺어야 할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인다고 해도 네가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은 생산해 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위로하기 위해 덧붙이시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